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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에서도 믿음을 지킨 교회 (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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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에서도 믿음을 지킨 교회 (계 2:13~17)


오늘 우리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를 읽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버가모 교회의 사자입니다. 그리고 보내는 분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자”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자”가 누구일까요? 
계 1:16절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예수님은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검은 말씀을 말합니다. 
히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한없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죄악을 심판하는 예리한 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1800년 전에 밧모섬에서 세례요한을 감동시켜 이 이 글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말씀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의 양식이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아주 예리한 좌우에 날선 검임을 잊지 마십시오.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으로 나타나신 주님이 말씀하시는 버가모는 어떤 곳입니까?

1. 사단의 자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13절의 말씀에 보면 “네가 어디에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라고 했습니다. 버가모는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왜 버가모가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이었습니까?
버가모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을 최초로 세운 곳입니다.

황제를 숭배하는 일에 있어서 로마의 통치를 받는 그 어떤 지역보다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트랴얀 황제 때에는 신전지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소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은 1년에 한번 황제를 숭배하고 분향하였지만 버가모는 매일 황제의 신전에 분향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버가모의 정치가들은 로마의 귄세를 얻기 위해 황제의 비위를 맞추느라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세력에 조종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눈에 가시였습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정치적인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버가모에 “사단의 권좌”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권좌란 사단의 자리 즉 보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버가모라는 곳은 사단의 권좌가 있는 사단의 본부였습니다. 사단의 집무실이 있는 곳입니다. 이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이곳에 복음이 언제 누구에 의해 전해졌는지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행19:10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 반 동안 머물며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말씀을 가르칠 때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은 다 말씀을 들었다” 는 기록에 비추어볼 때 그 때 버가모에서 온 사람들이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행 16:8절에 보면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시에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 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무시아를 지날 때 바울이 버가모에도 들렸을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16: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드로아는 버가모에서 아주 가까운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가모에는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이었습니다. 
“황제가 주님이다” 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다”가 정면 충돌하는 곳이었습니다.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불신과 믿음이 대치하고 악과 선이 충돌하였습니다. 버가모에서 일어났던 이 영적 충돌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일어납니다. 

거리에 나가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사단이 고도의 위장술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사단이 직접적으로 교회를 공격하였습니다. 수많은 정치가들을 통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가지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원래 생명체이기 때문에 박해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성도들의 믿음은 더 견고해 졌습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사단이 전략을 수정한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어느 정도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오늘 날에 사단의 전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도의 위장 전술을 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전술을 개발하였습니다. 사단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소품은 문화와 물질 만능주의 사상입니다. 이 보자기만 쓰면 사람들이 절대로 사단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음악은 원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중세 사회의 모든 예술품들은 작가들의 신앙을 담고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능멸하고 경멸하며 사단을 숭배하는 내용의 음악들이 사람들이 입에서 즐겨 불러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온갖 귀신을 섬기는 무당과 신접한 자들이 귀신 놀음판을 벌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 또는 전통이라는 가치관으로 판단하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사단의 정체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는 더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이 사회 구조가 돈이 없으면 안 되게 되어 가는 것 자체가 사단의 전략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오늘 우리의 현실은 옛날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보았던 버가모 교회의 상황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땅이 바로 사단의 자리 즉 사단의 활동 무대요 사단의 관활 구역입니다. 
우리는 이 사단의 권좌가 있는 이 곳에서 살고 있고 이 곳에서 ale음을 지켜야 합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2. 사단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믿음

13절 마지막에 보면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13절 하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성도 중에 하나가 박해자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므로 순교를 당하는 때에도 그들은 예수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활동무대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온갖 도전과 환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3, 믿음을 지킨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행 4:12절에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이름은 오직 예수 이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자들은 이 이름을 굳게 잡습니다. 굳게 잡았다는 것은 굳게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구주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이 없다는 믿음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주 합리적인 것 같지만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원수도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종교인도 사랑하고 무신론자도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믿음을 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를 쉽게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순교적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3절 중반에 보면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가로 한 것으로 봐서 버가모에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던 같습니다. 
그때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안디바가 어떻게 순교하였는지는 잘알 수 없지만 문맥으로 봐서 박해자들은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앞에서 안디바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면서 다른 성도들이 겁을 먹고 신앙을 버리고 변절하기를 회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안디바의 비참한 죽음을 보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순교는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자극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얼마 전 미국 콜로라도 주 어느 고동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순교한 ‘케시 버널’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16세의 소녀 버널 양은 미쳐 날뛰는 범인 중 한 사람 앞에 서있었습니다. 범인은 총구를 케시의 머리에 대고 물었습니다. 
“너 하나님을 믿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래 난 하나님 믿어”

순간 총구에서 불을 뿜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고백하나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보호해주고 살려주셔야지 왜 죽게 하느냐고?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귀중히 보신다는 것과 그리고 결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후에 버널양의 희생을 들은 수많은 청소년들이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였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지막 남긴 말 “그래요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라고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누군가가 기독교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고 걱정들을 하고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를 위해 순교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순교는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를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전 15: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생활 속의 순교를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순교의 정신으로 산다면 사단이 감히 우리를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순교적 영성이 부족한 신앙은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믿음이 시험을 받을 때 그때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 부인하면 평소의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순교적 영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생활 속의 순교를 위한 순교적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말씀으로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삶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 대로 살기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 즉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불편함이나 어떤 희생도 기꺼이 치르겠다는 각오입니다.
4.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바치는 헌신입니다. 

순교적 믿음은 하늘에 영원한 보상이 약속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순교적 삶을 돌아보면서 딤후4:7,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제정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때 혁명을 일으킨 공산당들이 열두 명의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며칠 동안을 굶긴 후 얼음 구멍 열두 개를 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벌거벗긴 후 두 팔을 벌리고, 구멍에 한 사람씩 들어가게 했습니다.
옆에는 따뜻한 불과 맛있는 음식이 놓여 있었습니다.

공산당원이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고 나오면 따뜻한 불을 쬐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한참 후 한 기독교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물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 순간 그들을 지키던 한 군인의 눈에 하늘에서 열 두 개의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던 열두 천사 중 한 천사가 도로 올라가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본 군인은 재빨리 군복을 벗고 얼음 구덩이로 들어가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버린 예수를 내가 믿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사단의 자리입니다. 사단은 전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성도를 핍박하였지만 지금은 숨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문화, 예술, 경제 그리고 우리가 즐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활용하여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런 때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아야합니다. 그리고 순교적인 믿음을 가져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끝까지 승리하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단의 자리에서도 믿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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