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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test)에 합격하자 (창 2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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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test)에 합격하자 (창 22:1~12)
  

어떤 대기업에서 신입 사원을 뽑는데 면접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별이 없다. 화가 난 사람들은 원망, 불평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잠을 자고 또 어떤 사람은 끝까지 준비하는 모습으로 면접의 시간을 기다리는데 그 회사의 인사 간부가 나왔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면접 시험이 끝났다고 하면서 합격자를 불러 주었다. 알고 보니 이 회사의 면접 시험은 평상시 어떤 자세로 시간을 쓰는가에 대해 알기 위해 CCTV로 보는 것이 시험의 기준이었다. 이 테스트에 합격한 사람은 두말한 것도 없이 면접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방법으로 사람을 때때로 테스트하신다. 

오늘 말씀을 보라.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철저한 시험이었다. 복의 근원이 될 만한지를 보는 것이었다. 그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이 시험의 관점은 두 가지다.

①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어떻게 대면하는지를 테스트하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만큼 경외하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창22:12)

② 그리고 또 하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준행하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창22:18)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사실 아브라함은 이것이 시험인 줄 몰랐다. 무조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거절하고 등을 돌릴 것이냐, 아니면 ‘아멘’하고 이행할 것이냐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실천하는 문제였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명령이 시험인 줄 몰랐기에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며 고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참으로 놀라운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실 조그마한 것 한 가지라도 하나님이 ‘드리라. 바치라.’고 요구하면 걸려 넘어진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이유를 수용하기보다 내 육체의 원하는대로 하려는 삶의 욕구를 따라 판단을 하기에 성령의 인도에 이끌리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시험을 하시려는 특별하신 계획을 알 수도 없고 순종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을 위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 모든 고민과 의심의 구름 흔적조차 없는 것처럼 순종을 시작했다. 

오늘 하나님이 제시하신 시험은 어려운 시험이다. 그 시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정해진 장소로 가는지, 못 가는지를 보는 시험 (창22:4)

창22:2을 보면 모리아 땅으로 가야 함을 말해준다. 창22:3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러준 곳으로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창22:4을 보면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모리아 산으로 가야 하는 아브라함은 그 거리가 3일 길이었다. 번제할 나무와 두 종, 그리고 아들과 나귀를 끌고 이동하는 3일간의 여행은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그런데 그 3일간의 여행이 아브라함에겐 의문의 시험일 수 있었다. 왜, 3일간을 가야 하는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이기에 가야 하지만 ‘얼마든지 가까운 곳에서 번제를 드릴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자기 안일과 편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3일 길을 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브엘세바를 떠나 하나님의 목적지로 간다. 

우리는 말씀의 명령이기에 가야 하지만 하나님은 3일 길을 통해 가는 시험을 하고 계셨다. 이 지시하신 장소는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장소가 되었지만 후에는 다윗이 돈을 주고 사들인 요르단의 타작 마당이며(대상21:22) 온역을 면하기 위한 제단을 쌓은 곳이고 대하3:1을 보면 후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하나님 임재의 장소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신 후 계속적으로 이 땅을 성별하고 구별하여 거룩한 성지가 되게 하시려는 섭리의 장소였다. 그러므로 ‘왜, 가야 하는지? 바로 가까운 곳에서, 하룻 길 안에서, 한 시간 거리 안에서 번제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3일 길을 걸어가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가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내게 정해진 자리로 가야 한다. 내 집, 내 아내, 내 회사 등 정해진 자리로 가야 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내 교회, 내 기도 자리도 마찬가지이다. 집 앞에 기도처가 있어도 내게 정해진 자리로 간다. 차비가 들고 시간이 걸리고 날씨가 더워도 지정된 자리로 간다. 우리는 무조건 가지만 하나님 앞에서 테스트를 받는 것이다. 정해진 제단으로, 정해진 교회로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계신다. 

2. 드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시험 (창22:9)

아브라함은 3일 길을 걸어 모리아로 가는 동안 이삭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에 도착한다.

창22:9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번제물로 드린다. 하나님의 사자기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고 그 일을 그만 두게 하면서 이 드리는 일이 시험이었다는 것을 공개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셨다. 

