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를 변화시킨 복음 (롬 1:1~7)

  • 잡초 잡초
  • 558
  • 0

첨부 1


나를 변화시킨 복음 (롬 1:1~7)


아마존 밀림에 ‘바나와’라고 하는 부족을 섬기는 ‘강명관’ 선교사의 이야기가 요즘 다큐멘터리 영화 ‘소명’이라는 제목으로 시중에도 상영이 되어서 많은 분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끼치고 있습니다. 인기 있는 영화처럼 수백만이 관람하지는 않았지만 그 영화를 본 분들은 감동을 받고 호평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너무 좋은 영화이고, 큰 감동을 주는 영화라는 것입니다. 

‘강명관’ 선교사님은 원래 90년대 초에 외국어 고등학교의 잘 나가던 국어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2,3일을 가는, 브라질에서도 몇 시간을 들어가는, 전화도 없고, 길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문자도 없이 사는 부족 그 ‘바나와 부족’이 사는 마을. 그 곳의 이야기를 듣고 이 분이 소명감을 가지고 선교사가 되어서 그 부족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만들어 갑니다. 글로 쓸 수 있는 언어를 만들고, 성경 번역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면 그들은 ‘바나와 부족’의 말로 된 성경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참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 ‘바나와 부족’과 함께 사는 것은 보통 힘든 생활이 아닙니다. 보통 온도가 50도 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얼마나 덥습니까? 밀림 한 가운데라 독충이 많아서 모기약으로도 안 듣고 온 몸이 독충에 물린 자국입니다. 옷을 벗어보면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습니다. 독충에 물려 딱지가 다 앉았습니다. 사진기사가 들어갔는데 선교사님과 함께 저녁에 앉아서 긁는 게 일이었습니다.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곳은 농사도 못 짓고 하니 사냥을 해야 하는데, 야생 들쥐를 잡아서 먹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삶입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님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본인의 사명입니다. 거기서 일생을 바칠는지 글쎄 그것은 모르겠지만 그는 거기서 기쁘게 즐겁게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일들을 감당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그 복음이 이들도 변화시키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크리스찬투데이’ 신문을 봤더니 거기에 아프리카 가나에서 선교하는 ‘유 선교사’라고 하는 분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분이 거기서 신학교를 만들어서 20년 동안 200명의 신학생을 배출해서 그들이 목회를 잘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노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나의 북부 무슬림 지역 한 촌락으로 들어가 거기서 복음 전하다가 죽을 겁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복음 전하다가 뼈를 묻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일생을 복음 현장에서 수고한 선교사님이라면 고국에 돌아와서 쉴 수 있는 권리쯤은 있을 텐데 왜 그 권리를 포기할까? 과연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는 그가 얻을 수 있는 모든 특권과 권세도 포기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법정에 세우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길을 가다가 환한 광채 앞에 노출됩니다. 그 빛 앞에 실명하게 되고, 쓰러집니다. 그 때 그에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거기서 그의 일생이 바뀌어 졌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선지자가 와서 그를 위해서 안수 기도할 때 그의 실명되었던 눈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이방인들의 왕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을 위해서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노라.” 그의 일생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1차, 2차, 3차 여행을 통해서 수많은 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죽음의 위기도 수없이 넘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바나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시지요?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 그의 일생은 철저하게 복음에 매여 있고, 복음을 위해 살아갔던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특별히 로마서는 복음에 불타는 책입니다. 복음의 열정, 그리고 믿음의 비밀이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중에 오늘부터는 로마서를 가지고 여러분과 은혜를 나눠야겠다는 마음의 확신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 1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읽었습니다. 로마서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으라면 바로 로마서입니다. ‘스페너’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에 꽃혀 있는 다이아몬드와 같다.”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것이 로마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복음이 무엇이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고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공부하면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던 분들이 로마서를 읽으면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또 복음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읽고 변화 받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유명한 ‘어거스틴’, 그는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 여인들과 결혼하고 이혼했습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가 그 아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이 종교적으로 방황할 때 그의 아이들이 옆에서 떠들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소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책을 들어서 읽어라.”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보니 앞에 성경책이 있는데 펴서 읽었더니 그것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서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방탕한 ‘어거스틴’이 아니라 성자 ‘어거스틴’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그의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원래 가톨릭의 수도사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베드로 대성당의 수백 개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고행을 통해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무릎에서 피가 흐를 때 자기 죄가 용서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도 어느 날 자기 무릎에서 피가 나는 고통을 참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문득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래! 고행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거야’ 그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도 거듭남의 문제로 방황하며 고민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영국의 어느 거리를 거닐다가 문이 열려 있는 교회를 들어갔는데 마침 그 교회에 목사님이 안 계시고 한 평신도가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로마서 서문을 들을 때 그의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그는 거기서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훌륭한 목회자로 거듭나서 감리교를 세우게 되는 인물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도 이 로마서 주석을 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에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대전환을 일으킵니다. 신학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그것도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얻은 결론입니다. 로마서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로마서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의 삶에도 놀라운 은혜가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식었던 분들이 믿음의 열정이 회복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는 사실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자신이 로마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미 로마에는 로마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미 20년 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쇠약해졌습니다. 