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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1) : 어미가 참척(慘慽)에 울 때 (눅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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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치 않은 자녀를 위하여(1) : 어미가 참척(慘慽)에 울 때 (눅 7:11~15)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I. 본문의 배경 

예수님이 나인이라고 하는 성에 가시기 전에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던 기사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이제 병든자를 고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인이라고 하는 성은 아주 자그만 성이었습니다. 여기에 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셨고 많은 무리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 따르는 사람들과 전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던 무리였습니다. 그때에 저쪽 성에서 일련의 행렬이 예수님께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관을 매고 있는 사람들 뒤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어미가 따라오고, 함께 슬퍼하며 조문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두 행렬이 마주치는 것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한 행렬에는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앞서고 영혼을 살리는 전도자들이 뒤따르고 그리고 저쪽 행렬에는 죽은자가 앞서고 죽음을 슬퍼하는 어미와 가족 친지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행렬과 죽음의 행렬이 만난 것입니다. 


II. 참척을 당한 어미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참척을 당한 어미를 만나게 됩니다. 참척(慘慽)이란 말에서 참(慘)은 참혹하다는 뜻이고, 척(慽)은 근심하다는 뜻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경우를 참척이라고 부릅니다. 상(喪)과 관련해서는 젊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악상(惡喪)이라고 하고, 나이가 충분히 많으신 부모님이 숨을 거두시면 호상好喪)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래서 살만큼 살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때 자손들은 그것을 호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죽는 것 자체가 불효라고 보고 부모가 그 상에 참여하지 않는다 해도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어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유일한 혈육이 죽은 것입니다. 그 슬픔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영혼의 참척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커다란 중생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아이의 영혼은 참척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 세상 신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진리의 빛을 가리고 있으므로 그 아이의 영혼은 영원한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지금 어떠한 상태입니까? 
청교도 목사인 리차드 백스터는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하여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III. 어미를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께서는 참척을 당한 이 어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나 제자들로부터 여자의 죽은 아들이 청년이었고, 외아들이었으며, 어미는 과부라는 사실을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오늘 성경은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시는 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무엇을 보여 주시고 싶으셨을까요? 그저 이 여인은 슬피 운 것 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믿음이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참척을 당한 여인의 아들을 주권적으로 살려주심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커다란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 달린 것이 아니며 주님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주권적으로 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울지 말거라. 죽은 네 아들보다 우는 네가 더 불쌍하구나.’ 이렇게 주님이 그만 울라고 말하리만치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 울고 있습니까? 


IV. 살리시는 주님 

우리는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갈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너희 가족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면 “주님 여기에 모두 다 모였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믿음의 싸움을 마친 후에 주님 앞으로 올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구원받은 자녀들에 대해 물어보십시오. 부모가 피눈물을 흘리든지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애통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육신으로 자식을 낳을 뿐 아니라 영으로 다시 한 번 자식을 낳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르쳐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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