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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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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13~26)

     
몇 주 전에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주님과 나눈 참 예배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로 합니다.    예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여인은 즉시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이고 이런 물을 나에게 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주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고 여인이 나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 하십니다.     

처음 만난 유대인 남자에게 개인 정보가 드러나자 여인은 화들짝 놀랍니다. 누군가에게 사생활의 비밀이 들추어지면 상대방을 경계하고 더 멀리 달아나던가 그 사람에게 항복하고 진실을 털어놓던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이십니다’ 하고 존경을 표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낯선 유대인 남자였고 더운 날 물길러 나온 사람을 귀찮게 하는 나그네에 불과했는데 이제 그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주는 주와 선지자로 그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께서는 그날 이 여인을 만나려고 수가 성의 우물가를 방문하셨습니다.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남편을 다섯번이나 바꾸며 살아야만 했던 이 여인의 험난한 인생을 아시는 주님은 그를 긍휼히 여겨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하시려고 이 마을을 들리셨음이 분명합니다.    남들은 피하여 멀리 돌아가는 사마리아 마을이지만 예수께서는 한 영혼을 구하시려고 일부러 찾아들어가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리신 셈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대화를 하면서 그가 마음을 열고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 앞에 갈증난 심령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셨으며 이 여인은 드디어 주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내어드렸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보통 유대인이 아니라 선지자이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선지자께서는 잘 아실 줄 압니다.’   여인의 질문은 이제 종교적인 대화로 발전을 합니다.    ‘남 보기에는 내가 행실이 부정한 여자처럼 보이겠지만 나에게도 하나님을 예배하던 조상들이 있고 나 역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하는 자기방어 본능에서 나온 말은 아닐까요?  어찌되었든 이 여인에게 영적인 목마름이 있어 보입니다.    다만 확실한 믿음 없이 조상들의 유전을 따라 습관적으로 예배드려 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여인 앞에서 엄청난 비밀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말하는 이 산에서도 말고 유대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다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 남쪽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할 수 없게 된  북쪽의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에 제단을 세우고 예배를 드렸으며, 나중에는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조상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고 모세와 백성들이 그 산에서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였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신27:12). 그리심산 가까이 있는 수가 성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으니 그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남쪽의  유대인들은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만 참 예배의 장소로 인정하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어떤 장소에 매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왔으니 곧 이때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이후 조상적부터 전해 내려오던 예배자들의 전통을 새롭게 바꾸는 혁명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한 장소를 지정하시고 거기서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라 약속하셨으니 그 곳이 곧 거룩하게 구별된 성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후로 성전제사는 완료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날마다 반복하여 짐승의 피를 드리는 희생 제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은 그 어디든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습니다.그리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우리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고전3:16).  주님께서는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그 성전의 주인인 메시야가 이 땅에 임하여 사람들과 함께 계신 지금이 곧 그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 여인이 충분히 이해하였습니까?    아직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험있는 선지자에게 난생 처음 들은 이 말씀을 거절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이 좋겠다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분이 오실 것을 내가 아는데 그가 오시면 무엇이 참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고 정중한 태도로 토론을 마치려 합니다.    모든 것은 그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실 일이라는 솔직한 대답이며 메시야에 대한 확실한 믿음고백이기도 합니다.    

대화가 여기까지 왔을 때 예수께서는 드디어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곧 그 메시야다’ 우물가에서 범상치 않은 유대인을 만나 우물 물로 시작한 대화는 영생하는 샘물에 관한 이야기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소상히 알고 있는 선지자 앞에서 두렵고 낮아진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그 메시야라는 말에 여인의 눈이 환하게 열렸습니다.   어둡고 수치스러웠던 과거와 답답한 현재, 막막한 미래에 대한 의문들이 시원하게 열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사모했던 그분이 내 앞에 계시고 나에게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고 이제야 살길을 찾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드디어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영생하는 샘물을 얻는 순간입니다. 그리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지난 주일 장동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도 하나님 존전에서 이런 감격을 맛보는 예배자가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참 생수를 발견한 사람에게 물동이는 내 인생의 첫째가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갈증을 해결해주는 물동이는 잠시 우물가에 떨어뜨리고 우선 영원한 생수를 자랑하고 싶어 마을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물동이는 두번째 세번째로 밀려나게 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발견한 이 여인이야말로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참 예배자가 되어 마을로 달려들어갔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말씀하십니다. 신령은 무슨 말이고 진정은 또 무엇인가요?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육신을 가지고 모양을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라 영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매인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있으면 예루살렘에는 안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인의 하나님만 아니라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모든 민족의 예배를 받으시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드려지며 예배하는 사람들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부르는 여인에게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을 뛰어넘는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순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가로막힌 지리적인 장벽을 넘어서고 있으며 혈통의 장벽까지 뛰어넘고 있습니다.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모든 예배자들을 아시고 살피고 주관하시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숨겨진 과거가  메시야 앞에서 속속들이 드러나고 그분 앞에서 감추임이 없는 것처럼 아버지 앞에 선 우리 예배자들의 모든 것이 감추임 없이 드러납니다.   
     
