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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밤중에 찾아온 벗 (눅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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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찾아온 벗 (눅 11:5~8)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예의 바르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예의가 바르십니다.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들어가도 되겠니?” 만약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리지 않으면 예수님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오실 능력이 없습니까? 권리가 없습니까?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충분히 들어오실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허락 없이는 주님은 들어가시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례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는 마음이 있어도 예수님은 그 마음을 강제로 어떻게 하시지 못합니다. 유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유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시며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현장에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막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아는 야곱의 이기적인 마음을 주님은 어떻게 하지 못하십니다. 주님은 야곱이 마음을 고치기까지 2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목이 곧고 배신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회개를 요청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떠나려고 하는 둘째 아들 탕자를 아무 말 없이 보내는 그 아버지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재산도 권력도 있고 둘째의 성격과 어떻게 될 것인지도 잘 알지만 탕자를 떠나도록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의 결정과 판단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가장 크고 어려운 일을 이루셨으면 사람들에게 믿음 또한 주셔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도록 하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되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길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이란 행위를 통해서 고백되는 그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예의바르시다면 그의 자녀 된 우리들도 마땅히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예의가 발라야 할 것입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권리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는데 자신이 신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나 되는 것 마냥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고 그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가 인간 부모와 그 자녀의 차이만큼 크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를 향해서도, 또 어떤 사람을 향해서도 무례하게 우리 주장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뻔뻔한 인간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려는 초점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의를 다하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 또한 하나님께 예의를 다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라, 법을 비켜라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배고프면 담을 넘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예의를 다하고 싶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성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유혹이나 욕심이나 연약함 앞에 하나님을 배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의를 지키다 실패한 사람의 경우를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 이하의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맏아들은 “네,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둘째는 아버지의 부탁에 “싫습니다.” 하고는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겠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큰 아들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었습니다. 연약함 때문입니다. 중간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큰 아들의 경우는 하나님께 예의를 바치려는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지키려 하였지만 못 지키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의를 지킬 수 없습니다. 예의를 지키려다가는 유다처럼 됩니다. 유다의 자살을 변명해주자면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 행한 무례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지요. 유다를 변호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는가를 저는 질문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예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뻔뻔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뻔뻔한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한밤중에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중동지방은 낮이 뜨겁기 때문에 서늘한 저녁 무렵에 활동을 주로 합니다. 그러니 여행을 하던 사람이 한밤중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녁을 먹고 난 후기 때문에 대접할 음식이 없습니다. 중동지방은 손님 대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손님 대접하는 것은 자기 체면이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딸을 대신 내어놓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문헌에서는 손님접대의 의무기간까지 밝혀놓기도 합니다.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이 먹은 음식이 다 소화되어 소금기가 사라질 때까지 그를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만큼 철저합니다.

그러니 자기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이 없다는 것은 이만저만 실례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매우 다급한 처지에 몰렸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자기 친구 집을 찾아갑니다. 찾아가서는 한 끼 식사분에 해당하는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시각은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입니다. 옛날에는 전기도 없기 때문에 저녁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집이라고 해야 단칸방입니다. 온 식구가 한자리에 누워 잠을 잡니다. 문에는 빗장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웃 친구가 와서 떡덩이를 달라고 하니 여간 귀찮고 곤혹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곤히 자고 있는데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등불을 찾아 켜야 하고, 떡을 찾고 문을 여는 소리에 온 식구가 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줄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친구기 때문이 아니라 밤중에 찾아와서 간청하고 있는데 몰인정하게 돌려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례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주지 않으면 더 시끄럽게 할 것입니다. 8절에 그 ‘강청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강청하다’는 단어는 원래 ‘부끄러움을 모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뻔뻔함을 인하여 떡을 내어준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예뻐서가 아니라 시끄러워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뻔뻔해야 합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보통 뻔뻔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가 저질렀던 죄악들을 생각한다면 언감생심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마치 세리처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뻔뻔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뻔뻔함의 대표적인 인물이 저는 다윗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또 우리아를 살인교사 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의 죄에 비하면 사울이 저질렀던 잘못은 그리 큰 잘못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은 기껏해야 사무엘 대신 자기가 대신 제사를 드리려했고, 다 진멸하라는 것 중 좋은 일부를 빼돌리는 도적질을 행했을 뿐입니다. 

