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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히 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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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히 13:10~16)


지난 8월 17일 월요일부터 3박4일간 열린  신대원 동문 목회자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강사로 오신 목사님들의 말씀에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18일 화요일 오전 강의 시간에 강사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도중에 제 가슴을 순간 덜컹 내려앉게 만든 대목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인간적인 열심으로 일하고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을 본받아 살고자 힘쓰는 그 노력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내가 내 노력으로 열심히 일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즐겁게 해드리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으로 신앙생활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전 날 우리 교회 주일예배 시간에 ‘예수를 바라보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월요일 오후부터 시작되는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두 주일에 걸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는 말씀과 ‘믿음의 주요 또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강사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혹시 우리 교인들 중에도 엊그제 주일 설교에서 전한 히브리서의 말씀을 그렇게 듣고 이해하고 있는 분이 있지 않는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시간 제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칠 것이 아니라 이 다음 주일에 히브리서 13장 본문 말씀을 한 번 더 나누어야겠다.   비록 히브리서를 1장부터 다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히브리서의 큰 골격을 전달하려고 두 주일에 나누어 말씀드렸는데 결국 결론은 마지막 장이니까....   13장을 본문으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자고 한 번 더 전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정하였는데 이 제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드립시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선 먼저 우리가 말씀을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두어 가지를  생각한 후에 우리가 드릴 찬미의 제사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첫째는, 내가 힘써 노력하고 수고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도달하겠다는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를 닮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내가 무언가 힘써 노력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상한 삶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내 신앙의 목표로 삼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고차원적인 윤리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스로 만족하고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교훈의 전부이거나 혹은 본질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노력하고 수련을 하여 아무런 흠 없이 완벽한 존재가 되는 길을 안내하는 도덕 교과서나 수련 도감이 아닙니다.   공자나  맹자나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고 그분의 삶을 본 받아 사는 것이 믿음이고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은 도를 닦고 수련을 하여 그분처럼 고상한 경지에 이르러 드디어 구원을 이루자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신과 연합할 수 있고 나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뉴에이지 운동이 주장하는 정신입니다.    힌두교인들이 하는 요가 훈련, 선불교의  초월 명상이나 좌선 등 사람의 훈련과 노력으로 인간 내면에 있는 신의 본질을 찾아낸다는 것이 뉴에이즈 운동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무슨 선을 행하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것처럼 기도생활에 깊이 빠져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하여 나 스스로 위대한 존재가 되고 결국에는 내가 중심이 되고 맙니다. 

둘째 오해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다거나 혹은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은 내가 거룩한 삶을 열심히 살아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열심을 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곁에서 거들어 드리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일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 봉사하고 선을 행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고 세상을 바꾸는 운동 등 내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해주고 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리켜 좋은 믿음이라고 오해합니다.   

개혁 신앙의 정신은 인간의 노력과 선행이나 공로를 강조하던 중세 교회의 타락한 정신과 가르침으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부르짖었던 정신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은혜를 강조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여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렸고 그래서 나를 구원하셨다거나 나에게 복을 주신다는 식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런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나를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하나님께도 자랑하고 싶지만 사람들에게도 내가 얼마나 멋지게 믿음생활하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몸살이 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과 사랑과 은혜는 온데간데 없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나의 업적과 나의 이름만 드러내고 맙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본 받는다거나 예수를 바라본다는 말씀을 정반대로 이해한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이런 오해와 착각에 빠질 때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거들어 드리거나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살기 때문데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주께서 나에게 거저 주신 그 은혜를 항상 찬미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나를 불쌍히 여겨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합시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특히 요한복음 5장에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아버지가 나에게 보이신 것만 일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한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가 맡기신 일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즉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실 때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뛰어난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청년 사울이 자기 나름대로는 얼마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도 한 때는 자기 열심만 가지고 앞뒤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오해하고 착각 속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열심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음에 넘기우며 교회를 핍박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굳게 믿고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음성의 주인공에게 굴복하고 그날로부터는 180도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로부터는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한 일에 열심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맡기신 그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생각으로 무언가 열심히 일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이냐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청년 사울이 내 열심만 가지고 좌우충돌하며 일할 때는 곁에 있는 사람들이 상하고 죽었지만  나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바울이 되어 비로소 생명을 살리고 그리스도를 올바로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삶을 살았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전 11:1)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오늘 읽은 히브리서 13장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성문 밖으로 나가 그분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백성들의 죄를 위해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 양의 피는  제사장이 제단으로 가져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으로 가지고 나가 불살랐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도 자기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으로 끌려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문 밖으로 나가심은 곧 우리를 위한 희생이요 버림받으심입니다.   사람에게 뿐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영문 밖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를 본 받는 사람,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이 땅에서 영원히 머물지 않고 장차 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성문 밖으로 끌려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뒤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내가 얻고 누리는 즐거움과 영광과 인기와 명예 때문에 잠시 잠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용하는 고상한 수도자입니까?    참으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성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찾고 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찬미의 제사가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그 입술의 열매가 곧 찬미의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립 서비스하듯 ‘주님 사랑해요’ 하고 구주를 사랑한다는 입술고백만으로 그치지 않고 행함으로 그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고난이 무척 많은 1세기 환경 속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킬뿐 아니라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특히 자기가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는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덕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합니다.   내가 내것 가지고 내 의지를 따라 선행을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도움이 되고  예수께 무슨 즐거움이 되겠습니까?    작은 숟가락으로 태평양의 물을 한 번 퍼내었다고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지극히 미약한 내 힘으로 무엇을 한 것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일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내가 내 것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으로 합니다.    내 마음에 내키는 것을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일하는 나의 모든 선행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제사가 됩니다.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20절, 21절 말씀을 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그 언약의 피를 흘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시며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나를 불쌍히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평화 가운데 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또한 나를 온전하게 만드시는 주인이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내 힘으로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나 혼자만의 열심이나 노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미의 제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없어도 하나님은 일하시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나의 일은 그 무엇이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닌 자기의 것(하나님의 뜻)으로 일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며 삶입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세세무궁토록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영광은 내가 아닌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영원한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13:8).    청년 사울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불러 전도자 바울이 되게 하신 분은 과거에 세상에 살다가 떠나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어록이나 교훈집을 남겨두고 내가 떠나가더라도 너희들끼리 나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라고 하신 분이 아니라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도 살아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사울에게 말씀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시작이시며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지금도 내일도 영원히 만물의 주인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그분이 맡기신 일의 한 모퉁이를 받들어 그분의 뜻을 따라 섬기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니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한다고 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주께서 우리들을 통해 주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께서 맡기신 일을 순종함으로 받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일군들입니다.    우리들에게 맡기신 일들은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됩니다.   개인들도 교회들도 새로운 계획과 기대 속에 새로운 일들을 시작할 시기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 앞에서 순종함으로 일합시다.    영원토록 영광받으실 하나님을 항상 찬송하며 매일 매일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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