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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험로(險路)를 만났을 때 (민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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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험로(險路)를 만났을 때 (민 14:1~12)
 
 
1. 길 위의 인생

아직 한낮은 여름 그대로지만, 그래도 저는 요즘 같은 날씨가 좋습니다. 이런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수 박인희 씨가 부른 “끝이 없는 길”이란 노래입니다. “길가에 가로수 옷을 벗으면 …”으로 시작하는 노래, 기억나시지요? 그 노래 가운데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 가도록 걸어가는 길”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人生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길 가는 것에 비유한 노래인데요. 정말 공감이 가는 노래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은 어떠셨습니까?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고 또 제법 많이 온 것 같은데, 앞을 바라보면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길인 것 같습니다. 제법 險山을 넘어 왔는데, 앞을 바라보니 지나 온 산보다 더 험해 보이는 산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도대체 얼마나 될 지 …. 그래도 지난 길을 걸어오면서 곁에서 동행해주어 즐거웠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의 헤어짐이 있을지 …. 

그렇게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갈 길은 탄탄대로였으면 좋겠다.’ 너무 높아서 오르기 힘들거나 너무 깊어서 힘들지 않는 평탄한 길이기를 바라는 것이죠. 또 ‘가능하면 넓은 길 곧은길이었으면 좋겠다.’ ‘낮에는 동행이 많고 밤에는 등불이 환하게 비쳐주는 길이면 좋겠다.’ ‘노상에서 강도나 나쁜 사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설사 이러한 소원들이 이뤄지지 않아도 ‘혼자서도 잘 찾아갈 수 있는 길’, ‘어렵고 힘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길’, ‘방해자와 적들을 만나면 자신의 힘으로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그랬습니까? 또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은 ‘길 위의 이스라엘 백성들’, ‘길 가는 이스라엘’, 즉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인생의 길을 가는 여러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길 가는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2. 계속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1) 멈춤

애급을 나온 지 약 2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의 南部 境界 地點, 즉 死海 아래 부분에 있는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애급에서 출발하여 가데스바네아까지는 11일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습니다(신1:2). 그러나 생각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러는 동안에 제법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지독한 광야 길이 끝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갈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찬 일이었지요.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 1:22)”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을 거부한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버렸습니다. 그러고서는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신명기 1장 23절, “…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 그들에게 의심이 생겼습니다. ‘저기 보이는 가나안 땅이 과연 우리가 그렇게 바라고 소망하던 땅인가?’ ‘과연 저 땅은 우리가 살았던 애급과 다르고 또 그 동안 고생한 광야와도 다른 곳일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일까?’ 이런 의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멈추어 서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겉으로 볼 때는, 정탐꾼을 보내는 것이 가나안 땅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어느 길로 전진하는 것이 좋을지를 살피려는 것으로 꽤 괜찮은 제안으로 보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나쁠 리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백성들의 멈춤과 정탐꾼 제안은 不信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말씀만으로, 약속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 직접 보고 경험해야만 하겠다.’ 

그런 면에서 가데스바네아는 不信의 場所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곧게 뻗은 도로에서 예고도 없이 멈추어서면 큰 사고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멈추어 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 1:22)”고 하셨음에도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입니까? 하나님은 대본에도 없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받아주셨습니다. 거기다가 친절하게도 모세를 통하여 정탐꾼으로 세울 사람들과 그들이 정탐해야할 내용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남북 경계는 가데스바네아가 있는 신광야로부터 북쪽 하맛 어귀 르홉까지입니다. 동서의 길이는 약 85km, 남북의 길이는 240km로서 일주일 혹은 열흘이면 정탐이 가능한 지역이었습니다. 

