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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결한 삶의 모델 (딤전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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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한 삶의 모델 (딤전 4:6~7)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정진경 원로목사님은 성결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본을 보였고 참 깨끗한 삶을 사셨고 원칙 있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성결의 삶이 목적이고 성결한 삶을 추구하는 삶이 목적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성숙한 삶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성결한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딤전 4장6-7절에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성결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오늘 이 시대에는 성결은 비 인기 단어입니다. 비인기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경건한 성결한 삶 보다는 재미를 추구하고 이익을 추구하고 화려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성결 추구자는 세상에서 뒤떨어진 사람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성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성공한 인생입니다. 진정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재미와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은 성결한 삶입니다. 성결한 삶을 말하려면 다음의 몇 가지를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성결 - 연단의 열매 

성결은 그냥 어느 날 기도 많이 한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결의 삶은 연단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결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성결한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는 담대하라”(요16:33)고 하셨습니다. 성

결은 그냥 어느 날 주어지는 것 아닙니다. 성결이 주어지지까지는 연단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 금식은 단식입니다. 물조차도 마시지 않는 철두철미 단식입니다. 그 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서 무서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험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15절을 보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시고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은 연단과 훈련의 산물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연단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그 말은 훈련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인격과 신앙과 경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훈련 후에 비로소 성결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원로목사님은 부드러움이 있었고 따뜻함이 있었던 분입니다. 그 요소들이 성결의 요소들입니다. 그 요소들은 그냥 어느 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분도 일생 연단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북한에서 피난의 길을 떠났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경험하였고 옥에도 갔습니다. 단돈 몇 푼 들고 공부하러 가족들을 놔두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모두 훈련입니다. 그런 훈련이 없이 어떻게 큰 인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인물들을 보면 다 그런 고난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큰 인물들은 육신의 질병으로 연단을 추가하여 받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큰 인물들이 되고 성결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엄청난 훈련 코스를 다 마치고 비로소 다윗이 됩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다윗보다 더 어려운 훈련 코스를 이수하고 마침내 성결인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니까 곧 복을 주실 줄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5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 사후 500년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 나갔을 때 그때 숫자가 어른만 60만 명이었고 거기에 우양들을 이끌고 종들까지 이끌고 광야로 나아갔으니 그 모습이 마치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사후 500년 후에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또 요셉을 보십시오. 그도 엄청난 고된 훈련을 받고 마침내 애굽의 재상이 됩니다. 

원로목사님도 그런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 성결한 지도자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성결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경건을 위하여 연단을 받으라”고 강권합니다. 성결한 삶은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된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성결 - 하나님 성품 닮아가는 것 

연단을 받게 되면 무엇이나 빛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도자기에는 무광 도자기가 있고 광택 나는 도자기가 있습니다. 무광 도자기는 불가마니 속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광택 나는 도자기는 불가마니 속에 들어가서 수천도의 열에 연단을 받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광택이 나는 것입니다. 연단이나 훈련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서 나의 미성숙한 모습과 거친 나의 성격이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미성숙한 자세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성숙해지고 광택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격과 행동과 처세와 말과 삶이 아주 어설프거나 모난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열매가 미성숙하면 풋 냄새가 나고 비린내가 나고 떫은 냄새가 나듯이 사람도 덜 익으면 그 모습에서 모난 행동이 나오고 말을 함부로 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 한마디로 상처를 입은 것을 모릅니다. 덜 익어서 그렇습니다. 아주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푹 익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너는 말씀과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라,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6-7)고.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 안에서 끊임없이 연단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곧 성결의 생활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푹 익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원로목사님은 그 많은 연단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따뜻함이고 부드러움이고 사랑이고 관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으나 용서에 대해서 더 많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따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무서운 책망의 하나님이지만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 보다 더 따뜻한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따뜻함에 공의와 법과 심판이 다 묻혀버린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닮는 생활이 성결한 삶입니다. 원로 목사님이 그렇게 따뜻한 마음과 너그러움과 풍성함과 온화함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것이 성결한 모습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가 이 성결한 삶입니다. 


