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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다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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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다 (마 5:4) 


사람은 ‘응애’하면서 울며 태어난다. 울면서 자란다. 그리고 죽으면 많은 사람이, 무덤에서 울어준다. 이와 같이 인생은, 울음으로 시작해서, 울음으로 끝난다. 눈물 없는 인생은 없다. 호화로운 궁궐에서 사는 사람이나, 작은 오두막집에서 사는 사람이나, 모두 슬픔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야 한다. 

많은 사람이 눈물과 고난을,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요, 벌로 생각한다. 그래서 울지 않고 고난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최대의 축복이요 은혜이니, 인생을 즐기자고 한다. 그래서 쾌락에 빠지고, 재미와 오락에 시간과 돈을 쓴다. 

세상은 우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슬퍼하는 자들은,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들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토마스 왓슨은 천국에 가는 데는, 8개의 다리가 있는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우울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애통함이 복이다. 애통(哀痛)은 (슬플 애) (아플 통)자다. 너무나도 슬퍼서, 마음이 아픔을 말한다. 애간장이 탄다고 할 정도로, 매우 깊이 상심한다는 말이다. 

우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자신의 아픔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울면, 대부분 치료된다. 문학에서도 비극적 결말을 통해, 관중들이, 안타까운 연민을 느끼고 울게 되는데, 이때 카타르시스, 마음의 정화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처럼 우는 것이, 능력이 된다. 

반면 울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 성경의 인물들은, 울기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도 아내를 잃었을 때 울었다. 다윗도 고통 속에 울었다. 한나는 눈물로 기도할 때, 이스라엘 민족을 살린 사무엘을 낳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도 울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다. 예수님도 우셨다. 히스기야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고침을 받았다. 목회자도 강단을 눈물로 적시며, 기도할 때, 설교를 해도 은혜가 넘치고, 설교는 깊어진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늘날 과학이 많이 발달했고, 뛰어난 법률이 있지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눈물은 망나니 자식이 돌아오게 하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거두게 하는 것도 눈물이다. 

그러므로 눈물은, 부끄러운 것도 약한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강한 것이 있다면, 사랑의 눈물이다. 우리도 애통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눈물은 인간만 흘리지 않는다. 짐승들에게도 눈물이 있다. 그러나 짐승의 눈물과, 사람의 눈물은 다르다. 

짐승의 눈물은 생리적, 화학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물은, 감정과 의지가 들어있는,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눈물이다. 그런데 성경은 애통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무엇인가? 

1. 먼저 애통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눈물은 “눈동자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물이다. 항상 조금씩 나와서, 눈을 적셔주지만, 정신의 감동이나 자극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오기도 한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다. 

(1) 먼저 눈물엔 생리적 눈물이 있다. 
눈망울을 촉촉하게 적시기 위해 흐르는 눈물, 눈에 먼지나 티가 들어갔을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흐르는 눈물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찬바람을 쐬면,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젊은 사람이라도, 크게 웃다보면, 눈물이 흐른다. 이때 많은 양의 공기가 들어와, 코가 건조해지고 얼굴근육이 눈물샘을 자극하게 되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게 된다. 이 생리적 눈물이 충분치 못하면, 안구 건조증에 걸리게 되기에, 인공 눈물이라도 넣어야 눈이 건강해진다. 

(2) 거짓된 눈물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악어의 눈물’이 있다. 악어가 강가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사람을 위해 울어 주고, 잡아먹는다는 데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보았듯이, 네로 황제는 로마시가지에 불을 지른 다음, 그것을 보고 시를 짓고, 자신의 눈물을 유리관에 담는 등, 온갖 해프닝을 벌인다. 폭군 네로 황제가 로마를 불태우면서 ‘눈물단지’를 가져오라고 한, 자신의 감성을 표현은 눈물은, 추악한 ‘악어의 눈물’이다. 

가끔 한 시대를 어지럽혔던, 옛 여인들의 이야기가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한다.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우는 것이다. 왕의 환심과 동정을 사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우는, 가식적인 눈물로 인해, 많은 충신들이 죽고, 역적이 되기도 한다. 