열 두 지파의 젊은 족장들로 구성된 정탐꾼들은 가나안으로 몰래 들어가 40일 동안 정탐을 했습니다. 그들은 장차 각 지파가 들어갈 곳의 지형, 현재 거주민, 特産物이나 主産物, 원주민들의 强弱과 多少, 땅의 土質과 영양화 상태, 진영인지 산성인지 하는 住居 形態, 그리고 나무와 식물 등까지 살피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40일 동안 가나안 지역을 샅샅이 정탐한 정탐꾼들의 보고는 2가지였습니다(13:25~33).

열 두 명 중 열 명은 “아무리 그 땅이 기름진 축복의 땅일지라도 우리는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원주민은 그 신체가 큰 거인들이며 그들 모두 용사라는 것, 그들의 성읍이 견고하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갖지 못한 철로 된 무기를 가졌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므로 되지도 않는 싸움, 장대한 거인과 메뚜기의 싸움이 될 것이 뻔 하니, ‘차라리 애급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탐꾼 중 두 명, 즉 여호수아와 갈렙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빨리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13:30, 개역)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원주민들의 용모와 군사력 등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들 역시 가나안 주민의 견고한 성읍, 거인 용사들, 그리고 뛰어난 무기 등을 보았습니다. 

성도에게도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안목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오직 믿음으로” 하면서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고, 또 그런 스타일의 사람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의 주변에서 ‘믿음으로 한 번 해보자’면서 어떤 사람들이 이것저것 따져보며 계산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즉 不信仰으로 여기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안목으로 제대로 판단한 것에 근거해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이었지요.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이 말은 객관적인 현실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바보입니까? 그들에게 보는 눈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들 역시 객관적으로 현실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만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객관성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가나안 원주민이 강하고, 또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어도, 그들보다 더 강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으면서 절망 가운데 탄식하고 불평하는 무리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서 외쳤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렸으므로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가자. 그러면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에게 현실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서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13:30)”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選擇했습니까? 그들은 첫 번째 의견을 선택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선조들의 생애와 신앙의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땅이지만, 자신들로서는 역부족이므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객관적인 정보에 따른 판단으로서 책잡을 것이 별로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이스라엘보다 더 발달한 문명의 영향으로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또 難攻不落의 성을 지어놓고 거주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남 밑에서 종노릇하던 떠돌이 이스라엘이 맞서기에는 분명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고 돌아가자고 한 것은 잘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계속 가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니 ‘우선멈춤’을 함으로서 그 위험을 잘 피한 것으로 보였지요.

그런데,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10명의 정탐꾼들과 백성들이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으로 가나안 원주민들과 맞붙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자신들이 너무나 莫强하고 위협적인 존재라서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원주민들이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던 성, 우리의 집, 우리의 전 재산을 다 드릴 테니 받아주십시오’라고 해 줄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또 혹시,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약하고 어리석어 아주 쉽고도 간단하게 그들의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상대방이 너무 강하니까 이렇게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라’ 하신 곳을 목적지로 하여,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멈추어 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약속의 말씀보다 길과 길의 형편과 상대방을 먼저 보고 그것으로 모든 결정을 내려버린 것, 이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2) 유턴(U-turn)