연단만 받으면 누구나 되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차원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곁에서 40일 동안 두 번씩이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었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면 성결이 완성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며 타락한 모습을 볼 때 모세는 순간적인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돌비를 내 던져 박살을 내 놓았습니다. 아무리 흥분해도 그렇지 그 돌이 무슨 돌인데 그것을 던져 박살을 내 놓습니까. 베드로도 도마도 유다도 주님과 함께 3년 동안이나 동행하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3층천을 다녀온 사람입니다. 그곳은 낙원입니다. 천국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았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완성된 성결인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의 모난 성격을 절제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충돌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고민도 갈등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기본의 마음 바탕입니다. 인격의 바탕입니다. 온화한 심적 바탕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사람입니다. 그는 인격과 마음 바탕이 아주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에베소에 갔다가 바울의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을 하게 되고 그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 후 빌레몬이 성자가 되었고 바울은 목회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그를 찾아가 그의 얼굴만 보아도 위로가 되었다고 빌레몬서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인격에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주어지는 변화입니다. 원로목사님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빌레몬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기본의 인격과 마음의 바탕이 있었습니다.     

성결 삶의 열매   

성결한 삶의 열매는 마음의 성결로 나타납니다. 성결은 마음에 따뜻함을 품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의 영이십니다. 그 거룩한 영이 내 안에 거주하시면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마음의 바탕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이 만들어지고 그 삶이 성령과의 교제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결이 유지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결한 삶은 먼저 내 마음에 따뜻함과 온화함과 풍성함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결의 열매는 이렇게 마음에 맺힙니다. 

그런데 이 열매가 없으면 평화가 깨지고 불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불화가 자리를 잡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기감정에 스스로가 휘말리게 되고 아주 무서운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여자 테니스 스타인 알프스 소녀라고 부르는 스위스의 마르틴 힝기스라는 선수는 테니스 신동이라 일컬어졌던 소녀이고 테니스 챔피언입니다. 1999년 윔블던 대회에서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선수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어느 날 16세의 무명 선수에게 55분 만에 2:0으로 완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경기가 윔블던 대회 사상 최악의 이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테니스 챔피언이 무명선수에게 왜 어이없이 참패를 당했는가 하면 전날 어머니와 크게 다투고 마음이 불화한 상태에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또 그의 어머니가 경기 도중 자리에서 퇴장하였는데 그 모습을 목격한 이 챔피언이 순간적으로 감정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려서 정상적으로 경기를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챔피언은 결국 무명선수에게 무참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이 선수는 엄밀히 말하자면 무명선수에게 패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기분에 패배한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성결은 그래서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결은 마음에 열매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열매는 원만한 관계의 열매입니다. 이 성결한 삶은 삶에서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친구가 됩니다.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조화력을 발휘하고 평화를 이룹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9)고 말씀했습니다. 

화평은 아무나 이루지 못합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성결의 열매입니다. 오늘은 불화를 야기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이루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결은 화평케 하는 은사를 발휘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 마다 화평을 조성하고 이루고 조화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 열매는 성결한 언어의 열매입니다. 신앙적으로 성결하고 성숙해지면 아주 뚜렷하게 변화가 생기는데 그것이 말의 변화이고 언어의 성결입니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얼굴을 보거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말이 거칠어집니다. 마음에 불만이 있으면 말에 뼈가 생기고 감정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말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말은 참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말을 함부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조금만 정화해서 하면 좋을 말을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불화하게 만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당사자 자신은 말을 함부로 하는 줄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상대방만 받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고 성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성결이나 언어의 성결은 모두 성결의 열매입니다.      

 성결은 인내와 자기절제의 산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내 눈에 거스른 것을 다 말하다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하고 자기를 절제하고 때로는 자기를 부정하기도 해야 남의 부족한 부분을 덮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변화는 성결의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너는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라, 그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냥 되어지는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산속의 하찮은 들풀도 꽃을 피우는데 그 들풀이 꽃을 피우기까지 상당한 훈련이 있었습니다. 겨울에 추위를 이겨내는 훈련이 있었고 봄에 녹아내리는 땅을 헤집고 새싹을 내는 아픔의 과정도 있었고 여름에는 모진 더위 속에서 인내하고 연단해서 마침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런 연단 없이 이 세상에는 한 가지도 열매를 맺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인데 그 성결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원로목사님은 성결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말의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말에 칭찬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성결했다는 말입니다. 성결한 삶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의 삶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최종 목표는 성결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성결한 삶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결한 삶을 흉내 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삶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덕목이고 우리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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