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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양의 힘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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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힘 (엡 5:15~21)


요즘 인기와 감동을 주고 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김용화 감독이 만들고, 하정우씨가 주연한 ‘국가대표’라는 영화를 꼽을 수가 있습니다.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의 애환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모든 조건이나 대우는 너무 열악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대표생활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1년 동안에 그들이 받는 연봉이 360만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면 국가대표로서 태극마크를 달고 나갑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대표팀을 구성했는데 정말 그들이 한 마음 되어서 열악한 환경 가운데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세계대회에 나가서 금메달, 은메달, 여러 메달을 석권하고 국가의 위상을 높인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나중에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 교역자들과 함께 시간이 되어서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인데 우리 성도들은 과연 무슨 대표일까?’ 생각해보니 우리는 천국의 대표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저나 천국 대표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무엇을 보면 천국대표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찬양하는 모습을 통해서, 찬양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 성경, 찬송만 들고 있다고 우리가 천국대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대사니”라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 성도의 찬양의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은 ‘아! 저들이 정말 천국 대표구나! 하늘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의 삶은 성도의 특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찬양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찬양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가 너무 많이 쓰는 말이기 때문에 찬양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으로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특정대상을 칭찬하거나 기리어 드러내는 것’ 칭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칭찬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에서는 찬양이라는 말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그리고 하나님을 칭찬하는 일’ 그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우리 성도의 사명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33편 1절에 보니까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하나님을 성실함으로 섬기는 자들은 당연히 의무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니까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찬양하게 하려 함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에베소서에서는 우리에게 아주 귀중한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빛의 자녀는 어두움의 행실을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오,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 사람을 입어야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죄의 얼룩진 과거의 옛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의 삶의 양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에베소서 5장 19절에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우리는 오늘 빛 된 자녀들, 그리고 하나님의 새 옷을 입은 자녀들의 상징적인 삶은 바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찬양하고, 삶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릴 때 사람들은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임을,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조니 에릭슨’이라는 여성 수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다이빙을 하다가 잘못 뛰어서 온 몸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전신마비를 앓게 되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녀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비록 이렇게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지만 내 인생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그녀는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으니 입에 붓을 물고 입으로 평소에 좋아하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장애인이 입술로 물고 그린 그림이 아주 유명한 그림이 되어서 팔려 나갑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필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던 어느 볼펜 회사에서 이 ‘조니 에릭슨’에게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볼펜 광고를 만드는데 당신이 여기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때 ‘조니 에릭슨’은 이렇게 조건을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나오는 광고 밑에는 PTL이라는 영어글자를 써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나가겠습니다.” 그것이 허락이 되어서 그녀는 광고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나가는 광고마다 그 광고 면에 PTL이라는 영어약자가 들어갔습니다. 그 PTL은 ‘Praise The Lord’의 약자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Praise The Lord’의 앞 글자를 따서 PTL이라는 광고를 실은 것입니다. 참으로 ‘조니 에릭슨’은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그 광고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에서는 빛의 자녀들,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찬양에 대한 주제를 우리가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가 찬송해야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가 찬송해야 할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연히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찬양의 은사가 있든 없던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와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찬양을 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목회하면서 늘 하나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게 더 좋은 찬양의 은사를 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에 우리교회 반승상 목사님만큼만 찬양을 잘한다면 아마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그런 생각도 가끔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찬양할 수 있는 특권을 다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또 그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 천국에 가면 실업자가 될 지도 몰라.’ 여기서는 제가 목사니까 설교를 하면서 목사로서 직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천국의 언어는 찬양입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가 땅을 파던가, 직장에 나가든지 하면서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주 업무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제대로 찬양하지 못한다면 실직자가 될지도 몰라.’ 하는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부활해서 주님 품에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다 채우셔서 잘 찬양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언어는 바로 찬양입니다. 찬양하는 사람은 바로 천국 백성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청년 때에 구원문제에 대해서 고민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떤 공로를 쌓아야 할까?’ 이런 부담감이 늘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누군가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책의 제목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세 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고,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참으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죗값이 모두 다 지불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제 우리의 구원이 문이 활짝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오직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에베소 2장 8절에 보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가대는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성가대는 4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첫째, 교회에 올 때 성가대원은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면 옷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성가대원들은 예약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않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준비된 자리가 있습니다. 
세 번째, 성가대원들은 높은데 앉아서 회중석을 늘 내려다보고 있는 분들입니다. 