다윗처럼 사람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다윗은 인정을 받고 사울은 버림을 받았습니까? 다윗의 뻔뻔함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짓고는 곧 돌이켜 회개를 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의를 지키려는 사람은 죄를 짓는 순간 부끄러워 멀리 달아나고 그래서 더욱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다윗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았습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잘못을 하면 오히려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고 온갖 아양을 떨면서 부모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자녀가 있습니다. 그러면 백이면 백, 부모는 용서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서운했던 관계도 곧 풀어지고 맙니다. 반면에 좀 답답한 자식이 있습니다. 잘못을 범했다고 해서 가출하거나 멀리 달아나 버리는 자식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실수라도 감싸 안는 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위대함은 그가 뻔뻔스럽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강탈하다시피 가지고 떠났고, 그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린 탕자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뻔뻔하지만 현명한 결단입니다. 그 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를 믿는 데는 뻔뻔함이 필요합니다. 죄 많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아버지가 싫다고 떠나온 자식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아닙니다. 돌아가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분은 재판관이나 엄격한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쟁터에서 다리 한 쪽을 잃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장애의 몸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차마 그 연인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감춘 채 헤어지자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둘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후에 그 옛 연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련이 남아 있던 이 사람은 먼발치서나마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결혼식장에 갔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연인의 신랑은 두 다리를 잃고 휠체어를 탄 채 입장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더한 불구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고 체면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 힘든 사람들은 자기 체면과 자기 의가 강한 사람들입니다. 알량한 자존심을 가지고 버팁니다. 그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버리고 오세요. 구원받는 게 문제지 체면이 무슨 소용입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면 주님께서는 그 넓은 품으로 안아주실 것입니다.    

강청하는 기도 

이 비유 말씀은 기도와 관련된 비유입니다. 그 바로 앞 1-4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비유 바로 다음 9절 이하에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 지 보여주는 교교훈이라 할 것입니다. 

기도란 밤중에 떡덩이를 구해야 하는 것과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어디로 갑니까? 막막합니다. 지난 휴가 때 강원도의 한 휴양림으로 피서를 갔습니다. 동해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늦게 이 휴양림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차의 기름이 좀 모자라 보였지만 좀 더 가다가 주유소가 있으면 넣겠다고 하고는 그냥 달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주유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다. 빨간불이 들어와도 얼마쯤은 더 갈 수는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주유소가 곧 나오겠지 하면서 달렸습니다. 그러나 주유소는 나오지 않고 더 깊은 산중으로만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태백산맥을 넘어가야 하는 길이었고 주변은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기만 했습니다. 빨간불이 들어온 채로 너무 오래 달렸고 이제는 되돌아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의 막막함이란.......

기도는 그런 막막함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면 자기 힘으로 하면 됩니다. 기도는 그럴 수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막막하십니까? 그러면 기도할 때입니다. 자기 힘으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힘을 간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언제까지 두드립니까?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되 좀 뻔뻔하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곤히 자고 있는 이웃집 문을 두드려야 하는 것과 같은 무례한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 잠들어 있는 이웃집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잠들어 있는 하나님을 깨워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일부러 잠든 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소원이 얼마나 강렬한지 테스트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릇을 다지는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모르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지조차 불분명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잠든 채 하심으로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례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곤히 자던 사람을 깨워 떡덩이를 달라고하는 것은 뻔뻔하고 무례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를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도는 마치 거지가 먹을 것을 달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지가 체면 차립니까? 거지는 무례해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잔치 집에 가서 행패 부리듯 가야 사람들은 더럽고 귀찮아서라도 먹을 것을 줍니다.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선 과부처럼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지만 과부가 귀찮게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처럼 극단적인 비유들을 들어가며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치 이분을 엄한 주인처럼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차마 못나가고 의인들은 점잖게 고상한 기도만 하려고 합니다.

기도는 어린아이처럼 하는 것입니다. 어 아이가 아버지의 형편이나 체면 생각하나요? 그냥 달라고 떼쓰는 것이 자녀입니다. 그러면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큰 애에게 핸드폰을 사주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우리 아이가 최소한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기계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들의 판단일 뿐이고 이제는 청소년들에게는 핸드폰이 필수적인 의사소통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전교에서 핸드폰이 없는 아이는 아마 손 꼽을 정도였는 데 그 중에 우리 아이가 들어갔으니 얼마나 의기소침했겠습니까?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자기 엄마의 핸드폰을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결국 핸드폰을 사주고 말았습니다. 강청해서 얻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좀 뻔뻔스럽게 자신의 필요를 요구하십시오. 대표적인 예로 저는 야곱의 기도를 들고 싶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달아나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드린 야곱의 기도를 한 번 보십시오. 창세기 28장 20절 이하입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조건부 기도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나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때 십일조도 드리겠다는 매우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무례한 기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무례하다 여기시지 않고 야곱의 기도에 다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귀찮게 하는 자가 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 분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하나님의 뜻을 간구해야 되지 않느냐? 하며 주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으로 우리 기도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하는 자기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는 기도로 마쳤습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자기 소원을 과감하게 주님께 아뢰십시오. 뻔뻔하게 아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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