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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을 보며 ....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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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을 보며 .... (계 2:18~29)


1966년 9월 22일 제 6대 국회가 개회되었을 때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일본으로부터 “사카린”을 다량 밀수한 사실에 대하여 장관들이 그 사건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한독당 김두한 의원이 국무 위원석을 향해 탑골공원의 화장실에서 퍼온 오물을 투척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김두한 의원은 국회모독 죄로 구속되고 정치 생명은 끝났지만 당시 재벌과 부패한 관료들의 행태로 답답해하던 국민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김두한은 부패한 정부 관료들과 국회를 향해 오물을 투척하였지만 오늘 우리네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의 마음에 오물을 뿌리는 것 같아 쓴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권위 있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2009년 9월 15일 자 인터넷 판은 '의회 난투극 (parliamentary brawling)' 부문에서 한국이 역대 최고 챔피언 대만을 제치고 현재 세계의 리더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전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장 무질서한 의회’라는 불명예를 안은 것입니다.
이 잡지는 우리 국회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종합격투기’, 국회는 ‘온몸을 사용하는 스포츠’ ‘난투극’ ‘패싸움’ 장소, 국회의원은 ‘피를 봐야 하는 욕망을 가진 자’라고 묘사했습니다. 
읽기에 낯 뜨겁고 챙피한 기사입니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 국민들의 얼굴에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흑백 논리로 선, 악을 판단할 수 없는 때가 많아서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역사가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란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나라 정치가들의 수준이란 항상 당리당략에만 집착하여 제 앞 이익에만 눈이 멀어, 모이고 흩어지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의 명수들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회란 국민들의 소리를 대변해야 하는 기관입니다. 법을 만들어도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5년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표결직전 모든 언론 기관의 여론 조사에서 국민의 약 70%가 탄핵에 반대했고 헌법학자들 80%정도가 탄핵 사유도 미약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부쳐 탄핵 안을 가결시키고 국회를 나오면서 “국민의 뜻에 따라..”, “의회 민주주의의 승리” 라는 말로 자체 평가를 했습니다.

언론 기관이나 각 정당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 나타난 국민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당리당략(黨利黨略)을 따라 해석하고 합리화시켰습니다. 모두 애국심에서 그랬다고 말하지만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진정한 애국자로 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정치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챙피해 지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국민이 오물을 뒤집어쓰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대통령이든 국회위원이든 사심을 버려야 합니다. 좁은 땅, 사랑과 화합으로 뭉쳐도 국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든 판에, 세계가 보는 앞에서 우리끼리 서로 물고 뜯는 일 그만하도록 기도합시다.

본문의 말씀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보내는 편지로서 첫 번째 에베소 교회, 두 번째 서머나 교회, 세 번째 버가모 교회에 이어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두아디라 교회에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아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뜻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아디라 성은 염색공업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두아디라 성 근처의 여러 계곡에는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는 '터기 레드(Turkey red)라는 초록색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식물의 뿌리에서 나오는 액체는 옷감을 염색할 때 쓰는 색소 원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옷감을 염색하는 산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염색 산업의 발달은 같은 업종끼리의 조합을 형성시켰고 조합들은 활발한 연합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는 단체로서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관여하였는데 친목이라는 명목아래 우상숭배와 음행을 행하는 모임이었습니다.

1. 불 꽃 같은 주님의 눈

이러한 두아디라를 바라보는 주님의 눈은 불 꽃 같았습니다. 본문 계 2:18절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모든 것을 감찰하는 눈입니다. 대하 16: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 66:7절에는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 라고 했고 그 뿐 아니라 잠 15:3절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렘 16:17절에서는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김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은폐되지 못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불 꽃 같은 눈으로 두아디라 교회를 바라볼 때 어떤 모습입니까?

2. 부지런하고 근면한 사람들

주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보신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은 아주 부지런하고 근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계 2:19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많았습니다. 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사업들 즉, 구제와 봉사와 선교 등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점점 더 많아졌고 그것은 주님의 칭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은행에서 당신에게 매일 같이 하루에 86,400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억원씩 주는 특전을 줬다고 가정해봅시다. 조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돈은 그 날 다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축도 안 되고 다음 날로 이월 할 수도 없습니다. 다 쓰지 못한 것은 저녁 때 회수됩니다. 
이 은행은 "하나님의 침묵" 이라는 이름의 은행입니다. 이 은행이 날마다 여러분에게 지불하는 돈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어김없이 하루에 86,400초, 즉 3600분 시간으로 24시간을 지불 받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특혜입니다. 이 특혜를 우리는 착실하게 사용하고 있는 가 살펴야 합니다. 