네 번째, 성가대는 목사의 예리한 시선에서 늘 벗어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제가 설교 할 때 이쪽은 잘 안 보거든요. 성가대원들은 제가 안 본다고 졸거나 주무시면 안 됩니다. 주무셔도 예쁘게 주무셔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할까요?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찬양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이 세 가지를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세 가지의 의무를 구분한다는 것은 무의미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F. F. 부르스’라는 학자는 이 세 가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시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에 대한 감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 그리고 내 인생을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내용들을 노래할 때 그것이 시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찬송이라고 말합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에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내게 따듯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 성경은 이것을 찬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 번째가 신령한 노래입니다. 신령한 노래는 바로 내 삶을 이끌어 온 간증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노래입니다. 요즘 말로 CCM, 혹은 복음성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삶에 찬양을 통해서 감사와 고백과 간증이 주께 올려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찬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악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아노를 연주함으로, 오르간 연주를 함으로, 기타, 드럼을 연주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모니카를 불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 주님을 높여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말하지 못하는 분들이 수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입술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수화로, 몸동작을 통해서 그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입술로도, 우리 언어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악보를 보고, 가사를 보고, 노래하는 것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언어로도 하나님을 얼마든지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순서에 보면 회개, 중보, 간증도 있지만, 보통 기도의 순서에 맨 처음에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대표기도하실 때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입술로도 하나님을 얼마든지 높여드릴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양이라는 것이 꼭 성가대석에 앉아서 곡조 있는 노래를 부르는 것만이 찬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드리는 찬양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아침에 일어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립니다.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전능자,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이 바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 받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둔 밤이 지나고 새벽의 밝은 태양이 떠오를 때 우리는 그 태양을 보면서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둔 밤이 지나가고 제 인생의 밝은 아침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높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여러분께서 아멘으로 화답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했습니다. 

제가 찬양할 때 여러분 화답해 보십시오. “주님은 전능하십니다.”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내 인생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멋지신 분” “주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분”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을 높여드리는 주님에 대한 고백과 간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성경, 찬송을 들고, 아니면 성가대석에서 악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몇 일전에 한 집사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간증을 듣고 참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집사님의 아들이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축구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이 아이는 계속 축구를 시키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겠다.”고 조언해 주었지만 집안 형편이 안 되어서 “네가 축구하긴 어렵겠다. 너는 그냥 공부하고 축구는 조금씩 해라.”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서는 축구부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냥 교회에 오면 교회의 형들을 따라서 교회 조기축구부에 들어가 축구할 따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체육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그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표팀의 선수들도 와서 참석하는데 이 학교에서도 선수들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체육과 선생님이 “너희 중에 축구 좋아하는 사람 나와서 오늘 뛰라.”고 했더니 이 학생이 “저 축구 좋아합니다. 저도 뛰겠습니다.” 그래서 선수들과 함께 뛰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열심히 뛰었습니다. 평소의 실력보다 최선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전 박주영 선수도 있었던 FC 서울이라는 축구팀의 스카우트 담당이 이 경기를 관람하다가 이 선수를 주목해 보았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이 선수를 보자고 하더니 우리 팀에 와서 한번 뛰어보지 않겠냐고, 언제 주일날 와서 테스트 받아보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저는 주일 날 갈 수 없습니다. 주일날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이고, 예배드리는 날인데 저는 그 날 경기를 할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아쉽다며 다시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고 하고 갔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평일에도 좋으니 와서 테스트 받으라고, 그래서 테스트를 받고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FC 서울의 2군이 되고, 유망주 클럽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잘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팀의 주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 1년 반쯤 열심히 훈련을 받았는데 아주 놀라운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스페인 아주 유명한 구단에서 이 젊은 후보 선수를 스카우트 하겠다고 제의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스페인에 테스트를 받으러 가야하는데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담당 의사, 코치, 스텝들 9명이 스페인에서 보내준 전용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지금 테스트를 받고 있는데 앞으로 좋은 소식이 올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감동받으셨을까? 그가 주일날, “저는 주일날은 테스트 받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 줄로 믿습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서 우리에게 넘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또 하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최근 나로호 우주선을 발사한 지역이 전남 고흥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계신 오병직 목사님의 사위가 그곳에서 안과를 개업해서 우리 장로님들과 함께 심방을 간 일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그 사위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병원 이름이 ‘고흥기독안과’입니다. 아주 잘 안 되는 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을 인수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병원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이 사위는 이왕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흥기독안과’라고 쓰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반대했습니다. “아니 기독안과라고 쓰면 불교인들이 오겠느냐? 무신론자들이 오겠느냐며 왜 그런 이름을 붙이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기독이라는 말은 크라이스트,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안과이기 때문에 나는 이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그래서 ‘고흥기독안과’라고 간판을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처음 그 병원을 인수할 때 몇 억의 빚을 지고 들어갔는데 일 년 만에 그 빚을 다 갚은 줄로 믿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그가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찬양하면 입술로만 찬양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보니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직장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찬양에는 어떤 능력이 따라올까요? 