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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동행자 하나님과 함께 (창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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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행자 하나님과 함께 (창 5:21~24)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언제나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심은 이 세상의 모든 근심을 초월하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 길의 모든 기적은 믿음을 가진 자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얼굴 모습이 다른 것처럼 우리 인생은 각기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도 조건도 다른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취,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지평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축복의 지평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능력과 기회를 찾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힘을 능가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여호와의 신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크게 신뢰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은 좋은 인격을 탐냅니다.  확실히 좋은 인격의 사람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보다 고생을 덜합니다.  좋은 인격의 사람은 주변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좋은 인격의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축복하십니다.  모름지기 우리 믿음의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닮고 싶어하는 좋은 인격의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인격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한 생애를 살면서 우리의 환경과 삶의 조건이 각각 다른 것처럼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들도 각각 다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일이 뒤틀린다고 해서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삶의 여건이 뒤틀린 것을 발견하고 깨달았을 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성공 이전에는 언제나 가장 깊고 답답한 한 시기가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캄캄한 터널이 있을 때는 참고 통과해야 밝은 세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은 또 다른 타성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목표를 붙들고 힘차게 달리십시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야 합니다.

"내 인생의 위대한 시대를 한 번 열어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래를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우리의 모든 인생사의 문제를 여호와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만을 온전히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37:5)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55:22)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잠 16: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때마다 일마다 당하는 그 일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믿음보다 선택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인간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선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선택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사람은 끝없이 영적인 것을 구해야 됩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더욱 계속해서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선택의 용기가 기적을 낳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마을 양지 바른 곳에서 세 살짜리 남자, 여자 아이들 몇 명이 어울려 놀고 있었습니다.  이 녀석들이 엄마, 아빠 놀이를 하면서 "여보, 어서 출근하세요.  여보, 뽀뽀해 주세요."라고 아주 앙증맞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귀엽기도 하고 한편 가소롭기도 한 터라 마을 할아버지가 "네 이놈들"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할아버지가 지나가고 난 뒤에 아이들이 투덜거립니다.
"피∼ 우리가 아직도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들인 줄 아나봐.  우리 세 살이지 그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학교가 놀이터였습니다.  마을의 빈 공터는 아이들의 만남의 장이었고 교제의 장이었습니다.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모이면 모두가 함께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함께 노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고작 노는 것이라고는 집안에서 TV나 보고 컴퓨터나 합니다.  현대인들은 잘 놀 줄을 모릅니다.  함께 노는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걸린 환자들이 많습니다.
 
잘 놀 줄을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생활도 노동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마치 억지로 도살장에 끌려나온 양과 같은 모습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신앙이란 하나님과 함께 노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노는 것입니다.  전도할 우리의 베스트들과 함께 노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와 얼마나 잘 노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영원한 하늘나라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면서 즐겁게 노는 방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즐겁게 놀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는 한 사람도 미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사람인지라 때로는 미운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그 사람도 우리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서 사랑과 용서를 훈련하고 마음 넓히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을 돕는 조교들이 있습니다.  훈련이 힘들 때는 그 조교들이 미운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그 조교를 인정하고 잘 훈련받으면 좋은 영적인 군사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나를 잘 감추는 것입니다.  나를 잘 감추는 능력이 최고의 능력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감추려고 합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지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착각도 버려야 하고, "누가 없으면 안 된다!"는 오해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이 없어도 교회는 얼마든지 잘 운영됩니다.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남을 앞세워주십시오.  남을 높여주십시오.  무엇보다도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으십시오.  모든 성도들과 잘 노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를 밝히면서 인생 이력들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소중히 여기는 부귀영화와 학벌과 소유, 명예와 권세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으시다는 듯 단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는 몇 세에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몇 세로 죽었다"

그러다가 21절의 에녹에 이르러 그 필체가 바뀌어지고 그에 대한 설명이 첨가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에녹은 아담의 7대 손이며 노아의 친할아버지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큰 기적을 일으키며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큰 사업가도 아니고,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것이 그의 이력의 전부입니다.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성경은 창세기 5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를 위해서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지냈다' 즉 살았다고 했는데 유독 에녹은 '동행했다' 함께 걸었다고 합니다.