독자 이삭은 100세에 얻은 아들이다. 상속자를 얻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이란 씨받이를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로 100세에 기적 같이 아들 이삭이 주어졌다. 이 아들로 인해 모든 시름이 사라졌고 이 아들은 모든 언약이 성취되는 사인이었다. 그런데 이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아픔이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달라는 분도 하나님이라면 드려야 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 나의 사랑, 나의 가문만 바라본다면 드릴 수 없다. 이 땅에서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이삭을 결코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이 드리기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그냥 드린다. 그 순종이 결국 하나님의 달라는 요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알아보려는 시험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옛 이야기에 세상을 떠나게 된 아버지가 세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려는데 시험을 하였다. 외양간의 송아지를 지붕 위로 올려놓으라는 것이었다. 첫째 장남은 아버지가 제 성진이 아니라고 거절하였고 둘째 차남은 아버지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런데 셋째 막내는 외양간에 가서 송아지를 끌어다 놓고 사다리를 준비하여 지붕 위로 올릴 준비를 한다. 아버지의 소원을 기쁘게 이행해 드리려고 애를 쓰는데 아버지가 그만하면 됐다고 하였다. 아들에겐 진짜로 해야 되는 명령으로 다가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테스트하는 시험이었다. 결국 순종한 셋째 아들에게 모든 상속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드릴 수 있는지, 없는지의 사이에 서 있다. 하나님은 나를 시험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말씀을 따라 드리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자식도, 재물도, 명예도 더 소중할 수 없다고 확신하면 드리는 자가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큰 복으로 돌려받는 것이다. 우리는 9월 6일 건축 헌금을 드리게 된다. 성령님의 감동과 말씀의 감동으로 섬김과 드림의 예물을 요구받을 때 빼앗긴다는 유혹에 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를 보여드리는 기회로 알고 순종하라. 예상 못한 100배의 복을 얻게 될 것이다.

3. 약속을 따라 움직이는지, 아닌지를 보는 시험 (창22:5)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순례의 삶이 시작되었다. 약속을 따라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갔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는 내용이었다.(창세기 12장) 그 언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내용이었다. (창15:5)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이지 정말 빼앗아 가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아니 빼앗아가더라도 다시 살려내어 부활시키는 기적으로라도 일으켜야 하나님의 언약이 유지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신실하셨다. 아브라함을 벗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속이거나 실수하신 것이 없으시다. 창22:5을 보면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한다.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번제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말을 자세히 읽어보라. “내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분명히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 예배를 드리지만 아들 이삭과 함께 돌아온다고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부활의 하나님을 믿었다. 아니 약속의 언약이 유효하려면 하나님의 특단의 방법이 있어야 함을 신뢰하였다.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 이삭에게도 창22:8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그냥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면 되지 자기를 위하여 제물을 준비하실까? 언약의 약속 때문이다. 바치는 것으로 끝나면 복의 씨가 끊어진다. 언약은 붕괴된다. 그러므로 무조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삭을 제단 위에 드렸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가 100%다. 그 신뢰의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주저함 없이 결박하고 칼을 든 것이다. 

인간의 정과 생각, 계산은 약속을 따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덤벼들 것이다. 내 아들, 내 독자, 내가 100세에 얻은 아들은 하나님이 주셨건만 내 것이라고 우길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약속을 따라 움직이는 믿음이 있었다. 잘 될 것이고 더 분명한 섭리가 있을 것이고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고 돌려받을 것이며 약속이 깨질 수 없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삶의 미래를 다 맡겨 드렸다.

그는 결국 시험을 통과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준행하는지를 보고자 제시한 세 가지의 시험을 잘 통과하였다. 창22:16~17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겐 큰 축복이 약속되었다. 또 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큰 복의 조상이 된 것은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들도 신앙 생활 속에 똑같은 시험이 있다. 

① 정해진 예배 장소로 가는지, 못 가는지를 보는 시험

②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시험

③ 약속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지, 아닌지를 보는 시험

우리가 시험이라고 알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한 계단, 또 한 계단 올려놓으려고 철저히 테스트하신다. 그 테스트 앞에서 나의 신앙이 점검되고 인정받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된다. 큰 복의 사람이 된다. 믿음과 불신이 싸울 때 성령에 이끌려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시험에 합격자가 되라. 그러면 축복의 근원으로 천하 만민에 복을 주는 사람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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