이스라엘은 멈추어 선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본문 1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열 명의 정탐꾼에게서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것이 후회 되고, 광야에서 죽도록 고생한 것이 아까워 죽겠고, 저 좋은 가나안 땅을 눈으로만 보고 그냥 돌아가자니 아쉽고 해서 통곡을 한 것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2). “원망했다”는 말은 ‘투숙하다, 밤을 지내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불평하다, 투덜거리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길을 걷는 나그네가 밤에 잠자리에서 편히 쉬어야 다음날 여행이 편할 텐데 그 밤을 불평과 원망으로 지새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음 길이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원망했다”는 말은 ‘밤새도록 불평했다’, ‘끝도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늘어놓은 불평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애급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당신과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가나안인들의 잔인한 칼에 맞아 죽게 하려는가?’ 그들이 내린 결론은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죽음의 땅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저주와 고통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어서 빨리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제안을 합니다. 4절,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급으로 돌아가자.” 모세가 아닌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서 그로 하여금 애급으로 복귀하는 일을 지휘하게 하자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저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小題目을 “유턴”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냥 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네비게이션에는 ‘그대로 계속, 쭈욱 가라’는 싸인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멈추라 하실 때까지 전진하면 됩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왔습니다. 어디 자기 힘으로 왔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에게 자기 힘이나 능력이나 무기가 있기는 했습니까? 오직 하나님 믿고 온 길,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하던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상대를 보고 자신의 부족을 보아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못 온 길은 빨리 유턴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계적인 說敎者인 ‘찰스 스탠리’의 <믿음으로 유턴을 하라>는 책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친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신나게 도로를 달리다가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한 바로 그때가 ‘유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찰스 스탠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턴을 기다리고 계시다고 강조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듯,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유턴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온 아들을 혼내지 않으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실을 기뻐하시고 두 팔 벌려 환영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잘못된 것에서 돌아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가던 길에서 유턴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이 고생하고, 가족들 힘들게 하고, 후손들에게는 최악의 것을 물려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유턴함으로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자고 부득부득 고집을 부린 결과, 그들은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뒤로 돌아!”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애급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까? 결국 그 지겨운 광야를 이때로부터 38년 동안 맴도는 인생,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인생길의 목표와 방향과 가고 섬을 결정할 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뜻’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것을 그대로 따라 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길의 현실을 잘 보되,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공적인 인생길을 가는 비결입니다. 

3. 성공적인 인생길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을 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크고 작은 결정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 감정, 계획, 인생 모두를 다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 분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일을 다음과 같이 각색을 했습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홍해 바닷가, 그곳에 수많은 사람이 텐트를 쳤습니다. 어른 남자만도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가축 떼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조직이 채 정비되지 못해서 꽤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는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것 때문에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지만, 검푸른 홍해 바닷물과 뒤따라 온 애급 군대를 바라보면서 ‘집 떠난’ 현실과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주 이상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절, 옛 <개역 성경>에 보면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 하셨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야 합니다. 북쪽의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되는데, 이스라엘은 그 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만,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야만 가나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면 홍해의 서쪽, 그러니까 애급 지역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애급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쳐서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하셨습니다. 

이 “돌쳐서”라는 말은 우리 국어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얼마나 실감나는 말인지 모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되어 있는데요. 아무튼 이 말은 수에즈만을 끼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입니다. 밑으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갈수록 바다는 더 넓어집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리로 가라고 하시는지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고, 모세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막다른 길로, 더 어렵고 힘든 길로 몰아넣었을까요? 왜요?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길의 형편이나 모양이나 장애물이나 적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려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러 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여러분의 인생길 역시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때때로 험준한 굴곡의 길, 눈물의 길,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를 만나기도 하고, 철통같은 여리고 성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은 상황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넘실거리는 홍해가 앞을 가로 막는 것 같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선배들이 ‘불 시험’, ‘물 시험’, ‘사자굴’ 같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그것을 이기고 승리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히11). 그러므로 아무리 거대한 아낙 자손 같은 문제나,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지라도, 그 문제와 현실만 바라보면서 그것에 눌리고, 또 자신의 모습을 메뚜기로 그리는 자리에는 결코 서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삶은 ‘지금 당한 현실과 앞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고 낙심하여 주저앉을 것이냐’, 아니면 ‘현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냐?’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런 선택을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아닌 현실과 앞에 있는 것들만 보다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멈추어 서게 된다는 것, 그러다가 광야길을 돌고 돈 이스라엘처럼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밖에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길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셨습니까? 다른 조건은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습니다. 차이는 ‘하나님과 그 말씀과 능력을 의지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현실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잘 보십시오. ‘장애물이다’, ‘낭떠러지다’ 하는 도로표지판을 잘 보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과 말씀의 표지판을 더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길을 갈 때, 즉 하나님과 말씀과 주의 능력을 의지하여 인생길을 갈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복의 땅,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과 같은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 복을 인생길에서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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