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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욱 그리하자 (행 2: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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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그리하자 (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장 46~47절>


할렐루야!
좋은 날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을 좋은 날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좋은 날을 좋은 날로 받아들이고
좋은 날이라고 표현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니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행복해 보이십니다.”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 해준다고 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유익이 되는 사람은 이용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좋아하세요?
그 사람이 특별해서, 아니면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까?
대부분은 자주 만나다보니 편하고 익숙해져서 …
정이 들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있어 자주 보게 되면 서로 친해지게 되는데
그런 것을 ‘근접성의 효과(Proximity Effect)’라고 합니다. 

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열린 
만국박람회의 기념 조형물로 에펠탑이 세워졌습니다. 
수많은 예술가와 파리 시민들은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고풍스러운 파리 분위기를 망쳐 놓을 것이라며 에펠탑 건립에 반대했습니다. 
시민들의 반발이 너무 거세자 
‘프랑스 정부는 20년 후에 철거하기로 약속’하고 건설을 강했습니다. 
탑이 세워진 후에도 시민들의 반대는 계속되었습니다. 

소설가 모파상은 자신의 동상이 에펠탑을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려세우고
식사 할 때 에펠탑을 안 보기 위해 탑 바로 아래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에게는 ‘흉물’, ‘괴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1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에펠탑은 프랑스와 파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를 찾는 관광객들은 에펠탑을 프랑스의 명소 1위로 꼽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눈을 뜨면 보이는 높은 탑이
차츰 정이 들어갔고 … 익숙해지고 … 좋아진 것입니다. 
파리 시민들이 날마다 보는 에펠탑에 정이 들어가듯
‘단지 자주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증가하는 현상’을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 또는 
‘단순노출 효과(Mereexposure Effect)라고 합니다. 
<이민규,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더난 출판, 참조>`

TV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방송 출연 빈도가 높아질수록 인기도 같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아나운서들이 정치에 많이 진출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선거 때 누구를 찍습니까? 정책을 살펴보고 정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얼굴을 더 많이 본 사람 
손 한번이라도 잡은 사람을 찍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마자들이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안부 전화 한 번 하지 않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친한 척하며 연락하는 사람 …
도움이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사람 …
세상에는 그런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얼굴이라도 자주 보여줘야 합니다. 

생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얌체 아닙니까?
예배드림으로 만나고/말씀으로/기도로 
하나님을 자주 뵙던 사람이 ‘하나님~’하며 기도하는 것과
갑자기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같겠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자주 모이고 만나야 합니다. 
모여 예배드리고/기도하고/찬송하고/봉사하고 … 
함께 하다 보면 사람끼리도 가까워지게 되고 하나님과도 가까워지게 됩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였습니다.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행 2:46)라고 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요즘처럼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거나
모이는 장소가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은 ‘끈질기게 계속 모였다’는 뜻입니다. 
모이다가 잘못하면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일임에도
예배의 자리에, 모이는 자리에 계속해서 모였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그때에도 모이기를 없애는 사람/없애려는 사람,
모이기를 싫어하는 사람, 모이는 것 비판하는 사람 … 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이는 것을 없애려고 하고, 모이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안모이고 싶어 하는 교회, 목회자,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주 모이는 교회,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좋은 교회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왜 모입니까?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혈연관계로 얽혀져 
무조건 사랑하며 살게 된 가족이 된 것처럼 …
교회도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영적인 혈연관계로 얽혀져 있기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하시고
모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하며 
핑계를 대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모이고 …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고 … 찬양하기 위해/기도하기 위해/
봉사하기 위해/섬기기 위해/하나 되기 위해 … 
어떻게 하든지 모이는 자리에 있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특성은 함께 모이면 힘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모이는 것에 소홀히 하며 
건강한 영적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시험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현상이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자리는 물론이고 속회/선교회 … 등 
모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 교회와의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함을 찾고 뜨거운 열정을 유지하는 방법은 “모이는 것”입니다. 
젖은 장작도 훨훨 타오르는 장작더미에 올려놓으면 불이 붙습니다. 
꺼져가는 불도 모아 놓으면 살아납니다. 
열정이 식어서 … 시험 들어서 … 
모임의 자리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 정신 좀 차리고 나오겠다’고 …
그러나 혼자 마음을 추스르고 정신 차린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여서 예배드리고, 예수 이름으로 교제해야 회복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드리기 위해 꼭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해야만 하는가?”
“꼭 교회에서 예배 드려야 하나?”
“교회를 정하여 등록하고 적을 두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또는 외딴 섬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때 묻지 않게 살려는 수도 생활 같은 애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특정한 장소에 모여 예배드리는 공중예배(공적인 예배)는 
개인적인 예배의 삶과 구별되게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예배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예배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성막과 성전을 짓게 하셨고 제사장을 두셨습니다.