찬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옥문이 열린 놀라운 기사를 우리에게 간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잘못된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귀신 들린 어떤 여종에게 자유를 주려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간수장의 가족이 다 구원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에 이런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친구 중에 한 청년이 있었는데 6.25때 전쟁포로가 되었답니다. 그는 전쟁 포로가 되어서 끌려가다가 인민군들이 귀찮으니까 그를 죽이려고 그를 묶어서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인민군 장교가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 믿는 청년이었는데 마지막 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부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늘가는 밝은 길” 이 찬송을 냅다 불렀습니다. 1절을 마치고 2절을 시작하는데 “타당”하는 총 소리가 났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자기도 모르게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까 누군가 자기를 업고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웬일인가?’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그 인민군 장교가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북에서 어느 장로님의 아들이랍니다. 인민군 장교가 되고 무신론자가 되었는데 당신이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총으로 인민군 사병 두 명을 쏴 죽이고 당신을 업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이 젊은이는 나중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찬양은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 삶에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이 이어질 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찬양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성경 본문 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오늘 이 본문을 많은 분들이 해석하기를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찬양하는 삶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찬양하면 성령 충만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 충만 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지배하고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인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고 역사하실 때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적어도 성령 충만한 사람은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즐겁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행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조건은 바로 찬양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 늘 찬양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 찬양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찬양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우울합니다. 노래가 나오질 않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충만을 상실하고 소멸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침체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만 생각하면 너무 좋아서,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늘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하는 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은 너무나 훌륭한 조건입니다. 여러분! 찬양하는 사람들이 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살이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한숨 쉴 때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은 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찬송시를 지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페니 크로스비’ 여사입니다. 그녀는 1살 때 의사의 실수로 실명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잃었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늘 찬송시가 흘러나왔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면 찬송시가 흘러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한번 기록해 보십시오. 그러면 유명한 찬송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 ‘페니 크로스비’가 일생동안 지은 찬송시가 약 9천편 정도 된다고 합니다.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매일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을 가지고 찬송시를 기록했습니다. 이 찬송시가 우리 찬송가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 ‘인애하신 구세주여’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이 대게 다 ‘페니 크로스비’의 영감 있는 찬송입니다. 

그녀가 고난당할 때, 그녀가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갈 때 이런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찬송시를 보면 ‘길’이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길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안이 열려서 주님의 인도가운데 아름다운 인생길을 이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나의 기도는 나의 찬송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송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박국을 보십시오. 그는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성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에 올라갔을 때, 마지막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진정한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일상적인 삶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운전할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이 60Km로 아주 안전하게 운전할 때는 <주 너를 지키리> 이런 찬양을 부르십시오. 80Km로 조금 속도를 높일 때에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이런 찬양을 부르십시오. 조금 과도하게 100Km로 위험하게 달릴 때에는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이 찬양이 좋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이 달려서 너무 너무 위험하다면, 120Km로 달릴 때에는 <나 이제 집에 옵니다>라는 찬양을 부르십시오. 천국이 가까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은 바로 성도의 특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초대교회는 찬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마지막 절에 보면 온 교회가 유무상통했습니다. 자기의 물건을 자기가 갖지 않고 서로가 나누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니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모델은 바로 찬양입니다. 천국 백성, 천국대표의 특징은 바로 찬양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에, 여러분의 입술에 이 찬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드먼드 히윗’ 여사의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1887년 ‘에드먼드 히윗’ 여사가 한 불량소년을 교화하다가 그 소년이 갑자기 분노해서 어디 가서 큰 기왓장을 가지고 와서 이 히윗 여사에게 던져버렸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척추에 맞았고 척추를 쓸 수 없어 7개월 동안 어둡고 침침한 병실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나를 이렇게 할 수 있냐고. 그 소년이 너무 미워서 그 소년을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신경질적이 되었습니다. 

어느 봄날 청소하는 흑인 여자 청소부가 커튼을 걷는데 밝은 햇살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청소부가 청소를 하는데 찬송을 흥얼거리는 것입니다. 히윗 여사는 성질이 났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청소하는 청소부 주제에 뭐가 좋아서 찬송을 흥얼거리냐.”고 한 마디 쏘아붙였습니다. 그러자 흑인 청소부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내 형편과 처지를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셨는데 어찌 즐겁지 않습니까?” 자기는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에드먼드 히윗’ 여사가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며, 증오하며 살아왔던가?’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는 애통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속에 영감 있는 시를 주셨습니다. 그 시가 바로 우리가 잘 부르는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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