신령한 예배라고 하여 으시시하거나 환상적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강단 밑에서 색색갈의 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하는 무대 장치를 신령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찡찡거리고 쿵쿵 울리는 헤비메탈을 동원하여 분위기를 띠우고 사람들의 감정을 들뜨게 하는 음악이나 현란한 조명과 영상물을 의지하는 인위적인 분위기 연출을 가리켜 신령한 예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 세상의 분주함과 속된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주는 예배당도 있습니다. 저절로 기도하고 싶고 고요히 묵상하고픈 마음을 일으키는 구별된 장소로서의 예배실은 예배를 위한 참 좋은 장소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 가보면 화려한 외부 치장에 예배당 내부 역시 웅장하여 일단 심리적으로 주눅이 들고 종교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꾸며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손으로 꾸며놓은 화려한 건물이나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밴드를 갖춘 예배당에 붙들려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다스리심에 겸손히 순종하는 영혼들이 주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그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거기에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진심으로 또는 지극정성으로 예배드리는 자세는 참으로 귀합니다.   예배자가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이 옳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나의 열심만 가지고 힘써 드림보다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땅에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따라 사마리아 그리심산에서 양과 소를 잡아 열심히 제사를 드리면 다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사람들의 기획이나 인간이 고안한 방식으로 멋있게 예배 드림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따라 진리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지 예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도,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도, 기도를 하는 사람도 주인공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오늘날 스타 설교자들과 스타 찬양 가수들 그리고 스타 간증인들이 기독교계 TV 방송 화면을 가득 채우고 예배당 중심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설교자의 모습이 화면에 잘 나오려고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하고 물론 화장도 해야하며 거기다 시청자들이 더 감동받도록 음향 편집에 화면 편집까지 가미하여 군더더기 없이 잘 꾸며진 한편의 예배를 연출합니다. 유선 방송사들이나 인터넷 방송사들은 유명한 설교자를 서로 먼저 모시려고 로비 활동을 벌입니다. 어떤 교회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TV 방송을 자주 타야 얼굴이 알려져 유명해지고 그래야 우리 교회가 알려진다고 생각하여 전도와 선교라는 이름으로 방송사에 값비싼 출연료를 헌금합니다. 덕분에 스타 설교자, 스타 간증인들이 등장합니다.    

작은 해외 한인교회의 무능한 목사가 속좁게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질투하여 큰 교회의 방송 선교와 전도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스타 설교자의 말씀을 듣겠다는 잘못된 자세에 대한 경각심입니다.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람에게 관심이 모아지고 순서를 맡은 사람들만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정해진 순서를 따라 단 일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정각에 예배를 시작하며 끝마치고 또 다른 예배를 위해 회중들이 물 밀듯이 밀려나가고 들어오는 놀라운 현상이 매주일 초대형 교회들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하는 감동적인 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위험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일사분란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예배자들과 군더더기 없는 매끄러운 진행만이 좋은 예배가 아닙니다.     거기에 진리되신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계시느냐 사람들만 모였다가 흩어지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지만 지난 주일에 전기 밥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예배 후 점심식사가 좀 늦어졌습니다.    여전도회 임원들이 교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였고,  감사하게도 조 집사님댁에서 결혼식 잔치 떡을 가져다 주셔서 우선 급한 시장기는 달래고 느긋하게 기다리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큰 불편은 아니었습니다.  그간 밥솥 하나가 속을 썩여 주일 아침 일찍 남보다 먼저 와서 쌀을 씻어 솥에 안치는 청년들이나 여전도회 임원들이 예배 도중에 밥이 잘 되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고 아니면 예배가 다 마치기 전에 주방으로 가야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늘 수고하는 분들 덕분에 우리가 매주일 맛난 비빔밥도 먹고 가끔은 구수한 누룽지도 먹습니다.    몇 주 전에 여전도회 회장이 속썩이는 솥을 포기하고 새 밥솥을 하나 구입하자고 제안하여 그럴려고 했지만 요령껏 사용하면 아직은 더 쓸 수 있으니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하여 미루던 중에 지난 주일 말썽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흐뭇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이 밥솥 하나를 교회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밥솥을 기증하려는 동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제 마음이 더 기쁘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제 시간에 밥을 못먹을까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고장난 솥때문에 주일마다 수고하는 분들이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편안하게 예배하는 시간에 그분들은 마음 졸이며 예배드리고 정신이 밥솥에 가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하나님께 죄송스럽고 수고하는 분들에게 미안했던 겁니다.    