(3) 소유하지 못하는 좌절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다(ὀδυρμος, 오뒤르모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마2:18). 

자식이 없어서, 라헬은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결혼한 여인에게는, 자식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고 우는 슬픔은, 성경적 애통이 아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부목사로 있던 시절, 새벽기도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한 권사님이 너무 통곡하며 울었다. 

저는 제가 설교를 너무 잘해서, 감동받고 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목사님 우리 딸이 대학에 떨어졌어요.”하며 울었다. 아픈 사람, 없는 사람, 외로운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러한 통곡은, 좌절에서 오는 서러움의 눈물이지, 성경이 말하는 애통이 아니다. 

(4) 세상 근심의 차원의 애통이 아니다(συνόχη, 쉬노케). 
억압이나, 압제를 당해서, 불안해하는 절망의 애통함이다. (눅21: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애통)하리라.”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심판할 때, 죄로 인한 심판에 두려워서 우는 눈물은, 애통이 아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어떤 아이는 주사가 무서워서, 우는 경우가 있다. 이런 눈물은 아무리 많이 흘려도, 애통하는 눈물이 아니다. 

따라서 무조건 운다고 위로와, 축복되지 않는다. 모든 눈물이 복된 눈물은 아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위로받지 못하는, 축복이 없는 애통이 있다. 어떤 눈물을 흘리느냐가 중요하다. 통한의 눈물, 분함의 눈물, 수치의 눈물은 축복의 눈물이 될 수 없다. 

2. 본문이 말하는 애통은 (πενθεω, 펜데오)인데, 그 뜻은 무엇인가? 

(1)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말한다. 
이는 가장 큰 슬픔으로, 종교적 쇼가 아니라, 마음에 가장 큰 슬픔을 말한다. 

장례식장에서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눈물이 나오지 않으니까, 침을 눈에 바른다. 거짓 눈물이다. 신천지는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신분이 탈로 났을 때, 거짓된 눈물을 흘리도록 가르친다. 

미혹이라는 말은, 페인트칠과 같다. (마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지금도 우리 장례문화에서는, 무덤에 떼를 입히면서, 좀 더 아름답게 치장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시신이 썩어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물을 귀하게 보신다. 그 백성들이 중심에서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긍휼히 여기신다. 억지로 흘린 눈물을 가증한 눈물일 뿐이다. 

국가적인 재앙이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살려 달라 애원하며 흘리는 눈물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깨질 때 느끼는, 의인의 고통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주셨는데, 예수님을 바라보고도 눈물이 없다면, 가짜 신자다. 스펄전은 “천국은 메마른 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2)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음으로, 아파하는 애통이다. 
하나님의 덕을 소유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덕이 없음으로 인하여 아파한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사랑은 없고 질투와 시기만 있는 것을 아파하는 것이다. 이것이 애통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울지 말아야 할 것을 인하여 울고, 울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울지 않는다.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세대,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세대를 말했다. 참 안타까운 세대를 말한다. 마음이 아파야 한다.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있다. 끊을 단, 창자 장이다. 옛날 중국의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러 가다가 ‘삼협’이라는 지역을 지나가다, 어떤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아온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온다. 

끝까지 쫓아와서, 새끼를 구하러 배에 올라타자마자, 어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병사들이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다는 말이다. 그래서 큰 슬픔을 가리켜 ‘단장의 슬픔’이라 부르게 된다. 

애통은 이처럼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을 의미한다. 애통은 단순히 배가 고파 우는, 눈물을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이다. 아픔이 있는 눈물, 고통이 있는 눈물을 말한다. 아픔이 없는 눈물은, 애통이 아니다. 

(3) 아파하면서 주님께로 나옴을 말한다. 
(마27장)에서 죄짓고 두려워하는, 유다의 얼굴이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예수님을 죽였다고, 두려워하며, 후회한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했기에,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아니다. (창4:13)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죄의 결과를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모습이 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다.”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애통이 아니다. 형벌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시51:3)에서, 자기의 죄를 올바로 알고 회개한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보았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며 주께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애통한다는 말을 쉬운 말로 “자신에 대해서 깨어지는 체험”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애통이다. 

