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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수성가(神手成家) (창 39: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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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성가(神手成家) (창 39:1~39)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자는 누구인지 아십니까? 조선일보 경제란에 우리나라 50대 부자를 소개했습니다. 1위는 전삼성그룹회장 이건희씨이고 2위는 현대자동차회장 정몽구씨입니다. 3위는 국회의원 정몽준씨, 4위는 신세계 회장 이명희씨, 5위는 LG그룹 회장 구본무씨였습니다. 그 신문에서 50대 부자를 소개하고는 그런 부를 자신의 힘으로 일군 창업자는 몇 명인가를 소개했는데 50명의 부자가운데 스스로 노력해서 지금의 자리를 이룬 사람은 11명이었습니다. 

100대 부자들 가운데도 스스로 노력해서 부를 이룬 사람은 불과 22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표를 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아버지나 혹은 할아버지 때부터 부를 물려받아서 지금 현재의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했는데 지금은 개천에서 용 나기가 거의 불가능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부도 대물림되고 가난도 대물림되는 시대입니다. 

강남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다른 지역에 사는 아이들 보다 서울대학교에 더 많이 들어갑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능력이 있어서 자녀에게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 투자하고 싶어도 투자를 할 여력이 없습니다. 자연법칙이 심는 대로 거두는 것처럼 사람 사는 세계도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많은 신혼부부가 있지만 다 같은 신혼부부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월세로 시작하는 신혼부부와 부모의 도움으로 아파트 한 채 준비해서 출발하는 신혼부부가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하기 나름입니다. 좋은 조건에서 출발해도 주어진 것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스스로 최악의 조건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최악의 조건에서 출발을 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최상의 조건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능력이라면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달리기를 하는데 출발점에서 달리기 시작하는 사람과 50m, 100m 앞에서 달리기 시작하는 사람이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면에서 보면 우리의 현실은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강남 3구 중에 하나인 송파구이지만, 송파구 중에서는 가장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마천동입니다. 우리 교우들을 보면 강남 같지 않은 강남 3구에 살고 있고, 그렇다고 부유한 부모를 만난 분들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신수성가(神手成家)“라는 설교로 여러분들에게 소망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신수성가란?

신수성가란 자수성가와의 비교 개념인 것입니다. 집, 즉 가문을 일으켰다는 면에서는 같으나 자수성가는 자기 힘과 노력으로 일으킨 것을 말하고 신수성가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의해서 가문을 일으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 물려받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늘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복을 받는다면 우리는 신수성가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므로 신수성가의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2. 신수성가의 모델

성경은 수많은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신수성가의 가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의 일생은 신수성가의 복으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흉년 중에도 100배의 복을 받았고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그가 받는 신수성가의 복을 목격한 후에는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 26:29)고 인정합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형 에서의 칼을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았는데,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짐승이 떼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요셉을 미워한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에게 신수성가의 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말씀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종으로 팔았으나 요셉은 신수성가의 복을 받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7년 흉년 중에 형들을 살리는 자리에 설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자녀들을 축복할 때 요셉은 다른 형제들 보다 2배의 복을 받습니다. 

창세기는 신수성가의 책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계속적으로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을 살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창세기에서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신수성가의 복을 받고 있습니다. 

남미나 북미나 유럽의 땅값이 비싼 곳은 대부분 유대인들의 땅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금융 등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노벨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이요 미국의 유명한 대학교 교수와 학장, 총장 들이 40%가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대도시 법무법인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 50%가 유대인입니다. 왜 이렇게 아브라함의 후손이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수성가의 복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출 1장에 보면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나옵니다. 그들은 애굽 왕으로부터 잔인한 명령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이 아기를 낳으면 여자 아기는 살리고 남자 아기는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애굽의 왕 바로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립니다. 왕이 산파들을 불러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물으니 산파들이 바로에게 “히브리 여인은 건강해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결과 산파 십부라와 부아는 신수성가의 복을 받습니다. 출 1:21에 보면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도 신수성가의 모델입니다. 삼하 5:10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목동출신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목동 일을 하다가 의도하지 않았던 큰 싸움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의분을 품습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립니다. 이 일로 백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되지만 사울의 시기를 받고 사울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결국 사울은 점점 약해지고 다윗은 점점 강성해집니다. 다윗은 어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신수성가의 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을 다 열거 한다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간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아니지만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사람 두 분을 소개합니다. 그분들 외에도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분들이 많지만 시간 관계상 두 분만 소개합니다. 

