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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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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 (마 20:1~16)

 
오늘 이 아침에 부드러운 눈으로 세상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부드러운 눈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 모질고, 다 못되고,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훨씬 더 좋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는 것만큼만 세상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과 비극 속에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인생이란 슬픈 것이다."라는 말할 것입니다.  반면에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은 "인생은 즐거운 삶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을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감화와 감동으로 부드럽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대한 바다에 난파하여 표류하는 배를 본 적이 있습니까?  왜 표류합니까?  엔진이 고장나서 그렇습니다.  엔진만 고장 나지 않으면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여호와의 신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십시오.  내가 여호와의 신으로 다시 내 삶에 권능의 채움을 받으리라!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자기 파멸의 씨앗을 거룩한 능력으로 좇아버리십시오.  다 태워 버리십시오.  인생은 표류하는 난파선이 아닙니다.  목적 없이 떠다니는 뗏목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깊은 산골을 헤치고 나가는 생명이 있는 물고기를 보십시오.  도도하게 역류해서 올라갑니다.  힘차게 솟구치며 올라갑니다.  방향 감각만 살아나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자기 삶에 대한 사명화된 목적의식만 부여되어 있으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언제나 불확실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상황이 불완전 하다든가, 내 현실이 불완전 하다든가, 내가 정확하지 못한 사람이라든가 그런 것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완벽한 조건을 갖추기를 기대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완벽주의의 노예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완벽주의는 내 삶에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자기 교만입니다.  완벽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한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 증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전국민의 98%가 이슬람교도들인 터키는 초대교회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터키의 갑바도기아라는 지역에는 기독교 역사상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거대한 규모의 암굴 공동체와 지하도시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지난 A.D 70년 이후부터 약 3세기까지 교회가 박해를 당하던 그 시대에 신앙의 선배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와서 수많은 암굴마다 교회를 만들고 거기에서 피난처 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한 마디로 과거의 신앙의 선배들이 어떤 고난을 감내하며 믿음의 삶을 살았는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현장이라고 합니다.
 
작은 암굴마다 하나의 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암굴 교회들을 모두 합하면 갑바도기아 지역에만 무려 3,000여 개의 암굴교회들의 족적들이 남아 있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현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곳에 서면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안이하고 나태한 자세인가를 반성하고 자책하게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지하도시 데린큐유에는 무려 지하 120m, 약 8층까지의 땅속으로 내려가면 그곳에 십자가 형태의 지하 예배실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고난을 감내해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현재의 삶에서 이처럼 극한 박해와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그들이 나중에 웃는 자가 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에 주님 앞에서, 그리고 후손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복음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그 고통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물론 1세기의 모든 성도들이 예외 없이 다 그런 승리로운 믿음의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박해 때에 교회에는 많은 배교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로마 황제에게 성서를 반납하면서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가 일제식민지 시대에 신사참배를 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도 적지 않는 사람들의 배도와 변절과 타락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1장 19절과 20절에 보면,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여기에 변절자들의 이름을 지적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는 데마라는 제자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오늘의 편안함을 위해서 내일의 역사를 포기했습니다.  오늘의 안락함을 위해서 영원한 영광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오고 오는 역사 앞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자들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은 비단 후메내오나 알렉산더나 혹은 데마의 비극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들은 먼저 부르심을 받았지만 결국 나중 된 자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출발을 했지만 나중에 부끄러운 자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인생으로 출발을 했지만 나중에는 영광스러운 마무리를 한 신앙의 선배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을 가리켜서 일반적으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 속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게 됩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왜 나중이 되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온 자들이 나중이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흥정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말씀하시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마태복음 19장 27절 이하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입니다.