또한 등장 인물 모두에게 '죽었더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에녹에게만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11장에도 족보가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죽었더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죽었다"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는 이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동행한다"라는 말은 "함께 걷는다", "함께 산다", "함께 산책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떨어질 수 없어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2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5절에서 본문의 "하나님과의 동행"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이것이 동행이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은 내가 좋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고 하나님은 나 없이 살 수 없고.  이것이 동행입니다.

에녹 당시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6장 3절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없는 죄악된 육신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 말씀에 보면, 그 시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성경에는 에녹이 특별히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에 널리 알려진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가인처럼 큰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라멕의 아들들처럼 대기술자도 아니고, 대음악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믿음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결론이 분명해졌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이다."

미가서 6장 8절에 보면, 타락하고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올바른 믿음생활이란 어떤 큰 업적을 쌓고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성공주의가 아닙니다.  바른 믿음생활이란 지식을 쌓고 어떤 신비한 교리를 배우고 성경의 난해한 구절들을 설명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의 힘과 재주로 큰 일을 하려다가 병들고 인격이 망가지고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생활이란 무조건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무조건 따라 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믿음생활이란 하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버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치관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에녹이 살다간 삶의 가치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녹의 묘비와도 같은 메시지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삶이 형통하고 넉넉해야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녹도 그의 삶이 형통한 삶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에녹은 최악의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창세기 4장 23절 이하를 보면, 가인의 7대손 라멕이 살인한 것을 예찬하고, 하나님의 벌을 비웃는 사악한 모습이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이 시대는 머지 않아 노아의 홍수 심판이 내려질 바로 그 상황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어찌나 악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유다서에 보면 에녹은 날마다 당시의 널리 퍼져있는 불경건을 한탄했습니다.  경건치 않는 자들을 바라보며 눈물로 심판을 선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의 삶을 잃어버린 이유가 자신의 삶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핑계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늘 에녹은 책망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현실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잃어버리고 마냥 세상과만 동행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오늘 본문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내가 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을 에녹은 책망하고 있습니다.  애들을 다 키워놓은 후에, 은퇴한 다음에, 좀 더 돈을 벌어놓은 이후에 충성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에녹이 말합니다.
"나는 300년을 자식 낳으며 수 백명의 자식들을 키우며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노라."

그렇습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병이 들어 있어도 병든 그 몸으로 하는 겁니다.  돈이 없어도 없는 그 상태에서 하는 겁니다.  믿음이 연약해도 연약한 그 모습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이요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에녹이 산아 제한 없이 300년 동안 자식을 낳았다면 적어도 수 백명은 가족으로 거느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자식을 키우며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최악의 시대, 최악의 환경, 최악의 길에 서서 하루쯤, 한달쯤, 한 1년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것이 아닙니다.  300년을 변함없이 동행했습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면 열 받아서 사랑할 때면, 서로의 집까지 왔다갔다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시들해 지면, 가는 것만 보고 갑니다.  사랑하는 것이 냉랭해 지면, 버스 오는 데로 자기가 먼저 간다고 합니다.

노래방 가서 100점을 받았을 때 열 받아서 사랑할 때면, 박수를 쳐주면서 가수로 데뷔하라고 합니다.  시들해 지면, 점수와 실력은 반대라고 합니다.  사랑이 냉랭해 지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아줌마, 이 방 기계 고장 났어요.  방 바꿔 주세요."