20년의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그 열정이 사라지고 열심이 식고 나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회복시켜줍니다. 우리도 정말 이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의 나태해진 믿음이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로마서 서문입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 빼고는 대게 편지입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서는 어디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까?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먼저 보낸 편지이고, 고린도후서는 나중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 편지이며,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렇듯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에는 다 수신자가 있고 발신자가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누구에게’가 등장합니다. 6절과 7절에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보낸 이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왜 바울이 종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종이라고 생각하는 분 있으십니까? 바울은 어찌 보면 자유인 중에 자유인입니다.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가말리엘이라는 아주 유명한 학파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더더욱 그는 가문이 좋습니다. 또한 누구나 부러워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 시민권하고 로마의 시민권은 비교가 안 됩니다. 얼마든지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자신을 노예라고, 종이라고 표현할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로마에는 한 6천 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로마인들 한 명 비율에 노예가 4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노예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노예라는 것은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당나귀하고 노예는 똑같이 취급받았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노예는 말을 하고, 당나귀는 말을 못한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고, 가져다 버릴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전에 노예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전쟁을 했는데 전쟁에서 패배하면 노예로 끌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일생을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또 구약의 율법에 보면 누군가에게 돈을 꾸어주고 그 돈을 꾸었다가 돈을 못 갚으면 그 돈 때문에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아니면 부모가 노예이면 자식도 노예가 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구약에서도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6년이 지나고 7년째에는 그 노예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그것을 안식년 제도라고 합니다. 안식년에는 자유를 선언합니다.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주인이 노예처럼 취급하지 않고, 때리고 박해하지 않고 자기 자식처럼 대우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7년째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지만 “주인님! 저는 안 나갈렵니다. 주인님과 평생 살렵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것을 확인하고 그의 귀에 구멍을 뚫어서 주인의 이름을 귀에 적어 놓습니다. 그럼 그는 영원히 주인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노예는 노예지만 행복한 노예입니다. 자원하는 노예입니다. 기쁘게 일하는 노예입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노예는 어찌 보면 이런 의미에서 자원하는 맘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란 자기 뜻이 없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합니다. 주인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노예는 가서 일하고 주인에게 돌아오면 쉴 새가 없습니다. 밥을 해서 주인을 대접해야 합니다. 할 일을 다 했을 뿐이고 그는 무익한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종은 권리도 없고, 자기주장도 없습니다. 또 자기 소유도 없습니다. 자기의 사유재산이 인정이 안 됩니다. 종의 것은 다 주인의 것이지 자기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다면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됩니다. 그는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내 의지가 없고 하나님의 의지만이 내게 있습니까?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누구의 종입니까? 아직도 내 의지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 의지,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종 된 모습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는 왜 종이 되었을까요?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살아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종 된 목적이 있습니다. 그냥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목적이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목적이 없습니다. “왜 사십니까?” “그럭저럭 죽지 못해 삽니다.” “굶어죽을 수 없어 그냥 삽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인생의 목적을 상실할 때 자살하게 됩니다. 인생에 꿈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죽으나 사나 남에게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손해 볼 사람도 기뻐할 사람도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못 느낄 때 사람들은 자살합니다. ‘최진실’씨가 죽었다고 따라 죽는 사람들은 다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최진실’씨가 살아야 같이 살아갈 할 이유가 있는데 ‘최진실’씨가 죽으니 같이 따라 죽는 것입니다.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인생의 목적을 둘 수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 인생의 목적을 거룩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적이 중요합니다.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자살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반대로 거지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가을이 오니 낙엽도 떨어지고 인생이 너무 비관스러워. 나 그만 죽으련다.’ 이런 거지는 아직 없습니다. 거지는 죽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은 밥 얻어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느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까? 오늘은 어떻게 굶지 않고 살까?’ 인생의 목적이 있으니 절대 죽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좋은 차타고 다니는 사람이 행복이 아닙니다. 큰 집에 산다고 행복이 아니고, 돈이 많다고 행복이 아니고, 인생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의 푯대가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사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죽어도 살아도 우리는 주를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함을 입었다.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2절을 읽어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복음은 이미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하면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굿 뉴스’, ‘가스펠’, 헬라어로 말하면 ‘유앙겔리온(euaggelion)’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종살이 합니다. 그러다가 고레스 왕이 올라와서 그들을 다 해방시킵니다. 그때 그들이 종 된 생활에서 해방되었다고 전한 말이 복음입니다. 우리 민족이 해방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자유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일까요? 그분이 와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쁜 소식이 되셨을까요? 본문 3,4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메시아사상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분은 바로 다윗과 같은 위대한 분일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오실 것이다.’ 그래서 3절 말씀에 보니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다윗의 족보에서, 다윗의 씨 중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오셨습니다. 육적으로는, 인간적으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오셨습니다.

