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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 (딤전 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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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 (딤전 4:6~11)


심리학자[매슬로우(A. H. Maslow)]는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5단계로 나눕니다. 먼저는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을<생리적 욕구>라고 하였고, 어떤 위협적인 요소를 피하고 그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하는<안전의 욕구>를 두 번째 단계로 보았고, 어떠한 특정 집단, 가족 등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애정 등 사회적인 교류를 하려는 욕구를<소속감과 사랑의 욕구>라 하여 세 번째 단계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는<존경의 욕구>라 하여 명예욕 등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인격적 성장과 잠재력의 실현들을 통하여 최고의 인간 존재가 되고 싶다는<자기실현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갖 욕구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루라도 욕구 없는 날을 사는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욕구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가장 보편적인 심리가 뭐냐 하면<평등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무엇입니까? 남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 합니다. 남이 되는 것이면 나도 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남보다 낫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뿌리가 되어서 마지막에는 낫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남과 같아지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적어도 저 사람만큼은 되어야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하여 자신을 생각하는 것을 상대적 성공 또는 상대적 빈곤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남과 같지 못할 때 아주 괴로운 것이거든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잘되지 못해서 괴로운 것입니까? 그가 잘 되어서 더 괴로운 것입니까? 잘 생각해 보면 후자의 경우가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 하나합시다. 사촌이 땅을 사면 왜 내배가 아픈 것일까요? 이것은 사촌과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촌과 땅 주인과의 일입니다. 그런데 왜 내배가 아픕니까? 질투입니다. 질투의 동기란 대체로 내가 못 되어서 보다 그가 잘 되어서 시기하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지요.
  
잘사는 친구의 집을 방문하고 오면 우리 집이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좁은지, 이게 사람 사는 건가하고 아주 불평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 집 마련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처참할 수가 없어요. 욕구란 이렇게 현재의 자신을 보잘 것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세요, 같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충족시켜서 평등해졌다고 합시다. 이게 끝일까요?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바로 그 시간 마음이 바뀝니다. 이제는 남과 달라지려는 마음,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같은 것으로는 만족하질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남자들이 강할까요? 여자들이 더 강할까요? 백화점에 걸려있는 예쁜 옷을 보고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서 그 옷을 샀다고 합시다. 

그런데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갑니다. 남자들은 어떻게 합니까?“반갑습니다. 나랑 똑 같은 옷을 입었네요.”뭐 그리 반가워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도 일을 만듭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어떻습니까?“어머, 저 여자 뭐야! 어휴, 기분 나빠!”그 후로 그 옷은 안 입는답니다. 이게 여자의 마음이라면서요? 남자들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마는 어쨌든 더 특별하게, 아주 개성 지향적인 그런 만족을 추구해 나가는 것인데 사실은 이건 끝도 없는 인간의 욕구입니다.

여러분! 무엇과 평등하고자 살아가십니까? 즉 무엇과 같아지기 위한 삶을 사시느냐는 겁니다. 그 평등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념입니까? 아니면 계급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다 좋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살아나가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이렇게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문제는 영적인 문제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욕구가 무엇이냐 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신앙적으로 추구해야 할 욕구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입니다. 오늘날“사람은 많은데 일꾼은 없다.”는 한탄이 많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공공연한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날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주일 하루만 북적거리고 그 이외의 날은 썰렁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Sunday Christian이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수요기도회는 겨우 주일 낮의 3분의 1정도 참석합니다. 새벽기도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주중에 교회 행사라고 하는 것은 아예 엄두도 못내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바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일을 해야 먹고 살지요. 하지만 좋은 일꾼은 시간의 안배와 우선순위를 잘 정하는 사람입니다.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큰 농장에서 일꾼을 모집하였습니다. 일꾼들이 하루 품팔이를 위하여 여기저기서 모여들었습니다. 주인은 할 일과 주의사항을 전달한 후에 하루 종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은 오전 내내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잡담하고 놀다가 점심을 실컷 먹었습니다. 그리고 늘어지게 잤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일꾼들은 일당을 받기 위하여 주인 앞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당은 주지 않고 엉뚱하게 청구서를 한 장씩 주면서 돈을 내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점심값 삼천 원, 농장 구경 값 이천 원 연장사용료 이천 원 합계 칠천 원”일꾼으로서 최소한의 마땅한 봉사와 희생은 없고 놀고먹으면서 어떻게 대가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날 교회 안에도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신앙인다운 지도자가 많을 때 교회는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교회 안의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지도자여야 합니다. [바울]의“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은 나는 그 사람을 지도자로 여긴다는 마음입니다.“지도자”의 의미는 계급이 아닙니다. 신앙의 좋은 본은 서로에게 유익을 준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에 대한 올바른 자세입니다. 

좋은 신앙인을 만날 때 그리고 서로 신뢰할 수 있을 때 여기서 진정한 평안이 있고 비록 대접을 못 받아도 괜찮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등하지 못해도 만족합니다. 이것을“사명의식”이라고 하기도하고“가치관”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앙적 인격관계 속에서 만나서 나의 삶의 존재를 찾고 보람을 찾게 될 때 이제 저 사람과 함께 일하므로 내 생을 다 바쳐도 좋다 하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여기서 능력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피차간에 이런 교감이 생길 때 우리는 모두가<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기본적으로 이런 선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마는 오늘 특별히 교회라는 조직 안에서 좀 더 효과적인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안수집사, 권사라는 직분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누가 선출이 되든지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어야 할 것이며, 또한 선출이 되지 않은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계급이 아닙니다. 봉사의 위치입니다. 더 기도하고, 더 말씀대로 살고, 더 존경받을 만한 신앙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선출 되어야 하겠고, 선출하여야 할 것입니다. 

흔히 세상적지도자의 위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학벌, 재산, 외모, 지위, 배경 이런 것이 지도자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이것이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신앙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들, 즉 성숙한 인격, 그의 인내성, 그의 사랑, 그의 비전, 그의 동정, 그의 결단력, 가장 핵심적인 것이 그의 신뢰성입니다. 믿어주는 것입니다. 서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 몰라도 좋아요. 그러나 믿을 수 있습니다. 존경과 믿음, 그런 인격적 관계가 지도력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공동의회를 통하여 선출 되는 일꾼들을 우리는 믿어주어야 합니다. 서로 신뢰할 때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 될 것과 그렇게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5절에“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합니다. 이런 자라야 일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젼]목사님은 유명한 설교자로 교회를 많이 부흥시킨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답니다.“어떻게 그런 영력 있는 설교를 하시며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교회 지하실로 안내해서 그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두 권사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이 할머니들께서 교회와 나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분들은 교회를 위하는 깨끗한 소원 이외에는 아무런 소원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드리는 이 기도 때문에 교회가 건재합니다.”라고 설명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영국 왕이 시민들의 공의심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려고 밤에 길 가운데에 큰 돌을 놓아두었습니다. 날이 밝자 거리에는 관리, 학생, 회사원 등 많은 사람이 지나갔으나 누구 한 사람 그 돌을 치우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돌을 갖다놓은 사람을 욕했습니다. 한참 지난 후 어린 학생이 지나가다가 그 돌을 보고는 “이 돌이 왜 여기 있을까? 사람 다니기 불편할 텐데.”하며 돌을 길옆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돌 밑에는<이 돌을 치운 자의 삯>이라고 쓴 돈주머니가 있었다는 얘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오늘 여러분 모두는<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을 여러분의 기도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교회는 선택되는 분이나 선택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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