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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일꾼답게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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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꾼답게 (고후 6:1~10)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 시련을 넘어

로마는 아드리아해로부터 에게해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도처에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로 Via Egnatia를 건설했습니다. 그것은 물론 제국의 군대를 파견하고, 또 식민지로부터 거두어들인 각종 물품들을 로마로 신속하게 운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지형을 따라 굽이굽이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자연적 장애물들은 제거되었습니다. 산은 자르고, 계곡에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 길은 자연과 지형조차도 굴복시키는 황제의 능력을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 그 길을 따라 로마는 제국의 문화를 세상에 퍼뜨렸습니다. 그 문화는 전쟁을 통한 정복이야말로 평화의 길이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통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그 길을 따라 한 왜소한 유다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 전역에 새로운 평화의 길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언약에 바탕을 둔 평화, 비폭력과 정의를 통한 평화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 길은 곧 예수의 길이었습니다.

로마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고 또 로마의 문화에 동화되기를 열망하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평화의 길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가는 곳마다 의심의 눈길을 받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소아시아에게 겪었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고백합니다.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이어서, 스스로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떤 열정이 그로 하여금 그런 길을 걷게 했을까요? 그것은 일확천금의 꿈도, 공명심도,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열정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새로운 세상의 꿈에 사로잡혀 그는 온갖 환난을 마다하지 않고 로마 제국을 누비고 다녔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도저한 고백은 그의 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 말입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겨울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 때마다 주님은 그에게 위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환난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했기에 그는 역시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 혹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고후3:3)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박해를 받기는 해도 이런 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을 ‘밑힘’이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읽고 있습니까? 누군가 우리를 보며 ‘과연 정의와 사랑에 바탕을 둔 삶이 가능하구나, 지배가 아니라 협동과 섬김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구나’ 하고 느낀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지금은 구원의 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마치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았구나’ 하는 책망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사는 이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정신이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삽니다. 애쓰지 않아도 접하게 되는 수많은 정보로 마음은 뒤죽박죽이고,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소음은 마음에 고요가 깃들 틈을 주지 않습니다. 잘게 토막 난 시간 속에서는 생각이 무르익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대체 무얼 하라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는지 생각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자기 소외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삶이 천금보다 귀한 것임을 배웠습니다. 함부로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임을 주님은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에 지쳐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말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몸도 마음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몸의 버릇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때도 있습니다. 몸을 잘 다스리는 것이 마음 다스림의 기본인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옛 사람들이 ‘修身’을 마음공부의 기초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우리의 앎도 감정도 의지도 왜곡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실수투성이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했던 일이 오류일 때도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의 열정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분별력 없는 열심은 스스로와 남을 해치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깨지기 쉽고, 속기 쉽고, 왜곡되기 쉬운 게 우리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질그릇’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그 보화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물속에 발을 담근 채 모래를 걸러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흐름 속에서 그 보화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 삶의 과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로 삼아 우리의 삶을 자꾸만 걸러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 하나님의 사랑의 용광로 속에 던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다만 只’와 ‘이제 今’으로 구성된 말인데, 영어로 옮기면 ‘지’는 ‘only’이고 ‘금’은 ‘now’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내일은 주님께 속한 시간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값진 보화를 걸러내야 하는 시간은 바로 지금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한다고 말합니다. 뜻을 정한 것이지요. 하지만 살다보면 불쑥불쑥 ‘자아’가 고개를 내밉니다. 옛 삶의 관성이 슬그머니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결단입니다. 확고하게 방향을 정하고 옛 삶과 단절하지 않으면 옛 삶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끊고 나아가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노예근성’을 빼기 위해 40년의 광야생활이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 사서 고생하기

바울도 시련의 시간을 통해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탈바꿈되어 갔습니다. 그는 환난과 궁핍과 곤경을 겪었습니다. 살 희망조차 잃었다고 말했던 것을 보면 그가 감내해야 했던 시련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과도 대면해야 했습니다. 힘든 노동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늦게까지 일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오죽 했으면 바울이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말했을까요? 그는 왜 그런 생고생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4:10). 