베드로의 애통도 그와 같았다. 형벌에 대한 죄의 애통이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성령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요16:8). 

따라서 성령님이 오셔야만, 자기 자신의 죄가 보이게 된다. 보여야 회개를 하고, 보여야 아파한다. 많은 사람이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양심에 화인 맞으면, 자기 죄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죄가 보이는 것은 축복이다. 보이면 울며 부르짖게 되어있다. 

돈 많이 버는 것이, 복이 아니다. 출세하는 것이 복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한 심령으로, 서 있는 것보다, 복된 인생은 없다. 그러므로 애통하자. 기독교가 천박해진 이유가 무엇인가? 애통함이 없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3. 애통하는 자의 복은 무엇인가? 

애통은 성화와 성숙을 가져온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웃지 않았다는 말씀도 없으니, 꼭 웃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자주 볼 수 있다. 나사로 죽음,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고 멸망당할 심령을 보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이와 같이 예수님의 애통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우셨다. 성도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선교하고 섬기게 된다. 죄로 인하여 괴로움 당하는 영혼에 대한 아픔은, 우리를 울게 만들고, 선교와 봉사하게 만든다. 

이 애통은 결국에는 죄를 버리고, 죄를 지배한다. 우리를 거룩한 성화와, 성숙의 자리로 인도한다. 바울은 은혜를 받을수록 자신의 죄를 보았다. ①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15:9) ②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엡3:8) 

③ 말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라고 했다. 죄에 대한 민감성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연약한 갈대이다. 험한 세상 나그네길을 가면서, 마음과 육체가 상처가 나고, 꺾어진 갈대와 같다. 성한 사람이 없다. 저마다 위로 받기를 원하나, 위로해 줄 이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8-19).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할 자가 누가 있는가? 이 땅에 위로할 자가 누가 있는가? 다 개인주의요, 자기 유익에 빠진 이 세상에서, 누가 남을 생각하고, 위로할 사람이 있는가? 애통하고 있으면, 나만 불쌍하지,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위로해 주신다는 말이다. 

어떤 위로를 원하는가? 사람들의 위로보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위로라는 말은 παρακαλεω인데, “곁에”(παρα) + “부르다”(καλεω)라는 말의 합성어다. “주님께서 도와주기 위해, 우리 곁에 서 계신다.” 이분이 바로 성령님이다. 

성령님께서 오신 이유는, 죄에 빠져 슬퍼하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하여 오셨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위로해 주신다. 힘을 내라고 위로해 주신다. 주님께서 곁에 계심을 경험하시나요? 진정한 주의 위로를 발견하셨나요?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인하여 근심하고, 근심해야 할 중대한 문제에는 근심하지 않는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무거운 짐은 내가 지고, 주님께서는 쉬라고 한다. 바뀐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이다. 자녀가 속을 썩인다. 그런데 그 고민을 누가하며, 주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 사업이 어려워 고민한다. 남편이, 아내가, 시댁에서…, 그런데 그 고민은 누가 하며, 주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무거운 짐을 내가 지고 고민하며, 주님께 눈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주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눈물로 호소하며 주님께 맡길 때, 주님의 위로를 맛보게 된다. 누가 이 한을 풀어 줄 수 있는가? 예수님만이 십자가로, 우리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줄 수 있다. 

눈물이 없이는, 빵의 참 맛을 모른다. 굶주린 자의 양식은, 밥맛이 다르다. 애통하는 자의 위로를, 어찌 안일한 자가 맛볼 수 있겠는가? 죄의 문제로 고민해 보셨는가? 거룩한 위로의 손길로, 우리를 다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주의 말씀에 공감하며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어떤 자가 복이 있는가? 이 땅에서 고난 당하는 자들과 함께 애통해 줌으로, 위로를 받는다. 내 애통은, 나 혼자 탄식함으로 위로가 안 된다. 애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고, 이적을 체험할 수 있다. 

지금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나요? 기도하시기 바란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의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사람은 함께 울어줄 수 있어도,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있기 때문에, 행복해 진다. 애통함으로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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