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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질수 있나 (막 8: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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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질수 있나 (막 8:33~39)


현재 세계적으로 큰 이슈중의 하나는 사형제도입니다.  사형(死刑)은 범죄자의 생명을 임의로 박탈하
여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형벌로서 생명형(生命刑), 혹은 극형(極刑)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인식의 전환, 그리고 민주화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사형제도의 폐지는 끊임
없이 논쟁이 되었습니다.  

최초로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사람은 근대 형법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의 베카리아라는 학자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61년 국제엠네스티(국제사면 위원회)라는 기구가 조직되면서부터입니다.  이들은 1977년 12월 사형에 무조건 반대한다는 ‘스톡홀름선언’을 발표하면서 사형폐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16개국이 서명하였지만 지금은 120개가 넘는 나라가 사형제 완전 폐지 혹은 실질적으로 폐지한 국가가 생겼습니다.  대한민국도 사형폐지에 관한논의가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폐지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1997년 23명이 처형된 이래 지금까지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보통 10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사형폐지국가로 분류합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형은 보통 ‘교수형(絞首刑)’으로 집행됩니다.  목을 메달아 죽이는 방법입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보는 것인데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나라들이 취하고 있습니다.  북한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는 ‘총살형(銃殺刑)’으로 집행합니다.  우리나라도 군인의 경우는 총살형으로 집행합니
다.  

미국도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인데 보통 ‘독극물주사’나 ‘전기사형’으로 집행합니다.  사우디를 비롯
한 중동의 국가들은 ‘참수형(斬首刑)’으로 처형합니다.  과거 유럽에서 단두대로 많이 행하였고,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참형’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불로 태워 죽이는 ‘화형’이 있었고, 할복(割腹)과 수족, 사지절단 등 극도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고 때론 공개로 처형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사형집행은 로마시대에 있었던 ‘십자가형(十字架刑)’이
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crucifixion’이라고 부릅니다.  십자가형은 죄수에게 심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가하며 서서히 죽이는 형벌입니다.  십자가형은 심한 채찍으로 시작이 됩니다.  당시 채찍은 끝에 납이
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을 붙여 놓은 것이기에 한번 맞으면 살점에 박히고, 빼면 살점이 함께 빠져나옵니
다.  

그렇게 맞은 몸에는 진물이 흐르며 염증이 생겨 불처럼 달구게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2미터 가량
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이동하게 합니다.  죄수가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물을 찾으면 쓸개탄 포도주
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겉과 속으로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에 있는 물과 피를 빼어 처
절한 고통을 맛보며 죽이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게다가 십자가형은 공개처형으로 이루어집니다.  죄
수는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발가벗긴 채 모든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집행이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형은 잔인한 형벌이어서 당시 내란이나 극한 죄인이 아닌 경우 실행하지 않았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죄수라도 십자가형은 피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잔인한 십자가형은 로마시대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AD 337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때에 폐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형으로 죽으셨습니다.  당시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함과 계략에 
의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 기독교역사와 오늘날까지 십자가
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형을 폐지하게 된 것
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이젠 참혹하거나 비참한 것이 아니라 자랑과 영광을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
다.  

당시 십자가는 분명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예수님이 이후 이젠 수치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
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
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대해 종종 십자가와 연관시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도 바로 그중의 하나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님을 어떻게 생
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
다.  

이 고백을 들은 뒤,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였고, 비로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
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과 무리들, 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
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
를 것이니라”  주님을 믿는 길,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지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아울러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을 2가지로 강조하셨습니다. 

첫째는 자기부인의 길입니다. 

34절에서 주님은 분명히 십자가의 길을 자기를 부인하는 길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자기부인
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정하거나 자기학대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자기, 자기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이란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부를 졸업하고 유학까지 하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그가 몽골선교사로 헌신한 뒤 그리스도인에게 자기부인의 삶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힘들어
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 가운데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막는 
영역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자. 

예수님의 발치에까지 가지고 나갔지만 더는 깨뜨리지 못한 채 여전히 두 손에 꽉 틀어쥐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저는 깨어지기 싫습니다. 상처받기 싫습니다. 내 체면도 좀 생각해주세요. 나도 영광을 같이 받고 싶습니다. 나도 적당히 같이 누리면 안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네 안에 네가 너무 크면 내가 들어갈 수 없단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주고 싶구나.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네 안에 네가 너무 커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네 것을 달라는 이유는 네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너를 온전케 하려면 네가 잡고 있는 그것을 깨뜨려야 한단다.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네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으니 줄 수 없는 거란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둘째는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
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님은 여기에서 목숨, 생명을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와 연관시켰습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임을 가르치신 것입
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직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한 알의 밀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으로 많
은 열매를 맺고,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기독교역사의 많은 성도들도 자기희생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
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눈물과 땀과 때론 피를 흘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안정을 누리지 못했습
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모진 박해와 시련을 당했습니
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그것은 분명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주님처럼 한 알의 밀알로 살았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질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자기부인의 삶이 있고, 자기희생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
고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높으면 남은 낮아집니다.  하지만 내가 낮아지면 많은 사람이 높아집
니다.  

내가 쥐고 있으면 남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려놓으면 많은 사람이 쥐게 됩니다.  
내가 살면 남은 죽습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믿음의 길은 결코 세상에서 영
화를 얻는 길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높아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주님은 그 길로 헌신을 촉구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사랑과 충성을 다짐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몸과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
을 드려 더 열정과 더 수고로 헌신해야 합니다.

성찬예식은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앞서간 성도들은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끊임없
이 그들도 십자가의 길을 다짐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잊어질만하고, 신앙이 식어질 때마다 성찬을 통
해 헌신과 결단을 다짐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십자가를 지겠느냐고 묻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앞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자기부인과 희생의 길을 다짐해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 앞에서 나를 내려놓고, 더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더 희생하여 주님처럼 많은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일에 헌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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