인생은 누구나 변덕쟁이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사실 에녹도 300년 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문제와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상하는 일이 오죽이나 많았겠습니까?  괴로울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변함이 없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교회의 충성에 변함이 없는 것, 그것이 교회와 동행하는 겁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섬기다가 때로 지칠 때마다, 탈진이 올 때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녹이 이처럼 300년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계기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의 눈길을 머물게 하는 한 단어가 나옵니다.  본문 22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여기에 보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 므두셀라의 출생이 그 아버지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뉴베리라는 성경학자의 설명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는 특별히 이 사람의 이름이 의미하고 있는 그 뜻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므두셀라라는 말이 고대 중동지방에서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보편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본래 므두셀라라는 문자적인 의미로는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부족과 한 부족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맨 앞에는 창을 잘 던지는 사람이 서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만 죽으면 저 부족은 끝이다.  그가 죽으면 끝이 온다."  그래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보편적으로 "그가 죽으면 끝이 온다" 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은 광경을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에녹을 불렀을 것입니다.
"에녹아!"
"예, 하나님!"
"세상이 악해졌지?"
"그렇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심판을 해야겠다.  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사인을 주마.  그것은 얼마 안 있으면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어라.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이다."
드디어 에녹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서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 에녹이 아들의 이름인 므두셀라를 부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이었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고 했는데, 심판이 온다.  내 인생의 결산의 날이 온다.  그리고 역사 속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이 심판에 대한 각성이 그로 하여금 그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내 인생은 반드시 결산된다.  심판된다.  이 중요한 심판의 생각이 그의 인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증거를 성경 유다서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예언입니까?  주께서 수많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임하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터인데 경건하지 않은 모든 행동, 그리고 경건하지 않은 모든 말을 인해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에녹, 그는 심판을 믿었고, 심판을 설교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각성이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전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경을 가지고 산수 놀이를 해 보십시다.  본문 25절 이하를 보십시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노아가 태어날 때에 할아버지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가 됩니다.  창세기 7창 11절 이하에 보면 노아의 나이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쏟아졌습니다.  이날은 바로 므두셀라의 나이 969세입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가 죽자 홍수 심판이 내려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는 이 세상을 향한, 그리고 우리들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20장 13절 이하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의 준엄한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도 있습니다.  그 마지막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죽었던 성도들은 부활의 영광으로, 그때까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은 홀연히 변화된 부활의 몸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반드시 심판된다.  내가 하는 말들이 반드시 심판된다.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뭔가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인생에 끝이 있구나.  역사에 심판이 있구나.  이 진리를 깨닫는 데서부터 모든 신앙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끝이 있음을 인식하며 느끼고 살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올 것입니다.

어느 새 금년의 절반을 훌쩍 넘기고 9월의 첫 주일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빨리 흐를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마지막 심판의 날, 결산의 날이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의 결산의 날, 심판의 순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내 인생 속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참으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결단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생과 역사의 끝이 있음을 깨달은 이후에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을 하나님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옮겨주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밖에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모든 신앙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것 같지만 영원한 저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이 땅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여기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지구 저 건너편에 미국이 있고, 브라질이 있듯이 이 세계 저 위에 영원한 한 나라가 있습니다.

에녹은 이사 가듯이, 여행을 떠나듯이 영원한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한 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를 진실로 믿는다면 이 땅만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곳에서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좋은 것은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다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최고의 기쁨, 최고의 기적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 동행은 영원한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약속 받고 맛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죄인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나라에서 동행하게 될 우리가 이 땅에서도 그분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길을 혼자서 걸어가며 혼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나 혼자 내 힘으로만 감당하려고 하다가 지치고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십시오.  주님께서 멈추라 하시면 멈추고, 쉬자 하시면 쉬고, 달려가자 하시면 달려가는 겁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기적 가운데 하나는 죄인된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어갈 때 무엇을 남기고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에녹처럼 그가 하늘나라로 옮기움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와 섬김과 헌신에 대한 진지한 의미를 남기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한 순간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마지막 순간이 찾아올 때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저 영원한 나라로 가시겠습니까?  후회함이 없이, 부끄러움이 없이 주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 후회 없이 아름답게 저 영원한 나라로 영원한 동행을 위해서 우리의 삶의 새로운 발걸음을 다시 옮겨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동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기서, 그 영원한 동행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럴 때 부끄러움 없이 그분 앞에 서기 위하여 오늘도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셔서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인생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진실로 우리의 인생이 그분과의 영원한 동행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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