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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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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1~10)


예수님은 본문을 통하여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경고와 끝없는 용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작은 자'는 제자들과 구별됩니다. 즉 믿은 지 오래되지 아니한 자들과 복음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 다음은 끝없는 용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회개와 관련시켜서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의 관계는 끝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도들은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믿음 뿐 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장 4절에 『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7은 만(滿)수이자 무한수입니다. 따라서 일곱이란 수는 산술적인 여자적 개념으로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일곱이란 수는 무제한적 숫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64절에 『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43절에 『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고 했습니다. 
잠언 24장 16절에 『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고 했습니다. 

신명기 28장 7절에 『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고 했습니다. 
다니엘 3장 19절에 『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세 번 용서하는 것을 한계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함 』으로 유대인들의 용서에 대한 전통적인 한계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 자신이 무한한 용서의 실체로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이며 선수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예수님의 무한한 용서와 은혜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빚진 자로서 타인에게도 이와 같이 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이 사실을 거듭 교훈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무한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사고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했던 것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무제한적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Ⅱ.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장 5절에 『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무제한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더하다'라는 말은 '앞'이란 뜻 '프로스'( )와 '놓다', '두다'의 뜻 '티데미'( )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있는 것에다 첨가해서, 혹은 있는 것에 더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의 고백은 믿음 자체가 사도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1) 믿음은 예수께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본문 17장 5절에 『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6절에 『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로부터 온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5절에 『 …믿음이 온 후로는 …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에 『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믿음의 주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는 제자들의 요구는 그들이 믿음의 절대성을 깨달았다는 증거입니다. 

2) 믿음은 의인의 생존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이 선물은 누구에게나 주는 선물이 아니고 영생(선물)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주는 제한된 선물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예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그를 믿는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곧 영원한 생존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7-48절에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Ⅲ. 믿음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장 6절에 『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고 했습니다. 
사도 자신들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겨자씨만한 적은 믿음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것을 비유할 때 눈꼽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겨자씨를 가장 작은 것을 비유로 들 때 사용했습니다. 
이 비유로 보면 사물이나 무생물 즉 눈꼽, 모래알, 티끌 등을 비유로 들지 않고 생명력 있는 겨자씨를 비유로 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은 그 어떤 경우에든지 생명력이 있는 창조성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요구한 것은 곧 믿음의 진정성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믿음의 양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함으로 믿음의 질을 요구한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뽕나무가 아니라 산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1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고 했습니다.
뽕나무든지 산이든지 모두 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영웅적 삶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24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고 했습니다. 

1) 믿음 자체가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벙어리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마가복음 9장 23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곧 혈루의 근원이 마르게 하셨습니다. 나음을 입은 여자가 두려워 떨며 와서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할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라고 했습니다(막 5:25-34).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왔습니다. 그들은 용신할 수 없이 모여든 사람들을 뚫고 지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의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막 2:1-5). 
이것은 모두가 믿음이 가지고 오는 능력인 것입니다. 특히 복음서에는 믿음이 가져다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에 『 대저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의 온갖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도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말하지마는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의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는 표현은 싸움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예수께서 성취하신 승리의 영광을 덧입었다는 말입니다. 곧 사망권세를 이기고 승리한 부활 생명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승리의식을 실천화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7절에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 했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세상을 정복한다는 말입니다. 이 싸움에서의 무기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면 이 세상은 내 것이 되고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행복입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행복, 궁극적인 행복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얻어지는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3) 믿음은 인간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원천입니다. 

대요리문답 제 1문에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편 43편 4절에 『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간의 제 일 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제는 인간의 삶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 의의와 목적에 관계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보다 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2-3절에 『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의 현장화가 사랑실천입니다. 그 사랑실천은 바로 요한1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은 곧 실천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 『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큰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만세 전에 크신 하나님께로부터 작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 출석 자체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은 큰 믿음의 실천 곧 사랑입니다. 믿음의 양을 늘려야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질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질은 겨자씨처럼 작을지라도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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