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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삿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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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삿 6:16)
 

아일랜드 출신 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라는 분을 여러분이 들어 아실 것입니다. 그에게 우화적인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소재에 착안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 베푸신 사람들이 많고 예수님께로부터 은혜 받은 사람이 많잖아요. 많은 나병 환자들을 고치셨으니 고침 받은 사람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뭐 장례 하러 가다가 살아난 청년도 있잖아요?

이 많은 은혜 받은 사람들, 성경에는 그 사람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다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은혜 베풀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나름대로 추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만나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소설은 설명합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은 알코올 중독자를 만났습니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어디서 본 일이 없습니까?” 그분이 대답합니다. “아, 있었지요. 나는 본래 발을 절던 장애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제가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장애인이었을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또 누가 나를 환영하지도 않고. 그래 이럭저럭 하다 보니 타락하고 타락해서 이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창기였습니다. “아니 내가 네가 창녀일 때에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아직도 창기인 것이냐?”하고 꾸중하듯이 물었더니 이 창기가 대답하는 말이 “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딸이 되고 감사해서 윤락 생활을 청산했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와서 삽니다.” 이렇게 다시 윤락일을 하게 되었다는 하소연입니다.
또 한 곳에 가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싸움질을 하고 있는, 아주 혈기와 주먹이 있는 조폭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 옛날에 본 사람이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 “예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원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은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타락, 여기에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드린 말씀이 이미 있었지요?
그래서요. 그래서 어쩌자구요. 은혜받고 구원받은 것이 뭐가 어떻다구요?
이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할 텐데요. 우리에게 그것이 그쳐져 있는 것이라면 ‘은혜 받은 것과 구원 받은 것은 어디에 쓰는 것’인가요?

은혜 받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방언하고, 입신하고, 예언의 은사까지 받았는데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어떤 삶을 만들어 갔으며, 그것이 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었으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느냐가 정말 더 중요한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1. 고백 -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예수님이 새 단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 간부 요원으로 열두제자를 뽑고 경영 상담소에 그들의 자격 심사를 의뢰했더니 이런 회답이 왔답니다.

나사렛 목공소 요셉의 아들 예수 귀하가 의뢰한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와 직업적성 검사를 분석한 결과를 통보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 사원으로 자격 부족입니다. 학력이 너무 낮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단체 관념이 없고 협조 정신이 약하여 경영 관리자로서 부적합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고 성격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마디로 무능력자입니다.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됩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질문뿐이요 추진력이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무슨 짓이나 할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이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사상에 감염되어 있어 귀하가 생각하는 온건한 집단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귀하가 추천한 열두 명 중 긍정적인 해답을 드릴 후보자는 한 명뿐입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사회 지식도 풍부하며 예민한 실업인의 감각과 판단력이 있습니다. 사교성도 있어 상류 권력층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와 의욕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본 컨설턴트의 조언은 ‘유다 한 명만 추천하고 남은 요원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찾아보도록 권고’합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 있어서 새 단체인 교회의 터를 닦고 2천년의 세계사를 주름잡은 사람들은 당연히 실격될 수밖에 없는 열한 명이었고 오히려 유능해 보이는 유다는 탈락했습니다.
이 모순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격부족이었으나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 나라를 위하여 무언가 쓰임 받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던가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위하여 누군가에게 마땅하다 여겨질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던가요?
우리들은 지금 우리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이유가 있는 사람들인가요?

실상,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던 성경의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인물이었기에 쓰임받은 것이 아니라 쓰임받았기 때문에 위대해진 사람들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모세. 애굽의 위대한 미래의 지도자였던 애굽의 왕자 모세는 쓰임받지 못하였습니다.
애굽 관원을 죽이고 그 심판이 두려워 왕자의 자리를 떠나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실의에 찬 모습으로 기죽어 있던 목자 신분의 모세가 쓰임 받아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41: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사41:8-10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실패할 것이고 너는 넘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거죠?

다른 이들은, 그리고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앞 길은 늘 절망일거야, 희망은 꿈도 꾸지 마.”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에요?

오늘 우리는 유자격자여서가 아니라 무자격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선택되어 이 곳에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이 사실을 고백하며 호흡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찬양을 받으소서.

2. 감사 - 그 은혜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면 하나님은 이 작품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실 것입니다.

구약성서 사사기서를 봅니다.
사사 시대는 말 그대로 사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루시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평안하면 범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구를 통하여 책망하십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때 사사를 보내시어 외적을 물리치고 다시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이 비단 사사시대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리고 오늘 우리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연약한 인간들의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한 번은 범죄한 이들에게 미디안 군사를 통해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자비를 베푸시어 용서하시고 ‘기드온’이라는 사사를 세우시어 이스라엘을 살려내려 하십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사사가 되는 것을 겁먹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아도 별 것 아닌 자인데 어떻게 그 무시무시한 미디안 군사와 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삿6:14-16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약속 하에 모세와 함께 하셨고 여호수아와도 함께하셨습니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수1: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결정적으로 이렇게 용기를 주십니다.


