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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순종과 경건연습 (딤전 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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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순종과 경건연습 (딤전 6:3~10)


미국에 사는 어떤 분인데 남편이 죽고 오백만 불이나 되는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답니다. 이걸 어떡할까하고 전전긍긍하다가 목사님께 물었는데 목사님이 일부는 자선사업에 주고 일부는 선교 사업에 주고 나머지 얼마만 남겼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쓰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고 목사님이 잘 아는 장로님 변호사를 불러 의논하도록 했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가서 이렇게 저렇게 쓸 수 있도록 문서를 다 만들고 이제 사인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손을 벌벌 떨면서 사인을 못하더랍니다. 그 돈이 아까워서 못하겠다고 망설이더니 끝내 사인을 못하더랍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사인하는 것을 며칠 연기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그 부인이 죽어버렸습니다. 

참 기가 막힌 얘깁니다. 자기 돈도 아닌데 공짜로 물려받은 오백만 불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줘라.”는 성경말씀대로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자기도 얼마 남지 않은 생이면서 그렇게 목사님한테 물어서 좋은 조언을 받고서도 사인을 못하고 죽더라는 답답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모든 것에 근본적으로 욕망이라는 것에 인간이 매여서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철학자[루소]가 한 재미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10세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20세에는 연인에 움직이고, 30세에는 쾌락에 움직이고, 40세에는 야심에 움직이고, 50세에는 탐욕에 움직인다. 인간은 언제, 오직 예지만을 추구하게 될 것인가?”라는 말로 정말 추구해야 할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고 사는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정말 우리가 구해야 할 때에 구하지 못하고 필요할 때에 얻지 못하여 가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들이 온전하지 못하여 헛되이 살고 있다면 그 보다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까 경건의 비밀과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말씀에 대한 훈련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고 말씀 주도적으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말씀이 감화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회적이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 들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위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일회성의 반응입니다. 

요즈음은 사실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한참 우리나라 교회가 부흥할 시기에 교회마다 부흥회라는 것을 꼭 했습니다. 거의 필수적인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부흥회의 취지는 나태해져 가는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고 더 나은 결단으로 신앙생활 열심히 하자는 것이 취지입니다. 그래서 부흥회를 끝내고 나면 교회가 살아있는 것처럼 북적대고 여기저기서 결단이 일어나고 감사하는 마음들이 불일 듯 일어나서 헌금이 늘어나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흥회의 가장 단점이 무엇이냐 하면 그 효력이 거의 일회성이라는데 있습니다.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또 부흥회를 해야 되고 시들하면 또 해야 되고 그럽니다. 

사실은 부흥강사들의 교회부흥을 위한 이러한 수고는 인정해 주어야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자세가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부흥회란 평소에 담임교역자의 말씀으로 잘 양육 받고 꾸준한 훈련 위에 열정을 부어주는 것이거든요. 계속적으로 그 뜨거움을 안고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열심이 오래가지를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참 별식을 좋아합니다. 늘 먹는 음식에 대해서 실증을 잘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위 인기 있는 강사, 혹은 유명한 강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한판 해야 뭔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도 하고 그런답니다. 

여러분, 늘 부흥회를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결단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는 겁니까? 사실은 한 교회에 평생 뼈를 묻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려고 애쓰는 담임목사보다 그 교인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위대하다고 하는 부흥사들보다 오직 한 교회에서 20년, 30년 혹은 한 평생을 바친 그분들이 몇 배나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교인들 중에 가장 웃기는 교인은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말은 죽어도 안 듣고 남의 목사 말은 희한하게도 잘 듣는 교인입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담임목사가“순종하세요.”,“헌금생활 열심히 해야 복 받습니다.”하면‘지한테 잘하라고 하는구만!’하다가 무슨 계기가 있어서 다른 집회나 다른 목사가 말하면‘왜 우리 목사는 저런 말씀을 안 가르쳐 줄까?’합니다. 그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무슨 심보인지 참 궁금합니다. 그래서 남이 뭐라고 하더라도“교회 가서 우리 목사님께 말씀드려보고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하는 교인이 최고 교인입니다. 일회성의 충격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알고 나에게 맞는 말씀과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목회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누가 여러분 개인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물어오면 저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상태, 인품, 감사생활 등등...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그래서 계속적으로 말씀을 들어야하고 계속적으로 말씀에 감동을 받아야하고 말씀의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능력과 경건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 뿌리로부터 줄기로부터 진액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토록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데 만일에 이 말씀의 능력에서 이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본문 3절과 4절을 보면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첫 번째는 교만하여진다고 말합니다. 아마 사람이 제어하기 가장 힘든 일이 자기 마음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정선에서 멈추고 행하고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게 정말 힘이 듭니다. 때로는 정도가 지나쳐서 자신도 남도 낭패를 보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자기의 교만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남들이 볼 때도 신실한 신앙을 가졌고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커다란 저울을 보이면서 신실한 당신이 이제까지 행한 일을 저울에 달아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 주는 천사가 고마웠습니다. 잠시 후 그가 지금까지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낸 것의 무게를 달아보니 100kg이나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기쁘고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읽어주는 그 열심의 내역을 듣고는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내역은 이랬습니다. 