게으르면 안됩니다. 
잠 10:4절을 보면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 12:11절에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세상 일도 부지런해야 하지만 주를 섬기는 일에 게으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렘 48:10절의 말씀에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게으르지 말라고 강력하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게으르다의 본래 뜻에는 돌보지 않는다와 무책임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어떤 일이든 기뻐하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모든 것을 다음에 하자고 미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는 맡기신 일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자에게 소명을 주실 리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게으른 자의 머릿속은 악마가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게으름이 낳는 모든 결과와 생각은 허망한 것 뿐이며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로 많은 사업들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나중행위가 처음것 보다 많도다” 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좋았으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더 많도다” 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그곳에서 책망할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3. 이세벨의 유혹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계 2:20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주님의 사업을 감당했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성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7대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과 같이 두아디라교회를 이단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유혹한 거짓 선지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두아디라 교회처럼 책망을 받지 않으려면 이세벨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세벨의 유혹이란 무엇입니까?

① 은사 위주의 신앙을 경계하여 합니다. 
이세벨은 자칭선지자 였습니다. 본문에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라고 한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현혹시킬 만큼 거짓된 영적 은사가 있었습니다. 영적 능력은 사단도 행합니다. 은사 제일주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과 기도로 항상 뼈대가 굵어져야 합니다. 

② 보이는 것을 쉽게 믿으려는 약점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22절에 그로 더불어 간음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볼 때 남자들의 눈을 매료시킬 만큼 매혹적인 외모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비정상적인 교회 단체일수록 지도자를 신격화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위엄이 있게 보이기 위해 연출을 합니다. 화려하고 이상한 의상을 입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리고 각종 은사들을 꾸며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거짓 종교에서는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헛된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돈벌이를 위해 우상을 만들고 우둔한 인생들을 그것에 물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침니다. 

인간에게는 도마의 습성이 있습니다. 
요 20:25절에서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경험주의라는 용어를 씁니다. 

“봐야 믿지, 증거를 보여봐” 이런 표현들이 인간의 습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경험주의가 아닙니다. 이세벨 주의자들은 이런 인간의 약점을 이용합니다. 신비한 능력이나 이적들을 선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가끔 부흥회 광고가 기독교 계통의 신문에 실립니다. 
“불의 종, 능력의 종, 병마가 물러가고 하늘의 축복이 떨어진다”

물론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선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에는 이세벨의 유혹이 통할 수 없습니다. 요 20:2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들이 복된 것입니다. 

이세벨의 매혹적인 미모와 그가 가진 영적인 능력은 사람들을 완전히 뿅 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 잘못되고 당장 눈에 보이는 비성경적 은사주의와 거짓 교리에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이런 두아디라 교회에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회계의 때

계 2:21절을 읽어 봅시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맨 먼저 힘써야 할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은혜의 생활 축복 받는 은총의 삶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영성도 없이 오래도록 죄의 길을 헤매며 살아온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기도의 문이 열리고 깊은 신앙의 세계가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육신의 만족과 타성에 젖은 안일한 삶에서 돌이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돌아서서 겸비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온갖 구습에서 먼저 용감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한 총각이 어느 처녀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둘이 함께 시골의 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총각은 수줍게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그만 밭 옆에 파놓은 커다란 거름통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거름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그녀에게 사랑을 계속 고백한다면 처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처녀는 “우선 나오세요. 목욕이나 하세요” 라고 말할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의 환경과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실수하거나 잘못을 인정할 때 “미안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미안합니다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서 거미줄을 치워 주세요" 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항상 같은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항상 똑같은 기도를 듣는데 지친 목사님이 어느 주일 아침 그의 옆에 와서 무릎을 꿇고는 큰 소리로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그 거미를 죽여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소유하는데 방해가 되는 죄의 버릇을 없애는데 때로는 과감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유혹에 넘어갈 때마다 하나님께 우리를 깨끗케 해달라고 기도만 하지 말고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 거미줄을 없애는데 필요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을 끝내겠다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죄를 짓게 유혹하는 사람이나 장소를 멀리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거미를 죽이십시오. 그러면 거미줄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로만 "잘못 했습니다, 회개 합니다" 하면서 사는 것은 날마다 옛날 그대로라면 이것은 옳지 않은 삶입니다. 
죄를 시인하고도 끊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언제나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죄를 끊어버리는 과감한 결단을 동시에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R. 빈센트가 말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눈물 흘리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다. 슬픔을 행동으로 바꾸어 곧 새롭고 보다 나은 삶을 향하여 움직이는 의지적 행동이 곧 진정한 회개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길 가는 사람이 교통신호를 피해 갈수 없듯이 크리스천은 회개를 피해서 신앙 길을 갈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구합시다. 그리고 과감한 결단으로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어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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