삿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데 누가 그 앞 길을 훼방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십니까?

제 첫 인상은 그리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장로님들께서 저를 처음 보러 오셨을 때 제 인상이 참 좋았다고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똑같은 인물을 보면서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상대방이 달라집니다.

이런 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콩깍지가 씌였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콩깍지가 씌인 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 삶을 인도하십니다. 결코 그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구속하신 은혜입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주고 산바 된 우리는 그 은혜가 결코 헛되지 않아 오늘 구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은 찬양합니다.
교회를 이루어 구원의 방주를 견고케 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감당케 하십니다.
천국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게 하시고, 부르신 바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 되었으니 결코 그 은혜가 헛되지 않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응답 - 수고, 헌신하였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응답은 헌신입니다.
무엇 때문에 부르셨는지 그 부르심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일 앞에 전 생애를 투신합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신약 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업적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해 온 일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당당하지 못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자랑할 수 없습니다. 감추고 싶습니다.

만약에 감추고 싶은 우리의 삶이 있다면 궤도 수정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당당히 보고할 삶이 있다면 더욱 크게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기드온의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6장에 부르심을 입고 7장에 미디안 군사와 전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미디안 군사의 수는 메뚜기 떼만큼 된답니다.

삿6:5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군사를 모집니다.
32,000 명이 모입니다. 어림도 없는 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가 많답니다. 그래서 돌려보냅니다. 10,000이 남습니다.
이 사람들을 개울가로 데려갔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삿7: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지라.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삿7: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

10,000명도 많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00명만을 남겨 놓으라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이것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전후좌우를 살피는 사람이 전쟁하기에 준비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을 할 때 조심스레 전후좌우를 살피는 일을 통해 승리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레 전후좌우를 살펴 이들이 선택되었다기 보다는 적은 수였기에 선택되었다고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군사의 수를 동원하려면 32,000명으로는 턱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는 군사의 수로 이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32,000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10,000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저 숫자로는 도무지 어떤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는 철저히 비교 불가의 숫자를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삿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 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마침 300명이 다른 9,700명과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전후좌우를 살피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전쟁만 생각한다면 물 마시라 할 때 엎드려 물 밑의 모래라도 빨아 올릴 것 같은 기세로 쭈욱 마실 힘 있어 보이고 용맹해 보이는 군사가 제격이 아니겠습니까?

이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기실 전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기실 전쟁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기십니다.

모세의 때에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사람이 직접 나가서 전쟁하여 이기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출17:11-13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그러나 지금, 미디안과의 전쟁은 결코 칼이나 활을 사용해서 이길 전쟁이 아닙니다.
지금은 사람이 구원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나타낼 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적은 수였던 300명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는 다수가 아닙니다.
32,000명 속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10,000명 속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300명 중의 한 사람. 극히 소수인 그 사람들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소수인 우리들이 오늘 쓰임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첨언하여 생각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이런 저런 다양한 견해로 ‘엎어져 물을 마시는 것이 좋은가?’ ‘무릎 꿇고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으로 의견 다툼하여 우리의 힘을 소진할 이유가 없습니다.

300명은 전쟁터에서 쓰임 받고, 돌아간 31,700명의 군사들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쓰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내가 쓰임 받았던 일로 인하여 감사하십시오.
나와 다른 쓰임 받은 내 형제들을 인하여 또한 감사하십시오.
내가 이 일에 쓰임 받아 이 일을 하는 동안, 저 일에 쓰임 받은 내 형제 때문에 저 일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그가 피차간에 하나님의 쓰임에 부름 받았고, 우리는 감사의 응답으로 최선의 노력을 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이제 우리의 결론적인 고백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자녀의 부모에게 축하합니다라고 말할 때 “운이 좋았어요” 라고 대답하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겸손하기 위한 대답인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운이 좋은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명절 때마다 전국에서 온 가족들이 모이면 친목을 위하여 오락을 합니다.
뭘 많이 하나요? 그 판에서는 실상 쓸 만한 말들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해도 며느리가 시아버지께 하는 말이
“아버님 싸셨어요.”
“어머님. 제가 똥 싼 거 먹네요.” 등등의 말입니다.

어느 속회에서도 예배 후에 친교를 위하여 한 판을 벌였답니다.
그런데 한 집사님 이거 먹을 까 저절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싸면서 하는 말이 “에구 첫 마음이 예수님 마음인데....”
갖다 붙일데다 붙이십시오.

오늘 우리의 호흡하는 바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운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기회도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저 살아가 어떻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호흡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날아 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내일을 바라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음으로 고백하시어 영광돌리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한 주도 승리하시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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