어느 날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생애를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제자들 가운데 으뜸가는 제자인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를 따라갔는데, 그러면 무엇을 대가로 얻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give and take 할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물론 영생의 약속을 알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영생의 약속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만나고 자신의 인생관이 변했습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생관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만으로도 예수를 따라가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지금 자기 피부에 와 닿는 손익계산서 상의 플러스를 주님 앞에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일 성수를 하잖아요.  시간을 드리잖아요.  헌금도 하잖아요.  물질로 봉사하잖아요.  그리고 주님, 제가 주방에서 땀을 흘리면서 봉사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교사로서, 성가대원으로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고 있잖아요.  제가 이만큼 give 했다면 주님께서도 저로 하여금 take 하는 것이 있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자식이 잘 되게 해 주시든지, 증권이 잘 되든지, 아니면 아파트 값이라도 오르든지, 그렇지 않으면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되게 하시든지….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흥정이 바로 베드로가 직면해 있었던 신앙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본전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처해 있었던 신앙의 위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베드로의 위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19장 29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나 때문에, 예수 때문에 너희가 희생하고, 아픔을 당하고, 무엇인가 손해를 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여러 배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영생을 상속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나 지금은 잘못된 동기와 의식에 지배를 받으며 나를 따라오고 있는 너, 베드로!  그래서 너는 먼저 부르심을 받고도 이제 나중 될 자리에 서 있는 거야.  이것이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이런 흥정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마태복음 19장의 설명만으로 베드로가 충분히 설득 당하지 않았다고 주님이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20장에서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0장 3절을 다같이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여기 포도원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들, 그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제 삼시에 나가 보니 그들이 장터에서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본문 6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여기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는 그들이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놀고 있는 사람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상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우리도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어보십시다.  "어디서 놀다 오셨습니까?"  자세히 관상을 보면 놀다 온 흔적이 보이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쳐다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었더라면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낭비하면서 의미 없는 인생의 걸음을 옮기다가 그냥 없어져버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그 분 앞에 설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만해도 감사한데 거기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일꾼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은총의 의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에 대한 그 은혜의 감격을 상실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를 지배하는 의식이 바로 흥정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흥정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그 순간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만큼 충성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순간부터 여러분의 신앙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먼저 부르심을 받고도 나중 될 수밖에 없는 위기의 자리에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고도 나중 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를 포도원의 한 가족으로 받아주시고, 일하게 하시고….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원망하고 있습니다.
 
왜 원망하고 있습니까?
본문 10절의 말씀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본문 3절에 보면 여기에 먼저 온 자들은 제 삼시에 온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6시간을 더하니까 오전 9시에 온 사람들입니다.  5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제 6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제 9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후 3시입니다.  이렇게 일찍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제 11시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5시입니다.  그런데 이 오후 5시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마지막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한 일꾼이 하루 일하고 보편적으로 받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런데 9시에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 12시부터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 11시,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비교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비교하기 전까지는 행복했습니다.  저 분이 나를 불러주셨다.  나도 이제 포도원에서 일하는 멋진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비교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 감동과 감격이 떠납니다.  은혜가 떠납니다.  그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이것이 인생살이가 아닙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행복하고 감동과 감사의 삶이었던 우리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이웃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비교의식이 지나치면 질투가 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계급의식을 만듭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삶에 대한 기쁨과 감동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비교의식에 대한 성경적인 유일한 처방은 창조의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창조의식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들 다 다르게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기질도 다르고, 은사도 다릅니다.  다 다릅니다.  다른 은사를 가지고 나만의 독특한 소명을 받아 나만의 인생을 살도록 하나님이 다르게 지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옆에 사람을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옆에 사람을 모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을 가지고 내 인생의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 똑같아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 한국인들의 불행은 획일화에 대한 모방의 비극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명품을 사면 나도 그렇게 명품을 사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얼굴이 반질반질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천국에 도착하면 바로 데리고 오지 않고 대기실에 한동안 둔다고 합니다.  그 얼굴이 오리지널인지 아닌지.  성형수술을 하도 많이 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제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십시오.  당신의 방식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사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모습 그대로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비교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질투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만 허락한 그 은사를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에 감사하고 즐거워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이 내 곁에 머물거든 하나님이 나의 축복으로 내 곁에 나와 다른 사람을 보내 준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그런데 이러한 감동을 상실하고 여러분이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나중 된 자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고도 나중 될 수 있는 이유 세 번째는,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여기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것을 기대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더 받을 만큼 나는 일을 더 많이 했다는 겁니다.  나는 더 공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대접을 더 많이 받고, 더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의식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공로의식에 포로가 되면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섭섭귀신입니다.  내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공로를 세웠는데 나를 알아주지 않아.  내가 직장에서 얼마나 일을 했는데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아.  내가 이 교회에서 이만큼 봉사했으면 이제는 인정을 받아야지.  그런데 인정하지 않아.  섭섭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섬김의 감동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의 감격을 상실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이런 공로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출발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자기가 기도하는 기도처에 항상 자기가 목동 시절에 입었던 옷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자기의 출발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내가 목동이었다는 것을, 내가 그때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내가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지나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적인 근거를 보여드릴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내 집이 어떤 집안이었습니까?  오늘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것을 제가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출발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출발점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무엇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놀고 있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도 이렇게 살다가 인생을 낭비해 버리고 그냥 저 어둠 속으로 끌려갈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은혜로 부르시고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일꾼까지 삼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은혜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갚을 수 없는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저는 이 빚진 자의 의식이야말로 우리 속에 있는 공로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라고 믿습니다.  빚진 자의 의식.  바울이 로마서 1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다같이 따라 하십니다.  "나는 빚진 자다"  옆 사람에게 말합니다.
"저는 빚진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빚을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앞서서 고난을 받고 희생을 당하고 피를 뿌리고 그래서 오늘날 나에게 찾아왔던 복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냥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빚지고 있습니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암울했던 조선 땅에, 희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던 그 절망의 땅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의 횃불을 들고 이 땅에 왔습니다.  더 좋은 자리, 더 편한 자리, 더 보장된 자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내 던지고 이 땅에 와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은 노랗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전혀 달랐던, 그래서 우리와는 동질성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우리와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고추장을 더 먹었습니다.  마늘을 더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만 나면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아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이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피 흘림의 순교와 섬김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진 자가 아니라 빚 받으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기도를 잘 들을 수 없는데, 과거에 제가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를 마무리했습니다.
"공로 없는 이 죄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혹은 어떤 분은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저는 이것이 성경적인 기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는 주님 앞에 설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조금 봉사를 했지만, 조금 헌신을 했지만 그것은 결코 공로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거룩한 피를 흘려주시고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앞서서 희생한 신앙의 많은 선배들에게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빚을 갚기 위하여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생애를 살아드려야 합니다.

