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실로암 (요 9:1~11)

  • 잡초 잡초
  • 383
  • 0

첨부 1


실로암 (요 9:1~11)

  
늘 같은 장소에 언제나 맹인 한 명이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작은 그릇을 든 채 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곳을 지나던 행인이 호주머니에 있던 25센트 짜리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어 그릇에 넣어 주었습니다. 25센트 짜리 동전을 던져 넣고 몇 발자국을 지나왔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더니 그 구걸하던 맹인이 검은 안경을 위로 치켜들고 컵에서 그 동전을 꺼내들고는 얼마 짜린가 하고 들여다보고 있더랍니다.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 와 가지고 "당신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인줄 아는데 어떻게 돈을 들여다보며 살피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맹인이 아닙니다." "아니, 맹인이 아니면서 왜 맹인인체 하고 구걸을 하고 있는 거요?" "예, 원래 여기에 서서 구걸하던 맹인이 제 친구인데요, 잠깐 없는 동안 제가 대신 서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당신의 맹인 친구는 어디 간 거요?" "저 앞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 구경하러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이  더듬거리면서 지나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가리키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조상들의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가 맹인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시려는 큰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불러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준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리고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그 눈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눈이 밝아져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셔서 밝히 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발라준 진흙을 맹인이 씻고 나음을 받은 그 연못 이름이 실로암입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고 맹인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왜 맹인을 실로암으로 보내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맹인을 만나 눈을 밝혀주신 사건을 통해 실로암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에 나타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자 처방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했습니다. 왜 하필 침과 진흙을 사용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진흙에 침을 뱉어 반죽을 하셔서 눈에 발라주시는 것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신 것은 흡사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소경에 눈에 바르시는 행위는 바로 예수가 창조주이심을 알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우리를 고치실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요한1: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누구이십니까? 요한1:14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다시 요한1:3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로 말미암아'하신 그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은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자동차  일류 정비사가 자기 차를 몰고 출근하다가 차가 고장이 나서 길가에 세워놓고 원인을 찾고 있었는데 쉽게 원인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추운 날씨에 고생하고 있는데 지나던 차가 옆에 서더니 한 신사가 내리면서 "도와 드릴까요?"하고 묻습니다. 정비사는 속으로 "일류 정비사인 내가 못 고치는 것을 당신이 누군인데--"하고 말하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이 신사는 몇 군데를 만져 보더니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동이 걸리는 거에요. "댁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묻는 그에게 신사는 명함 한 장을 간네었다고 합니다. 명함에는 "헨리 포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만든이었습니다. 

성경은 왜 예수가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가 창조주이심으로 피조물된 인생의 해답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신이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심을 믿을 뿐아니라 어둠속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예수가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2. 우리를 사람들에게 보내셔서 빛을 보게 하려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도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에 갇혀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맹인의 눈을 밝혀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눈은 빛을 보나 영적인 눈이 감겨 있어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빛을 비추시려고 지금까지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로 보내심을 받았으며 우리는 누구에게로 보냄 받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이며 우리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한 소경은 사실 인류를 대표하는 인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사람을 케이스로 등장시켜 인간의 영적 소경된 상태를 설명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을 산 헬렌 켈러 여사에게 누군가가 물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처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여 깨닫는 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가지고도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참 모습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도 보지 못하는 인생-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바로 영적 소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만나 그를 치유하신 후 예수께서는 요한9:39에서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매우 흥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9:40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우리도 맹인(소경)인가?" 41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더 흥미롭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이 맹인인줄 아는 맹인은 맹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맹인이면서 맹인인줄 모르는 인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본다고 하면서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천국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예수님과 인사하시겠습니까? 혹시 이렇게 인사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처음 뵙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주일마다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그분을 뵙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말씀을 막연히 듣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들으며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보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나중에 천국에서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뵙게 됩니다. 나는 오늘 이 순간도 여러분이 말씀을 성령으로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뵈옵는 영의 눈이 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한3:3).
  
오늘 교회밖에 뿐아니라 교회안에도 영적 소경이 많습니다. 영적 눈이 열리지 않아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보지 못합니다. 영적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비전도 보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의 참모습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오로지 육의 눈으로 현실만을 보면서 삽니다. 당장의 욕심을 충족하기에 급급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고 거듭나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아직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존귀한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도라는 말도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본문 4절에도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보냄 받은 자는 보내신 이의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제가 본 영화중에 가장 큰 감동을 준 영화는 '미션'입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이지만 그 감동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 영화는 소위 해피 엔딩이 아닌 비극으로 끝난 영화입니다.  롤랑 조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거대한 남미 이과수 폭포의 장관과 함께 막이 오릅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 중심에는 남미 과라니 족에게 선교하기 위해 찾아온 예수회 소속 두 사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의 사제와 한때 노예상인이었다가 회심한 로드리고라는 사제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되어가던 이 마을 원주민들이 스페인과 폴투갈의 정치적 흥정에 의해 다시 노예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자 쳐들어오는 군대의 무력 공격 앞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항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제 가브리엘은 무저항의 저항을, 로드리고는 무력 저항을 선택합니다. 결국 무저항을 선택했던 가브리엘도 총과 칼을 들었던 로드리고도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사건의 종말을 취재하던 교황청에서 파송된 주교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립니다.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 사람과 과라니 족 대부분의 멸종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 지었습니다만, 그러나 저들이 전한 복음의 미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을 받아드린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는 한..." 그리고 영화는 살아남은 과라니 족 아이들이 더 깊은 정글로 숨어드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실패한 것처럼 보여질지라도 실패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빛을 보게 된다면 사명은 감당한 것이고 우리를 어둠의 영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보내신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보내심에 누가 순종하여 가겠습니까? 여러분, 빛을 잃고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저들에게 나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