또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라고 나옵니다. 성결의 영은 성령입니다. 시편 16편에 보면 다윗의 예언에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땅에 묻히지만 썩지 않고 다시 살아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은 다윗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는 땅에 묻히지 아니하시고, 썩지 아니하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온 만방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증거입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오시고, 신성으로는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습니다. 그 요건을 만족시킨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꿔 말하면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 저주 받고 사탄의 종 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가 다 용서받고, 모든 얽맴에서 자유함받고, 우리는 영원히 사는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가 용서받고, 죽음이 떠나가고, 저주가 해결되고, 영원한 생명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 오셨고, 그 분이 복음이시고, 그분이 행하신 일이 바로 복음의 역사인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가? 그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5절을 읽어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우리가 은혜를 받았고,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함께 같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툭하면 “바울이 무슨 사도냐?” 바울은 12사도 안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다. 그렇기 때문이 나는 사도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도로 세워주셨다.”고 그는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도의 직분을 받는 이유는 그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방인에게 전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라는 말은 ‘파라클레이토스’ 보냄 받은 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은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보냄 받은 사람들은 보내는 분의 얼굴을 뵙고 떠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사도로서의 사명을 주어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다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사명자입니다. 바꿔 말하면 대사입니다. 주미 대사는 미국에 가서 한국을 대표하라고 대통령이 보낸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바로 이 땅에 사명을 가지고 부름 받은 사람들,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명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간증해서 그들이 그 복음을 믿고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고, 복음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레오나드 스위트’ 라는 분은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복음의 능력 안에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제 새로운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부름 받았고, 어찌 보면 복음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보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소유격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부르심을 받아서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인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입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때가 되어 불러주시고, 우리를 성도로 세워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시고, 부름 받은 사도로써, 부름 받은 종으로써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보니 이런 귀한 간증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그분이 연말에 대검찰청에 신우회 기도회가 있어 가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훌륭한 목사님의 이야기인데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검찰청장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아침에 출근하면 먼저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검찰청장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답니다.” 목사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이분이 믿음이 참 좋은 분이구나’ 검찰청장쯤 되면 좀 뻐기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고, 권세가 있으니 얼마든지 휘두르고 싶을 만도 한데,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검찰청장이 되고 싶다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식사하시던 인천지검장이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이제 기독교 교도소가 생기는데 그 교도소가 생기면 제가 초대 교도소 소장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고 또 놀랐습니다. ‘세상에 인천지검장이 높지 그까짓 교소도장이 뭐가 높다고…….’ 자기는 교도소 소장이 되어서 그곳에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인천지검장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그의 삶에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음이 분명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처럼 우리도 이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복음을 위해서 내 삶을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아름다운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