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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시련 (벧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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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련 (벧전 1:3~13)
 

우리가 이 세상을 사노라면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납니다. 특히,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믿는 일로 인한 시련이 있습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그 시련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시련은 이를 이겨내면 많은 유익을 얻게 되지만, 지면 큰 타격을 입고 심한 경우에는 인생의 패배자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시련은 무턱대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유익이 되기도 하고 손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이겨내는 신앙적인 방법에 관해서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시련은 우리의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시련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비 그리스도인과 다른 관점에서 시련을 이해하고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련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신앙생활과 관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시련은 우리의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시련의 목적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믿음으로 이겨냄으로써 영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르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통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주님 앞에 설 때 큰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4장에 보니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성도들에게 시련이 다가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련이 없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도들은 시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크든 적든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는 귀중한 역할을 합니다.

금은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귀한 금속으로 인정받습니다. 그것은 금의 희소성과 세월이 지나도 녹슬지 않고 색깔의 아름다움과 귀금속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금은 얻기가 어렵습니다. 금을 얻으려면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제련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1톤짜리 광석 중에 불과 2그람의 금이 섞여 있어도 그 광석을 금광석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 작은 분량의 금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분량의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녹입니다. 이렇게 금은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귀금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금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닳아 없어지지만, 믿음은 결코 없어지는 법이 없고 영원불변합니다. 또 금의 가치는 현세적이지만, 믿음의 가치는 금세와 내세를 통하여 영원합니다. 믿음의 가치가 얼마나 큰가하면,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에 불과할지라도 그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선행을 하고 수양을 하고 고행을 감수할지라도 그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주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한 마디 부탁한 것밖에 없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천국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강도는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현재의 신앙 수준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하고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시련을 통하여 아직 남아있는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순수하고 큰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받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시편 119편을 지은 성도는 고백하기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간증입니까? 

성경을 보면, 신앙의 위인들 가운데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머나먼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나 되었습니다. 인생의 황혼녘에 그 같은 모험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시련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때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어 하는 수 없이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 사라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일로 인해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라고 후회하지 않았으며, 그를 불러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라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시니 바로가 두려워하여 사라를 돌려보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같은 시련을 하나씩 겪을 때마다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일생일대의 큰 시련에 직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보통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백세에 낳은 독자입니다. 그의 대를 이을 아들일 뿐 아니라, 이 아들은 또 약속의 아들입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면 누가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것이며, 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1절에 보니, 그렇게 하신 이유가 나와 있는데,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 같은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시련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려고 그 같은 시련을 가하셨다는 것입니다. 자,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시련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무려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이르러 두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가지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묻기를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니,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자 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그 위에 올려놓고 칼을 빼어 들고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사자가 말씀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에 그 수양을 가져다가 이삭 대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다음과 같이 복스러운 언약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처럼 아브라함은 절대 순종의 믿음으로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 선민의 조상이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시련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이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강도 높은 훈련을 이겨내는 것처럼, 성도들도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여 주님의 상급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믿음의 시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은 그 자체로서는 유쾌한 일이 못되고 우리를 근심되게 만들지만 시련을 이겨낼 때 얻게 될 복된 결과를 바라보면서 능히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라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기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에 앞서 은혜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시키십니다. 이를 위해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열일곱 살의 나이에 형들에 의해서 은 20에 팔려 머나먼 애굽으로 끌려가서 남의 집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주인의 인정을 받아 좀 편한가했더니 주인 마님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습니다. 종살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의 나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구합니까? 그런 상태로 무슨 수로 내일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요셉이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 같은 시련을 당하게 된 것일까요? 그러나 두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연단시켜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주신 시련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기나긴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여 합당한 그릇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셔서 7년 기근으로부터 천하 만민을 살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 야곱의 가족을 구하는 큰일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당한 시련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나 깨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얼마나 큰 환난을 당했던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이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지혜와 학식과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기 위해 그 같은 고난을 당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아무 성과도 거둘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분도 시련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면 부족한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이겨냄으로써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하고 더 큰 은혜를 경험하는 복스러운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련을 이기는 방법에 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련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당시에 사람들은 길게 늘어진 겉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길을 가거나 일을 할 때는 허리를 띠로 동여맸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에게 장자가 죽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재앙이 내리던 날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바르고 집안에 머물면서 그 밤에 양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평소처럼 편안한 복장으로 있지 말고,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언제라도 애굽을 떠날 채비를 갖추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허리를 동이는 것은 무슨 일을 대비해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련을 만났습니까? 느슨해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기어코 믿음으로 시련을 이기고 말리라는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 이하에 이르기를 “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후퇴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감당하지 못할 큰 시련 앞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감사하게도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시련이 다가올 때 겁내지 마시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한 번 믿음으로 이겨내자!”고 담대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 섬기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본주의의 삶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이 요구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신본주의입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반드시 위대한 승리를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둘째로, 시련을 이기려면 근신해야 합니다. 

시련의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의 자세는 근신하는 것입니다. 근신이란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경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군인이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펴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시련을 견뎌내려면 지레 밭을 지날 때처럼 정신을 차리고 신중하게 살피고 언행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신이란 말 속에는 절제하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 술 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을 갖는 것이 절제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질수록 상황이 악화될수록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더욱 근신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고, 5장 8절 이하에 보니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근신하는 성도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합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때에 근신하는 성도는 놀랍게도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련의 밤을 기도로 지새우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누는 기회로 선용합니다. 시편 84편 6절에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라고 하신 것처럼, 근신하는 성도는 시련의 시기를 축복과 은혜의 시기로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신할 때 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넣어주어서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신 대로,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셋째로, 시련을 이기려면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는 주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고난 받은 모든 것에 대하여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항상 대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에 나가 혼신의 힘을 다 쏟는 것은 그들이 금메달을 희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메달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결코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승에 대한 희망을 가진 선수들만이 최선을 다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도들을 선수에 비유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주님의 강림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부활의 몸으로 주님을 맞이하여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의 희망이 주의 강림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귀하게 쓰임 받고자 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과 은혜의 풍성하심을 나타내면서 살겠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 가정 복음화를 이루지 못한 성도님들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가정을 이루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들을 가질 때 시련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소망은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같은 병자라도 소망을 가진 사람은 회복이 빠르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은 더디다고 합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시련의 시기에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이겨내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감사한 것은 성도들은 어떤 어려운 형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일에 대한 찬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가진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예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언제라도 시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욥은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모진 시련이 다가온 이유를 알지는 못했으나 그 시련의 결국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욥과 같이 우리도 삶 가운데 다가오는 역경과 어려움의 원인을 일일이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목적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같이 단련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단을 통해서 모난 성격이 깎여서 원만하게 되고, 조급한 성격이 인내할 줄 아는 성격으로 바뀌고, 교만한 마음이 겸손하게 바뀝니다. 자기 자랑이 사라지고 다른 형제를 높일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시련을 이긴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아무쪼록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냄으로 앞에서 언급한 모든 복스럽고 은혜로운 결과를 다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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