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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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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2:1~13)
 
 
1. 유혹에 노출된 인생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에는 항상 유혹이 따른다. 그러므로 유혹이 끝나는 날은 당신이 죽는 날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 유혹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인데요,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안에 욕구가 있고, 세상에는 그것을 충족시켜줄 것이라고 우리에게 손짓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 본문 13절이 말하는 “시험”, 즉 유혹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가장 크고 강한 욕구는 무엇입니까? 즉, 여러분은 무엇에 제일 약합니까? 어느 학자는 “사람들에게 제일 큰 유혹은 財物”이라고 말했습니다. 돈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죠. 둘째는 ‘명예’이고요, 셋째가 ‘권력’, 그리고 넷째는 ‘성적 쾌락’이라고 합니다. 

이런 유혹들이 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들리거나 넘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제2차 世界大戰 당시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본회퍼는 이 유혹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몸에는 급작스럽고 격렬한 욕망을 향한 헛된 경향이 있다. 저항할 수 없는 능력으로 욕망은 우리의 육체를 지배한다. 

어느 한순간, 마음속에 숨어 있던 비밀스런 불이 붙여져 육체는 불길 가운데 타오른다. 그 욕망이 성적인 것이든, 야망이든, 허영심이든, 복수를 위한 것이든, 명성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든, 돈에 대한 탐욕이든, 이 세상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한 욕구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욕구가 치밀어 오르면)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은 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현실적이 되고 오직 우리의 욕구만이 실제가 되어버린다.” 무슨 말입니까? 유혹이 다가와 그것에 휩싸이면 하나님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고 오직 慾求만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구에 지배당하여 넘어지면 그 손해가 얼마나 크고, 또 아프기는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험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이 치명적인 유혹이 될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시험을 만날지라도 넘어지지 않기를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합니다. “나는 강하다. 나는 문제없다. 나는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이라면 여기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그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자만하는 자가 넘어진다!

1) 역사적인 경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자만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오늘 본문에 역사적인 경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급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렇게 애급을 떠난 그들은 광야라는 혹독한 현실을 만났지만, 하나님은 더위와 햇살을 피할 수 있도록 구름기둥으로 덮어주셨고, 밤이면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진 듯이 있는 그들을 위하여 불기둥을 주셨습니다(출13). 

그러는 가운데 그들이 홍해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홍해를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사 그 가운데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길로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본문 1절 이하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땅인 시내산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수많은 가축들이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침마다 만나라는 하늘 음식을 이슬처럼 내려주셔서 40년 동안 먹게 하셨습니다. 또 바위를 가르셔서 거기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시는 등의 방법으로 40년 동안 마시게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요, 5절에 보면, “…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10가지 기적을 통해 애급에서 나오고, 200만 명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았고, 또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으며, 그렇게 힘든 광야 길을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다수가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바로 이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6). 즉 출애급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어간 사건은 오늘 여러분들의 거울로서 ‘그들처럼 살지 않고 그들처럼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오늘 본문 7절부터 10절까지에는 그들이 시험을 받아 넘어진 4 가지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를 든 후, 11절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는 말씀을 다시 합니다. 그러고 나서 12절에서,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결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험을 받아 넘어진 것은 어떤 문제였을까요? 

➊ 광야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주시는 첫 번째 역사적인 경고는 7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라는 그 한정된 공간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먹고 마시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그런데, 그들이 시내산 아래 있을 때, 모세가 계명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간 뒤,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遲滯되자 아론과 談合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그 금송아지를 향해 예배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한 후 불경스러운 잔치를 벌인 모습을 묘사하고, “일어나서 뛰논다”는 것은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가운데 놓고서는 광란의 춤을 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여 말하기를, 금송아지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들은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죠. 

바울 사도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으로서, 선 줄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넘어진 행동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 역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우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별 문제 의식 없이 偶像의 神殿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고향 고린도의 전통이다. 고린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면서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 여러분,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는 신앙이라고 하면서 “금송아지”, 즉 돈을 비롯한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부요를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장차의 복, 천국의 복보다는 이 세상의 복이 진짜 복인 것처럼 추구하는 금송아지를 모시는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의 우상숭배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선 줄로 착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곧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➋ 역사적인 경고의 두 번째는 8절에 있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이것은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땅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모압 왕은 사이비 선지자 발람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주하면 할수록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었지요. 그 전략은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사막 길에서 햇볕에 그을리고 제대로 씻지 못한 여인들만 보고 살던 이스라엘 남자들은 모압의 세련된 여인들의 國家 計劃에 따른 ‘美人計 作戰’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미인계 프로젝트를 주관한 것은 모압의 신 바알브올의 神殿에 있던 女司祭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혹에 넘어간 이스라엘 남자들은 여인들의 품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바알브올이라는 모압의 우상에게 제사하는 자리까지 감으로서 육신적인 간음은 영적인 간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함으로써 이 만 삼 천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죠. 

여러분, 바울 사도가 이 일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고린도 성도들이 이 문제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고린도는 종교적인 매춘 행위가 성행하던 도시였는데요. 문제는 고린도인들이 섬기던 여신 비너스 신전에서 신성한 종교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성행위가 이루어지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죄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즉, 성도들이 여신 축제에 참가하여 성적으로 죄를 저질러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죠.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은 광야 이스라엘을 예로 들면서 간음죄와 우상숭배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아 그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어떤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시대는 불륜이 사랑의 이름으로 미화되는 시대입니다. 간음과 음행이 문학작품이 되고, 드라마나 영화가 되어 듣고 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인 양 설득하고, 나아가 ‘당신들도 한 번 해봐’라고 유혹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나는 그런 것에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라고 선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죠.