물론 시대가 지나고 사람들이 달라지면서 
예배를 위한 모임의 방법과 예배의식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모여」예배드리는 것을 없애려는 시도에 
‘그리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히10:24-25).  
세상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도 그 당시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구별하여 모였던 
공식적인 자리에 친히 참석 하셨습니다(눅4:16). 
초대교회 성도들도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행2:46-47).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건 여행을 했던 
사도들과 초기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한 일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3세기 동안 대부분 교회는 
예배를 위해 지어진 특별한 건물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집에서 모였고(고전16:19, 골4:15), 
-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직업으로 인해 
서로 모일 수 있는 곳(빌4:22, “황제의 집 사람들”)에서 
만났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모여 예배드릴 집(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 구별된 집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예배드리며 
신앙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들에도 보면, 
지역교회에 속한 성도들에 대한 관심과, 
지역교회의 평안을 위한 권면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교회」라는 표현이 
지역교회(local church)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과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초대 교회도 누가 교인이며, 
누가 교인이 아닌지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행2:47, 행5:13). 
- 사도행전 2장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사도행전 5장 13절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행 5:13) 
초대교회가 집사를 세우고 감독을 세워 일을 맡기고 
감독을 하게 했다면 누구를 위해 일하고 누구를 감독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에 적을 둔다는 것은
‘자신이 정확한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한국사람 아닌 사람이 와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법적 지위를 받지 못한 사람을 ‘불법 체류자’라고 말합니다.
밥이야 먹고 살겠지만 사람 구실을 하며 살기 어렵습니다.
미국에 여행 갔다가 살기 좋다고 눌러앉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체류자가 됩니다.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편한 곳에 다니면서 예배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곤고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적을 둔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12~13절 보세요.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교회에 소속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께서 세우신 유일한 단체에 소속되어 섬기기를 거절하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래야 합니다.
공적인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필요 없는 일을 왜 성경이 가르치며 
필요 없는 일을 왜 기독교 2000여년의 역사를 통해 계속하며 
그것을 위해 희생을 하겠습니까? 

현재도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의 예배를 부정하며
모이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이기를 권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24~25절)에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힘쓰기 위하여 서로 “권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권하고, 먼저 믿은 자는 나중 믿은 자에게 권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히브리서 10장에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이 언제일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날이 언제인지, 
우리가 살다가 언제 하나님 앞에 가게 될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이기에 힘써야 하고 신앙생활 잘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얼마 전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하시던 김집사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과 이별했다는 뜻의 ‘별세’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혹은 ‘소천되셨다’(부를 召, 하늘 天) 
하늘에서 불림을 받았다는 뜻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김집사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가 부흥회 인도중이어서 조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가족들이 제게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부인되시는‘한 집사’님이 남편 고 김 집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녀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들과 딸을 앉혀 놓고 “얘들아 신앙생활 잘 해라”고 하셨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자녀들에게 신앙생활 잘 하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녀들에게 
“청개구리도 유언은 들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마음에 잘 새기고 
신앙생활 잘 해야 한다. 훗날 하나님 나라에 가서 기쁨으로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식구들을 다 모아놓고 미리 유언을 해 놓으세요.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자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유산을 남기시기 바랍니다.(성경 속장에 글로 써놓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 이름으로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46절에 보세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행 2:46)