혹시 예배를 잘 드리고 나왔다가 밥이 늦게 되어 잠간이라도 마음에 불평이 생겼던 분들이 있었다면 그분이 가진 마음을 함께 가져봅시다.  저 역시 그런 점을 세밀하게 관심 가져주지 못한 목사로서 부끄럽고 하나님께 죄송스러웠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예배를 가장 잘 드린 분이 누굴까 생각해보니 함께 예배드리는 형제자매의 사정을 살필 줄 알고 다같이 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기를 소원하는 그분이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을 가진 예배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나 혼자 누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보다 함께 나눔에서 더 큰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참 예배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예배의 은혜입니다.   

이 일을 통해 예배자의 마음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나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물질과 삶을 모두 드러내놓고 드리는 헌신입니다. 주일 아침 한 번 드리는 예배를 위하여 일 주일 내내 기도하고 준비하며 기다렸다가 한 자리에 모여 한 마음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물질을 드리고 말씀을 듣고 사랑으로 교제하는 이 모든 과정이 모두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보에 예고된 순서를 따라 몸으로 드리는 예배도 예배이며 보이지 않는 마음의 나눔도 예배입니다.    

주보에 순서와 담당자를 예고하고 정해진 순서를 따르는 것은 예배의 질서를 위함입니다.     두서없이 우왕좌왕하며 허둥대는 예배는 하나님도 원치않으시고 회중들 역시 불편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고정된 순서와 정해진 시간을 뛰어넘어 즉흥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럴때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반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계획과 준비가 없이 언제나 즉석에서 생각나는대로 예배를 드리자는 말은 아닙니다. 목사도 준비하고 교인들도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순간에 민첩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대표기도하는 분이 담당 주일을 위하여 한 달 전부터 혹은 한 주 전부터 기도를 준비합니다.    강단에 서서 대표로 기도하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기도의 경험이 많은 분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은혜롭게 기도를 하지만 어떤 분들은 만일을 위하여 기도문을 적어와 낭독합니다.    집에서 작성한 기도문은 아무래도 현장감과 간절함이 약해보이고 웅변식의 낭독이 되어 어색한 점이 있기도 합니다.   기도문이 없이 즉석에서 드리는 기도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구할 것을 말씀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간절함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반면에, 원고 기도는 준비된 원고에 있는 내용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기도하다가 기도의 줄거리도 목표도 없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보다는 원고 기도가 훨씬 은혜로운 기도입니다. 집에서 기도문을 기록하면서 이미 교회와 회중들의 형편을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준비된 원고로 기도하는 것은 전체 교우들을 대표하여 기도하는데 결코 부족한 기도가 아니며 오히려 책임있는 자세로 봅니다. 물론 원고를 의지하지 않고 집에서 준비한 기도의 내용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도하는 정도가 되면 좋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잘 한다하는 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람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있고 언급하는 내용이 늘 비슷합니다.    저도 제가 기도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와 말투가 무엇인지 의식하며 기도하곤 합니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 어떤 장로님이 강단에 서면 대표기도 시간이 보통 10분, 15분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세세무궁토록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시작되는 그분 특유의 기도는 그 교회 모든 분들이 다 외울 정도로 익숙해졌습니다.    한 가지 기도 내용이 끝나면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을 하실지 레퍼토리를 다 꿰고 앉아 있는 중고등부 아이들은 기도시간에 까까머리를 마룻바닥에 처박고 엉덩이를 높이 빼고서는 그 장로님 기도를 따라 흉내를 낼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분은 일년 내내 언제나 똑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시니까 그 기도 역시 그날 그 순간 하나님의 감동을 의지하는 즉흥성은 부족합니다.    즉석 기도라 하여 사전에 아무 준비도 없이 자신의 말솜씨와 기도실력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교우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은 그만큼 예배를 위하여 미리부터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예배당에 찾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기도 담당자를 한 달 전에 미리 예고합니다. 

‘예배 전 10분은 예배를 준비하며 개인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라고 주보에 공지해드리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겨우 도착하여 숨고르기도 전에 예배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조금 일찍 도착하여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드리자는 의도에서 가지는 개인 묵상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 의미를 잘 몰라 그 시간에 옆 사람과 대화하거나 무료하게 두리번거리고 앞쪽만 바라보다가 예배 인도하러 강단에 올라선 목사와 눈이 마주쳐 어색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주일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며 예배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준비된 만큼 그날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내 자신이 은혜되는 예배가 됩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의 죄가 벌거벗듯 감추임 없이 드러나고 고백되며 주님께 아뢰어 용서의 기쁨을 맛보았을 때 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평화, 자유함 그것이 예배자가 누리는 은혜요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경험하고 돌아가는 그 마음에 예배자의 기쁨이 샘 솟듯 흘러나옵니다.  참 예배자의 열매는 예배당을 떠난 일상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가정에서 학교와 일터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을 나누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는 예배에 대한 계속적인 갈망이 생기고 그 기쁨으로 즐겁게 헌신합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만나뵙고 맛보았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였습니다. 여인이 매일마다 두레박을 던져 힘들게 끌어올린 물이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이 터지도록 하신 영생하는 물입니다. 이 한 주간을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기쁨 속에 살아가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주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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