고난은 때로 인생을 깊게 만듭니다. 어려움을 모르고 산 사람은 남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실패한 이들의 아픔과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 사람, 그래서 자신도 실패할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다른 이들을 향한 여백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외로워 본 사람이라야 지금 외로운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고난이나 시련은 삶의 중지신호처럼 우리 앞에 느닷없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선물 없이 오는 법이 없습니다.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잘 맞아들이면 고난은 우리에게 인간적 품격이라는 선물을 남겨두고 떠납니다. 이것을 바울은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는다”(롬5:3b-4a)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고난이 저절로 품격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자고 깨고, 먹고 마시고, 일하고 노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늘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보다 더 큰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왔으니 말입니다. 거지꼴을 하고 있다 해도 암행어사는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긍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6-7a)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꼭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순결이란 마음의 가난, 즉 자아를 여읜 마음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을 일컫습니다. 여기에 꼭 덧붙여져야 할 것이 ‘인내와 친절’입니다. 친절은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나옵니다. 그의 불편을 덜어주려는 마음의 지향이 곧 친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점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힘도 성령의 감화가 없다면 곧 고갈되고 맙니다. 말씀에 대한 감동과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게 주님의 일입니다. 

• 역설적 존재

하나님의 사람은 세속에 매몰된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존재들입니다. 모두가 높은 곳을 지향할 때 낮은 곳을 지향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추구할 때 불편하고 힘겨운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의심을 받게 마련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온갖 말로 바울을 폄하했습니다. 사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바울이 뭔가 꿍꿍이속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했을 거라든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 비해 이름 없는 사람이라든지,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등의 모함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증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b-10)

그는 사심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누구를 속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성도들의 구원에 있습니다. 그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늘 시련을 겪기에 그는 근심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늘 기뻐합니다. 질그릇 속에 담긴 값진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내면의 힘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행기가 지상의 인력을 떨치고 붕 날아오르듯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 나라의 흐름을 타고 있음을 아는 순간 근심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을 부요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염려와 근심에 짓눌려 짜부라진 그들의 영혼을 일으켜 세웠으니 말입니다. 

사람 속에 예수 정신이 들어가면 그는 일어선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삽니다.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나의 일을 함께 하자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후배 전도사가 있습니다. 교인이 20명 쯤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교인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몇 달 수고한 끝에 그의 교인은 다섯 명이 되었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입니다. 그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합니다. 물론 교인은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강대상 앞에 서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합니다. 

아들의 목회지를 찾아갔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 목사의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그리고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네가 수도원장으로 사는구나.” 프란체스코 성인은 새들과 동물들에게도 설교를 했다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느 수도자는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싶어했습니다. 사환 노릇을 하던 젊은이가 고단한 나머지 텅 빈 들판에서 발을 멈추고는 말씀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 앞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수도자는 열성을 다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돌들이 ‘아멘’ 했습니다. 빈 예배당에서 선포되는 그 전도사의 설교에 누가 ‘아멘’ 할까요?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귀히 쓰시지 않겠습니까?

내 앞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아니, 듣는 이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거룩한 바보들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희망입니다. 한국 교회를 그나마 지탱해주는 것은 큰 교회가 아니라 바로 이런 작은 교회들입니다. 돈이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는 이 전도된 세계에서,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선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에 근거한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 속에는 패배자들의 한과 눈물이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정의에 근거한 평화는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평화입니다. 지금 로마 제국은 사라졌지만, 제국의 가치관에 맞서 홀로 서쪽으로 나아갔던 바울이 전한 기독교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타락한 문화 속에 예수 정신으로 틈을 만들고,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교회이고 성도입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제국이 되어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줄 것은 사랑과 이해와 존중입니다. 옛날 유다인들은 평화를 위해 기도한 후에는 세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고 합니다. 다른 이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뜻일 겁니다. 이 가을, 갈릴리 예수의 그 뜨거운 마음으로 불통의 세상을 소통의 세상으로 바꾸며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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