일제시대에 평양에 14살에 결혼하여 16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과부가 된 백선희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서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신뢰하고 교회 일에 앞장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삯바느질을 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좋은 산이 하나 있으니 그 산을 사라고 말하니 소개하는 말만 믿고 그 산을 샀습니다. 좋은 산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좋은 산이라고 생각하고 산을 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봤더니 그 산에는 나무 한그루도 없고 풀 한포기도 없는 그냥 돌산이었습니다. 속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상하긴 했어도 기도 중에 ‘내가 그 산을 사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그 산을 샀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할까?’하고 그냥 참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산을 많은 값을 줄테니 팔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백선희 성도는 거절했습니다. 쓸모없는 산을 내가 파는 것은 양심이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신앙양심을 지킨 것입니다. 거절을 하니 다음에 또 다시 찾아와서는 그때 값보다 10배를 더 줄테니 팔라고 매달렸습니다. 당시 일본은 도로를 내고 공장을 짓는 일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를 찾고 찾다가 백선희씨가 소유한 그 산이 온통 석회로 가득 찬 돌산임을 알아낸 것입니다. 그것을 알 턱없는 백선희 자매는 신앙양심 때문에 그 산을 팔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 산 값이 100배가 뛰고, 200배까지 뛰었습니다. 그래도 안 판다고 말하자 일본사람은 그 여인의 신분을 조사하게 됩니다. 

백선희 자매 주변에 광물학자가 있는지, 고고학자가 있는지, 어떤 배경이 있는지 알아봅니다. 그런데 배경을 알아보니 주위에는 아무 인물도 없고 다만 교회 다니는 신자라는 것만 알아냈습니다. 그때 일본 사람이 교회 다니는 신자들은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교회 목사님 말씀은 잘 듣는다는 것을 알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은 목사님에게 그것을 팔도록 권고해 달라고 말했고, 사실 그 산은 석회산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백선희씨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바로 이때를 위해서 자매에게 큰 복을 주신 것이니 산을 팔라고 해서 250배의 돈을 받고 그 산을 팔았습니다. 사기 당한 줄로만 알았던 그 산, 값싸게 팔아도 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 마음 아플까봐 갖고 있었던 그 산이 황금덩이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조만식 장로님의 기념관을 지을 때 백선희씨가 거금을 내놓아서 기념관을 잘 지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선희씨는 선한 일을 너무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이름을 백선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백선임 자매는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대전에 사는 김홍선 권사의 간증입니다. 식품 가게를 하나 인수했는데, 하루에 음료수 두 세 병정도 파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머리는 계속 아프고 온 육체는 병들어서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농촌의 재산을 정리해서 사 둔 집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위기도 당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 오직 하나님께 떼쓰며 기도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녁식사 후엔 무조건 교회로 달려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울며 매달렸다. 기도를 시작한지 3년이 다되어 갈 무렵, 큰 회개를 하게 되었고 성령의 충만함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몸의 병도 고침을 받았고 그 이후 가게도 잘 되기 시작하여 음료수 두 세병이 고작이던 가게의 하루 매상이 10만원, 30만원, 50만원으로 계속 올라갔습니다. 큰아들은 바라던 대로 농촌지도소에 취직을 하였고, 막내아들도 한양대학교의 연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뻔했던 집도 40일 저녁금식과 작정철야기도를 통하여 해결 받았습니다. 글도 몰랐는데 하나님의 응답으로 성경도 잘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홍선 권사는 철야기도를 통해서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3. 신수성가한 사람들의 특징

저와 여러분도 신수성가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럼 신수성가의 복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을 존중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신수성가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어느 기업체의 회장이 사업도 잘하지만 주식 투자를 잘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회장의 자가용을 운전하던 운전기사도 주식 투자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주식에 대한 지식이나 안목이 부족한 운전기사가 어떻게 주식투자를 잘해서 많은 돈을 벌었을까요? 

그 운전기사는 회장님이 차 안에서 전화통화 하는 내용을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이 투자하는 곳에 자기도 투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적은 돈을 투자했는데 투자하는 곳마다 주가가 오르고 마침내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입니다. 회장님과 동행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모세에게 훈련이 필요했던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훈련이 안 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생각납니까?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일 때 좌우를 살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17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고 옥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요셉’ 영화를 보면, 보디발 부인이 요셉을 유혹하는데, 그 부인이 정말 굉장한 미인입니다. 그 미인이 모든 하인들을 몰아내고 그 넓은 집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핑크 빛 잠옷을 입고 요셉에게 접근했습니다. 

