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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벧전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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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벧전 1:6~9)
 
 
우리 성도들 가운데 형편과 처지를 살펴보면 참 근심이 많겠구나 하고 마음으로부터 짠한 마음이 느껴지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어 기도하곤 합니다. 
그런데 근심의 문제가 외부적으로 타인이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의 문제뿐이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잠깐 근심하게 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가사처럼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죽을 일이 쌓인 곳"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도 난제들을 만나므로 근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잠시 근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근심도 시련도 잠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근심은 우리를 성장시키든지 우리를 파괴시키든지 둘 중의 하나로 작용할 것입니다. 잠깐 하는 근심은 우리를 크게 성장 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는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뼈로 마르게 하고 우리의 생명을 상하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유대 격언에 "당신이 죽으면 벌레가 먹고 당신이 살아 있을 때는 근심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불어 성경은 이 근심에 대하여 어떻게 말을 하신 줄 아십니까? 잠언15:13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길게 가는 근심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근심은 화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은 근심상자를 부엌에다 두었다고 합니다. 근심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근심되는 일을 종이에 적어서는 그 근심상자에다가 넣어둔다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일주일쯤 지나고나서 그 근심상자를 열어보면 놀랍게도 대부분의 어려움은 벌써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녀는 결론을 내리기를 많은 어려움으로 정력을 소모하고 잠을 설쳤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의 생애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난관과 난제들을 다 피하거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난관과 난제들 앞에서 무엇보다도 잠깐 근심하는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곧 주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 주님을 피난처로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자로 세워주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선하신 인도와 그의 베푸시는 은혜를 의지하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필요를 아시고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 때도 주님의 생각은, 주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시려는 생각뿐인 것을 믿는 성도들이 도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사실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믿는대로 되는 것입니다. 

1.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누구든지 형형색색의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여러 가지 색깔의 시험이 찾아듭니다. 짚신 장사는 장마비가 오는 것이 시험일 수 있습니다. 우산 장사는 오랜 가뭄이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은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나 누구에게나 오는 시험인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아무 시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중국 고사에 보면 저승사자가 죽을 사람들을 염라대왕 앞으로 데려왔는데 생명책에 보니까 그 중에 아직 살아야 할 기간이 남아 있는 사람들, 몇명이 잘못 잡혀왔더랍니다. 그래서 염라대왕이 실수를 인정하고 그 사람들을 세상으로 돌려보내 더 살다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까 세상으로 돌려 보내면서 그들에게 보상으로 원하는 것 한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산 것이 한 이 되어서 부자되게해 달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고요. 또 한 사람은 세상살면서 무시당하면서 살았는데 다시 산다면 권세한번 부려보고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서 권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일평생 불평불만없는 착하고 예쁜 마누라와 속썩이지 않는 자식들 데리고 부족한 것 없이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곳에서 아무 근심없이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네키 이 고이안놈! 그런 곳이 있으면 내가 가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될 수 있고, 권세 있는 자는 될 수 있고, 지식 있는 자는 될 수 있는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속썩지 않는 곳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근심된 일 많고 곤고한 일 많고 죽을 일이 쌓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험은 시장바닥에도 있지만 기도하는 곳에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빠지는 시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신후에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이기게 하시며 시험 중에 참게 하시며 시험중에 그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시험은 우리에게 근심을 가져다 주지만 근심은 잠깐이어야 합니다. 
  
잠깐하는 근심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난제 앞에서 근심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흔들리고 근심하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이기에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문장 속에는 헬라어 '데이'가 사용되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 ~하는 것은 마땅하다. 당연히 ~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쉽게 말해,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 잠깐 흔들리고 근심하는 것은,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서도, 주님도, 사도도 인정하는 근심입니다. 다만 온전한 믿음은 흔들림 없는 믿음이 아니라, 잠간 흔들리더라도 곧장 제자리로 돌아오는 신실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잠깐 흔들린 것을 통하여 오히려 뿌리가 더 깊어지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근심은 잠깐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는 근심은 잠깐입니다. 
벧전 5:10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하셨습니다. 

[고후4:17]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7:8]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잠깐 해야 할 것을 오래도록 하고 있으면 문제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게 되면, 근심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그 근심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오히려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잠깐 동안 근심하다가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도들의 시험과 시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택한 자에게 시련이 있고 근심할 일이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말씀 7절을 통하여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시련하시고 잠깐 근심하게 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23: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인 다이아몬드는 그 재료가 숯과 같습니다. 이 두가지를 구성은 물질은 즉 C, 탄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최고의 보석인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검게 탄 숯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난 것입니까? 그 과정의 차이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숯이 압력을 받아서 견디어낸 결정인 것입니다. 압력이 없으면 숯으로 머물고 맙니다. 지금 가을입니다. 열매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겨울과 봄과 여름이 없는 가을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 겨울과 봄과 여름이 없는 가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씨뿌리지 않고 열매부터 따겠다고 달려드는 철부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다. 땅을 얼게 하고 해충을 얼어 죽게 하는 겨울을 지나야 하고, 싹이 자라는 봄철과 뜨거운 여름 햇볕을 거처야 비로소 토실토실한 가을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인내가 없으면 내 안에 있는 숯은 언제나 숯으로 머물수 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쓸모없는 숯을 다이아몬드로 끄집에 내는 비결은 잠간 근심하게 되는 난제를 피하지 않고 기쁨으로 여기면서 감당하게 될 때 숯은 다이아몬드로 바뀌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변해서는 않됩니다. 잠깐 근심하는 것조차 탓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정말로 그 근심은 잠깐만이어야 합니다. 택함받은 성도,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후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근심이 잠간 뿐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잠깐만 근심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이 시련이나 근심을 "오히려 기뻐하게 하실 것입니다."

근심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잠깐이라도 근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전개될 것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들에게 결코 좋은 길을 예비하시고 시험하시는 것을 우리는 믿고 근심은 잠깐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나쁜 결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으나 다시 살아나셨으며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묵묵히 참고 시험중에 이길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주어짐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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