자기 이기심에서 행한 열심이 14kg요, 파당을 이루어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낸 열심이 15kg요, 자기의 명예를 얻어 보려고 낸 열심이 22kg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낸 열심이 23kg요, 하나님을 위해서 진심으로 봉사한 열심은 26kg뿐이었습니다. 이 꿈을 꾸고 난 다음에 그는 회개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비록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은 했지만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잘난 척했던 그 자부심이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제어해 주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말씀을 통하여 지금의 내 모습을 점검하고, 말씀을 통하여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지배할 때만 내가 바른 자리에 설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이 떠나면 어느 순간에 교만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이 교만해지면 그 결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무지하게 됩니다. 잘난 체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정말 똑똑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똑똑한 척 하는 사람이 교만합니다. 자기의 무식한 것을 감추려고 하다보니까 점점 강한 벽을 쌓아야하고 그것이 곧 교만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교만이 어디에서 옵니까? 지금의 자기모습보다 더 낫게 보이려고 할 때 나타나는 자기방어입니다.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인정하고 만족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식이 없으면서 지식 있게 보이려고 하고, 가진 것이 없으면서 많이 가진 척하고, 잘하지 못하면서 잘하는 척하는 거기에 교만이 있는 것이거든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은 이미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입니까? 교만한자에게 들려질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을 계속 보면 점점 변론과 언쟁이 생기고 마는 것입니다. 말이 많아집니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말이 많아집니다. 말이 많아지면 다투게 됩니다. 여기도 간섭, 저기도 간섭하다보니까 항상 언쟁합니다. 또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교만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문제는 좀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경건을 수단화하기까지 합니다. 5절에 보면“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한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말씀은 이미 떠나버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처럼 비참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세요. 경건의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풍요의식이 있어야 된다는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뿐만 아니라 넉넉하다’,‘이만하면 충분하다’,‘아, 이 얼마나 큰 복이냐?’라는 지족하는 마음입니다. 모자라는 부분을 억지로 채우려고 교만해지고, 부족한 부분을 과장하려고 교만해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미하엘 짐 페를]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1%만 가져도 99% 행복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100%를 가져야 행복하다고 다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1%만 가져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건강하면 행복하다는 절실함이 있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보세요. 1%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진리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과잉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나치는 게 문제입니다. 속도과잉, 과잉소비, 과잉노동, 과잉섭취,...결과는 불행입니다. 그런고로 소박한 것을 즐길 줄 아는 지혜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즉 스스로가 만족할 줄 아는 지족하는 마음이 경건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유에 대한 의식의 문제를 말합니다. 7절입니다.“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그랬습니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최고의 번성한 시기를 보낼 때 보석을 만드는 한 기술자를 불러놓고 좋은 반지를 하나 만들게 했답니다. 그리고 반지에 자기가 전쟁에 승리했을 때 교만하지 않고 어려운 일 당할 때 낙심하지 않도록 좌우명을 새기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기술자가 반지는 만들 수 있겠는데 좌우명은 도저히 만들 수가 없어서 어린 아이지만 솔로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한마디의 좌우명이 어떤 것이 있을까?”하고 물었더니 솔로몬이 한 마디 합니다. “잠시 후면 죽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그러더랍니다. 

여러분,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물질도 지나가는 것이요, 명예도 지나가는 것이요, 아름다움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마저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입니까? 그걸로 자랑거리를 삼아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나가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돈이 내손에 그냥 있는 줄로 알고, 젊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줄로 착각하고, 명예가 영원한 줄로 믿고 있는 어리석음이 경건을 방해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돈을 그냥 두고 죽는 게 너무 아까워서 관속이라도 넣어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누구를 믿고 돈을 관에 넣어 달라고 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변호사, 의사, 목사 이렇게 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10만 불씩 주면서 자기가 죽은 다음에 장례식에 와서 시체 앞에 인사할 때 그걸 관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각각 약속을 합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그 돈을 넣었냐고 서로 묻습니다. 목사님이 먼저 말합니다.“그래도 십일조는 떼어야 하니까 십일조는 떼고 다 넣었지”그럽니다. 그러자 의사가 말하기를“그분이 병원에 오래 입원하고 있었는데 그 병실 수리도 해야 하기 때문에 50%를 떼었지”그랬더니 변호사가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어떤 약속인데 그걸 어겼냐고 노발대발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의사가 물었습니다.“그럼 자네는 어떻게 넣었나?”그랬더니“난 어음으로 넣었지.”하더랍니다. 한 수 위입니다. 여러분, 못가지고 갑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못 가지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면 됩니다. 부자가 되어서 다 가져갈 것처럼 하는 생각이 잘못입니다. 이것이 나로 경건하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경건은 어디까지 와있습니까? 머리입니까? 가슴입니까? 아니면 돈주머니입니까? 무엇보다도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의 그 큰 능력에 이끌리어서 행복한 이성, 행복한 가슴, 행복한 경제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하여서 말씀의 능력이 나를 온전히 지배할 때 거기에 참된 경건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 서서 내가 순종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며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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