"요셉, 이 집에 아무도 없어. 나하고 요셉 둘뿐이야. 우리 연애하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러자 보디발 부인이 자기 치마를 벗어서 우상의 머리에 씌우고는 "이제 보지 못하니 연애하자."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우상을 섬기니 그 우상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당신이 섬기는 우상은 보지 못하지만 내 하나님은 보십니다.” 하고는 뛰어나갔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존중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셨고 그 결과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의 [존중]이란 책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데이지 오스본이란 목사님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많은 전도 집회를 하는 분입니다. 한번은 한 여자가 죽은 아기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살아나도록 기도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데이지는 포대기 속의 시신을 받아 안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조금 지나자 움직임이 느껴지면서 포대기 속에서 기침 소리가 났습니다. 포대기를 풀자 아기가 그녀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엄마는 감격의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데이지 목사님이 왜 아기가 기침 소리를 날 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포대기를 들추어 아기 얼굴을 보고나서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하나 밖에 없었어요. 다른 쪽의 눈의 자리는 그냥 움푹 파여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 보니 우리 아기가 예쁜 두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잖아요?” 이 모든 것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일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일들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사역자들이 미국, 서구 국가에 와서 똑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기름부음도 똑같고 사역 방법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서구 집회에서는 몇 명의 두통환자, 허리 환자, 소수의 관절염 환자 정도만 고침 받을 뿐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 분의 분석은 존중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대감의 부족입니다. 

한 번은 존 비비어 목사님이 주일 오전 8시에 감옥 가서 1500명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을 온 마음을 다하여 찬송을 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니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질병이 치유되고, 사람들이 목회자로 헌신을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이 그 사역을 마치고 11시에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게 됩니다. 목사님은 교회로 가면서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교회에서도 감옥에서 일어난 영적 부흥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교회에서 드린 예배는 감옥에서 드린 예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분위기는 잔뜩 굳어 있었고 사람들은 은혜 없이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혀 기름부음을 느낄 수 없는 그저 그런 예배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 두 예배에 이런 큰 차이가 나게 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감의 차이입니다. 가까이 와 계시며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존중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중하는 자들에게 역사하십니다. 
   
막 6:5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고향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던 강력한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막 6:3이하에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주님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서구 기독교인들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주님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모함도 없이 형식적인 예배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고 습관적인 예배를 드리고 습관적인 봉사만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존중의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첫 사랑으로 돌아가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범사에 주님을 존중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신수성가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려면 주님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상 2:30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집안의 몰락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2) 우선순위가 분명 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면 모든 일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일에 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수성가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 6:33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선순위가 분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이나 가정보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여행을 출발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나중에 100세에 얻은 이삭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니 주저하지 않고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누구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선이었고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끌려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로써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는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뜻이 우선순위 1번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다니엘의 정적들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하여 사악한 꾀를 썼습니다.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든지 경배를 하거나 기도를 하면 사자굴에 던져버리는 악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 앞에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보다 바벨론의 법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는 일은 이해가 되면 순종하시고 이해가 안 되면 복종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우선순위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해도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여러분! 때로는 교회 일을 하다가 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직분 때문에 해야 하고, 어떤 때는 목사와의 관계 때문에 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한다면 더 좋지만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십시오. 교회 일을 하다보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해피데이를 하는데 진행위원이 필요합니다. 부목사님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진행위원에 헌신하기로 동의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자의에 의해서 헌신을 약속하신 분들도 있지만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그분들에게 신수성가의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진행위원으로 자원하지 못한 분들도 이 시간 감동을 받으시고 자원해서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억지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구레네 시몬’입니다. 구레네 시몬도 신수성가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레네 시몬을 연구해보면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도 복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복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행 13:1에는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안디옥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에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니게르’라는 말은 흑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시몬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구레네 시몬은 이방인을 위해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로 유명한 안디옥 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 다음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시몬과 같은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구레네 시몬이 같은 동네에 사는 루기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를 말씀으로 양육한 결과, 안디옥교회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구레네 시몬은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증거자로, 말씀으로 양육하는 교사로, 또한 안디옥 교회의 여러 가지 영적인 일을 돌보는 지도자로 쓰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의 가족이 복을 받았습니다. 

막 15:21에 보면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로마 사람들을 위해 쓴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그와 그의 아들 루포는 로마에까지 알려질 만큼 당시에 저명한 인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쓰는 편지 끝부분에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롬 16:13절을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루포가 십자가를 억기로 짊어진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라고 소개하는데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자기의 어머니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레네 시몬의 12대 후손이 바로 로마의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라고 합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12대 후손이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다가 신수성가의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신수성가의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늘 하나님 앞에서 살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그분이 원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그분이 원치 않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신수성가의 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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