떡을 뗀다는 것은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식탁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 아무런 구분 없이 하나 되어 
마음을/마음 담긴 것들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성별, 나이, 생활수준, 높고 낮음, 직업, 직분, 취미 … 등을 초월하여 
예수 이름으로 하나 되는 곳입니다. 
선교목적을 위해서 의료선교회/교육자선교회/실업인선교회/
축구선교회/골프선교회/탁구선교회 …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하고 만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축구선교회끼리만 선교회로 모이면 좋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안됩니다. 
축구선교회는 축구할 때 모이고 나이와 취미, 신분 등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은 진정한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추수감사절 선교회 찬양 잔치가 그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 
다 모여서 한 찬양으로 노래 부르고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싫은 사람 있다고 선교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 들으세요.
싫다는 그 사람들도 천국에 갈 것인데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싫은 사람이 가는 천국이라 안가시렵니까?’

예수님은 마가복음 3장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 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식구들도 잘 모여야 합니다

식구들도 잘 모여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 그 가정의 구성원인 식구들도 잘 모여야 합니다.

모인다는 것은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하고 좋은 것을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
어린아이는 돌보고, 어른들은 공경하고 …
행복한 가정 보세요. 잘 모이는 가정입니다. 
식사를 위해 모이고, 예배를 위해, 인사를 위해 … 
식구가 자주 자주 모이는/모이려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명절에 극심한 고속도로 정체를 뚫고 고향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고 싶어 가고,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며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서 하는 일들이 대단한 일입니까?

그냥 얼굴 보고 반갑다고 좋아하고 … 함께 식사 하고 …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
그러나 다투고 삐지고 울고 서운하다고 하고 … 
많이 먹어 배탈 나고 … (소화제 먹고 …)
그러다 헤어지면 다음 명절에 또 가는 것이 고향이요 또 만나는 것이 가족입니다. 

가급적 가세요. 모이세요. 
찾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고,
찾아뵐 어른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가시기 바랍니다.
단, 오래 있지 말아요. 1박 2일이 딱 좋습니다.
손님과 생선은 3일 되면 냄새납니다.
예배드리고 가고, 빨리 다녀와 예배드리세요. 
고향에 간다는 핑계로 주일 빠지지 마시고 ….

가정이든 교회든 만나야 사랑이 싹트고/정이 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고향에 자꾸 가서 
그리스도로서 빛 된 삶을 보여야 전도하는 기회도 됩니다.

가정과 교회는, 교회와 가정은 …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합니다.
뿌리 내린 나무는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요즘 결혼하는 젊은이 중에는 
‘만약에 이혼할 경우를 대비하여 이혼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
합의해 놓고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왜 결혼합니까? 하지를 말지 ….
결혼은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뿌리를 내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강단의 꽃 장식이 예쁩니다. 
그런데 뿌리가 잘려 버린 이 꽃들은 곧 시들어버립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에 뿌리내렸습니까?

아니면 뿌리 없이 잠시 꽂혀 물만 빨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에 뿌리내렸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렸습니까?
잠시 꽂혀서 물만 빨고 있습니까?
변함없는 신앙생활, 뿌리 내린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장권사님 부부의 아들 결혼 주례를 했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교회에 출석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
예배의 자리에 있는 분들입니다. 참 감사합니다.
변함없는 것, 뿌리 내린 것이 좋습니다.

뿌리 내린 나무라야 자리를 지키며 열매도 맺습니다.
뿌리내린 삶을 위해 힘쓰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 되기 위하여 
예배자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신앙생활도 뿌리 내린 신앙생활, 가정생활도 뿌리 내린 가정생활, 
변함없이 뿌리 내린 신앙생활을 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 복된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 원합니다.
모이기에 힘들고 모이기에 어려운 조건이 있다 할지라도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듣는 자리에, 배우는 자리에, 기도하는 자리에
섬기는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 있기를 즐겨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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