➌ 역사적인 경고의 세 번째는 9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는 말씀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험한 광야 생활과 한정된 음식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 에돔 사람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에돔 땅을 피해 가려고 빠르고 편한 길이 아닌 홍해바다 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길을 가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까? 우리를 이 험한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여기는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에 이젠 진저리가 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 뱀에 물려 죽어나가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께 대듦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뱀이 물러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주십시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구리로 불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높이 달아 놓았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그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서 죽지 않게 되었지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이 일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 교인들 역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그 限界를 벗어났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우상축제에 참여하면서, ‘이것이 죄라면 하나님이 가만 두실 리가 없는데, 참여해도 별 탈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죄가 아닌가 보다.’ ‘설사 죄가 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겠지.’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행동, 비성경적인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이 보시잖아, 하나님이 아시잖아, 그런데도 괜찮네 뭘?’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적이 없습니까? ‘인생길이 험하고 힘들기 때문에 …, 제대로 먹고 입고 집이라도 갖추어 살자면 …, 자녀들 공부라도 제대로 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부정이나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그런 행동이 선줄로 착각하는 행동이요, 곧 넘어질 행동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➍ 역사적인 경고의 네 번째는 10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고라, 다단, 아비람, 온’, 이 네 사람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그 도전은 우발적으로 한 두 번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반역에는 네 사람 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족장 250여 명이 함께 가담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6장 49절 말씀으로 볼 때 반역에 가담한 무리들은 생각보다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반역한 이유는 첫째, 모세와 아론 두 사람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운 지도자 혹 중보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자신들도 얼마든지 모세와 아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욕심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반역으로 네 사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민16:48). 

바울이 이 사건을 말하는 이유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한 이스라엘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의 사도 권을 부정하고 바울이 전한 말씀까지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 시대에 고라 일당처럼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도록 이 네 번째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모세 시대나 바울 시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시대가 그러 합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를 “脫權威의 時代”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즉 우리 시대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고 거역하는 시대라는 것이죠. 대통령에 대해 막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부모를 정신병자로 만들어 병원에 감금하지를 않나, 부모를 욕하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여 선생님에게 “누나 한 번 사귈래?”라고 희롱하고 그것을 인터넷에 버젓이 올리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넘어짐의 앞잡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2) 역사의 경고와 오늘의 경고의 이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 역사에 있었던 일들이 바울 시대에도 그래도 있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받아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고를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사건인데, 그것이 지금 나하고 지금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신앙생활을 안 해도 잘 사는 사람이 허다한데, 뭘 그렇게까지 사람 겁을 주냐?’라고 하면서 역사의 경고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죠. 그러나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들의 모습은 바로 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성도의 삶에는 현실적인 경고도 아주 많습니다. 신종 인플루엔자나 북한의 핵 등이 주는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경고 메시지가 있다’라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성도의 삶에는 개인적인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혹시 최근에 개인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적이 없습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자녀들이나 다른 가족들을 통하여 어떤 사인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혹시 건강의 문제로, 혹시 또 다른 그 무엇으로 주님의 경고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자신도 모르는 우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생각지도 못했던 더러운 것에 발을 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하면서 실제 생활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따로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한 경고만이 아니라, 현실 가운데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경고의 메시지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잘 듣고 ‘하나님께서 나를 일깨우기 위해, 나로 거기서 돌아서도록 신호를 주시는구나’라고 깨닫고 죄에서 돌이키며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 안에 이렇게 말씀과 역사와 현실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 즉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윤리적인 지진이 일어나고, 이웃의 가정들이 파괴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일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도무지 그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오늘 본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사와 현실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바로 그 모습이 선줄로 생각하나 실제로는 가장 넘어지기 쉬운 상태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3. 겸손하라, 유혹을 이기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寓話가 있습니다. 어느 연못에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그렇게 궁리하던 어느 날,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연못에 물을 마시려고 내려앉은 새에게 말했습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지 않을래? 나는 꼭 저 하늘을 날고 싶거든. 그래서 내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어. 이 나뭇가지의 한쪽 끝은 내가 물고 다른 쪽을 네가 입으로 문 다음에 네가 하늘로 날아오르면, 나도 날 수 있지 않겠니?” 

새는 개구리의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구리는 드디어 하늘을 날 수 있었지요. 그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다른 개구리들이 부러움으로 그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그런 기발한 생각을 했니?” 그러자 우쭐한 기분으로 하늘을 날던 개구리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누군 누구겠어? 내가 했지”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만 하늘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자랑의 말을 하려고 입에 물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는 순간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비록 寓話지만 교만, 즉 “선 줄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잘 설명해 주지 않습니까?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는 <아침 묵상> 가운데 “‘나는 아주 큰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거야. … 나는 아주 뜨거운 사랑을 갖고 있으며, 또 이렇게 똑바로 서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잘못된 길로 빠질 염려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잘 넘어지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란 유혹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항상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그때야말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때이라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함을 알고, 세상의 강함과 유혹의 치밀함과 원수 마귀의 간교함을 알아, 늘 겸손하게 엎드리고 그런 가운데 유혹을 이겨 그 어떤 문제에도 넘어지지 않으며, 항상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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