서머나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캅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을 때 아주 심각한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가이사 황제를 주로 고백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당시 서머나에서 존경받는 늙은 감독이었던 폴리캅도 붙잡혀서 서머나의 총독 앞으로 끌려옵니다.  서머나의 총독은 폴리캅을 잘 알았습니다.  친구였습니다.  그를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내가 기꺼이 자네를 풀어주겠네"
그때 폴리캅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지난 86년간 그리스도를 섬겨왔습니다.  그 동안 내가 사랑하는 주님은 한 번도 나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내가 어찌 그분을 져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그를 고발했던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화형에 처하라."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작더미 위에 폴리캅을 세워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폴리캅은 조용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준비되었습니다.  당신들의 할 일을 하십시오.  내가 어찌 잠시 타다가 꺼질 불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의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폴리캅은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오 주님, 저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도 은혜인데, 저를 순교자의 반열에 세워주신 것은 웬 은혜입니까?  이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상하게 그를 에워싸던 불길이 그를 태우지 못하자 그 옆에 있던 형리 한 사람이 칼로 폴리캅을 찌르기 시작합니다.  붉은 피가 솟구치면서 폴리캅은 거기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명한 프랑스 화가인 레이몽 페레라는 사람이 폴리캅을 기념하는 교회의 천장에 폴리캅의 순교 장면을 그려놓았습니다.  장작더미 위에 폴리캅이 서 있고, 그 옆에 형리가 칼을 들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형리 바로 뒤에 그 그림을 그린 화가 자신의 그림을 화가가 그려놓았습니다.  두 손을 포승줄에 묶인 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의 뜻은 나에게도 이런 고난이 올 수도 있다는 그런 메시지도 있지만, 저분은 나를 대신해서 순교를 당하셨다, 내가 서야 할 저 자리에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그 고난을 당하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선배들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이 구원의 복음이 우리들에게 전달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값없는 구원이 전달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의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이 빚진 자의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결코 방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한평생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이 빚진 자의 의식이 떠나가는 그 순간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의 책망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 받은 자이며, 이 은혜에 빚을 지고 있는 자임을 깨닫고 하루 하루를 산다면 비록 내가 나중에 부름을 받아도 먼저 된 자로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보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그 시대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 시대 자신들의 최악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빚진 자로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지금 우리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먼저 된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빚진 자로서,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이 복음의 빚을 갚는 삶을 살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어영부영 안이하게 살다가 먼저 부름을 받고도 나중 된 자라는 부끄러움의 심판대 앞에 서시겠습니까?
이 후에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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