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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듣고 행하라!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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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고 행하라!  (약 1:19~27)

 
종합 병원 중환자실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있습니다.
옆에서 그 환자들을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매우 안타깝게 마련입니다. 그 환자들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식물 인간일 것입니다.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증상에 따라서 치료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면 거의 속수무책입니다. 다만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손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숨을 쉬는 것조차 보조 장치에 의존해야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식물 인간이 되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매우 단순한 말씀 같지만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연약한 이웃의 짐을 즐거운 마음으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겸손히 남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새 계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 자체만으로 만족할 것 같으면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의식 불명 상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믿음에서 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착해도 그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행악자일 것입니다. 평생 나쁜 짓만 하던 그 행악자가 구원받고 낙원을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뭘 했습니까? 그저 예수를 믿고 도움을 구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성이 아니라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어지는 과제는 구속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를 받았으면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우리도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동료의 일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신앙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에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식물 인간 상태에 빠진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값없이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도 그 은혜에 대한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행동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은 단순히 율법의 준수를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행동을 그쳐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 기자는 아주 구체적인 예를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내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성내는 것은 극히 작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큰 소리를 내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성내는 것에서 많은 죄가 비롯된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미워하고 비판하며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며 심하면 원수가 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폭력적인 힘까지 가세하게 되면 싸움과 전쟁,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일찍이 모세는 애굽에서 자기 형제 히브리 사람을 치는 애굽 사람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십 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며 그는 정말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향해서 화를 내실 때에도 그는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실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한 순간의 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20장 10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가 혈기를 부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결국 모세는 그 일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모든 하나님의 의는 외면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우리가 말을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셨습니다. 밭을 먼저 갈아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좋은 씨앗을 길가나 돌밭에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시를 제거하고 돌을 제거하고 흙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 씨를 뿌립니다. 잘 듣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다 뽑아내야 합니다. 만물보다 심하게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옛날 다윗도 자기 안에 있는 죄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먼저 교만, 불순종, 그리고 더러운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그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로 외식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나 실수를 들추어내고 비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말이 많은 사람은 실제로는 경건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가 시험에 빠지는 주된 원인도 말 때문입니다.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경건은 헛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언제나 축복의 말, 찬양의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의 깨끗함을 지키려고 강도 만난 자를 멀리했습니다. 오늘 교회가 그와 같은 형식적인 경건에 빠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은 조금은 더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그 더러움에까지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올바른 믿음은 항상 우리에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거울을 본 사람이 돌아서서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교훈은 우리의 행동과 직결된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도 해야 합니다. 봉사도 해야 합니다. 섬기는 것도 하는 것이며 화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행함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행동으로 나타내신 사건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는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대야를 들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고백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발을 씻어 주는 행동을 요구하셨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그런 비판들을 종합해 볼 것 같으면 대체로 실천 없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랑이 없습니다. 정의를 외치면서도 정의가 실종된 상태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이 터무니없다는 비판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사랑과 정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지적이 대부분입니다.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사람들은 실망하여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천성적인 성격은 바꿀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을 것 같으면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성격, 가치관, 인생관, 생의 목표 등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내면적인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그 행동이 어린 아이 때와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변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여전히 과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셨지만 주님은 여전히 손님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듣기는 속히 하고 있습니까? 말하기는 더디 하고 있습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들었으면 또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새 계명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바에 따라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아와 과부를 어려울 때 구체적으로 돌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더럽고 추한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을 뿐 아니라 주님의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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