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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기만 하는 믿음 (눅 8: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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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는 믿음 (눅 8:49~56)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치유사역자인[윤종현 목사님]이 쓴<(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마음학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자신을 마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영적, 심리학적, 가족치료학적인 다양한 통찰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통합해 놓았습니다. 특히 종교인답게 살지 못하는 기독교인,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기독교인,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데도 변화가 없는 기독교인에게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마음 중심에 여전히 예수님이 아닌 자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중심이 변화되고 생각의 뿌리까지 치유할 수 있도록 마음을 이해하고 잘못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변화시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훈련을 받고 나면 성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치유 받고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가면을 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해결된 척하고 자신의 현재를 억압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이러한 착각과 가식이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한 가지가<인정>이라고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얼마만큼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하는지, 얼마나 좋아해 주는지, 얼마나 용납해 주는지에 따라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관계가 꼬이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책 가운데 특별히 인용된 부분에 미국의 <일라이저 미니스트리(Elijah Ministry)>를 이끌고 있는 [존]과[폴라 샌포드(John & Polla Sandford)]라는 사람이 교인들과 상담하는 가운데 하는 말이“하나님을 용서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물론 신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저 '정서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때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돌봐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픔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돌아서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렇게 한 주간을 살다가 주일이면 다시 하나님께 나와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왜 이럽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따지면 벌을 내리시고 고난당하게 하실 것만 같아 원망을 숨긴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마저도 체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상처투성이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를 내려놓기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상처는 굳어지고 원망은 쌓여서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하나님을 용서하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요? 내가 힘들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그 원망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자존심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체면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될 수 있으면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피치 못하게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때로는 그 질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질병으로부터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가 있습니다. 질병을 극복하고 특별히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된 사람들의 자기 간증과 그 심리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질병을 극복한 경험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건강했던 그들이 질병을 앓게 되면서 일어난 일의 첫째는 원망에서 벗어나서 사랑하게 됐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질병이라고 하는 큰 사건을 통해서 그 동안에 사랑받으려고만 했던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원망이 사랑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병을 이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수용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항상 환경에 대해서 반항하고 현실을 곱게 보지 못했던 비틀어진 마음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주어진 현실 속에 있는 중요한 의미를 생각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마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죽음의 질병 앞에서는 아무도 비판하지도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도 않고 어떤 사람이라도 아니 성경대로 원수까지도 다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용서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질 때 병을 이길 수 있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원망도, 반항도, 용서도 내가 붙잡고 있을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넘어섰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기적이지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얻으려면 인간의 영역을 벗어버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리입니다. 

유명한 정신의학자로 잘 알려진[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여러분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치에 체포되어서 3년 동안 강제노동수용소에 지옥과 같은 고생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중에 아내도 부모도 형제도 다 잃었고 장티푸스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그가 한 말이“삶의 궁극적 의미는 반드시 이해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삶이란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의 판단이나 인간의 이해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 그 너머에 있는 믿음을 가지고 의미를 추구해야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내 인생을 내가 개척해 나가고 내 삶을 내가 보람 되게 만들어 가는 것 같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정말 인생에 중요한 것은 내 모든 노력, 내 모든 지식 너머에 있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떨어질 수 없는 삶의 두 과정이 나옵니다. 바로 질병이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회당장인[야이로]의 딸이 병들었습니다. 그런데 중병입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잠시 뒤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 딸이 죽었답니다.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들과도 정말 친숙한 질병과 죽음이라는 두 사건을 중심으로 오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 또한 이 두 사건으로부터 오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회당장인[야이로]에게는 외동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 막 5장 42절에 보면 이 딸의 나이가 나오는데 12살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로 이해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한참 귀여운 그 딸이 지금 병들어 있습니다. 그것도 소생의 가능성이 희박한 죽음의 병에 걸려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중병이든 경한 병이든 간에 병든다는 사실 자체가 괴로운 겁니다. 

세상에 누구도 병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이 걸린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언제나 이해 그 이상의 사건입니다. 보세요. “어디를 봐도 병 걸릴 것 같지 않고 멀쩡하던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그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더라.”하는 것이 이해 이상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 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누구나 언제든지 충분히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우리의 이해로 해결하거나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질병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혹은 사탄의 저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시험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결과는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질병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나!’라든가‘하는 짓이 그 모양이니 사탄의 저주를 받는 게지!’라는 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세요. 바로 우리의 이해 이상의 사건이 됩니다. 딸이 중병에 걸려서 죽게 된 이 사건이 아버지인 회당장[야이로]를 예수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도록 만듭니다. 이 자체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당시의 회당장이라면 공동체의 지도자입니다. 회당의 사업을 감독하고 회당 건물도 책임지고 예배 시에 구약을 낭독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지방유지요, 정치적으로는 최고의 실력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곧 교만할만한 사람이요, 자기 명예에 부풀어 살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많은 사람 앞에 잘 굽실거리거나 자신을 낮추는 일에 상당히 서투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봐도 예수 믿은 지 10년만 넘어서면 교회 안에서 괜히 잘난 척하고 싶고 거기에다가 직분이라도 가지면 교만해져서 자기 외에는 없는 것처럼 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그런 그가 나이 서른밖에 안 되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에게 가서 쉽게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기록합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답답하면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겠습니까마는 다시 생각을 해봅시다. 이렇게 딸이 병들었다는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 사람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딸이 앓고 있는 질병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이 가정의 현실적 불행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이 원치 않는 사건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까? 바로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진실하게 만들었고 예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보통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과 우리의 이해 이상의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병들지 않고는 깨닫지 못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부르지 못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드리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 앞에 회당장[야이로]는 그간의 지식이나 명예나 지위를 다 버리고 이 사건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새로운 의미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지금까지 나의 삶과 전혀 다른 인생의 발걸음을 옮기도록 믿음의 동기를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는 도중에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딸이 죽었나이다. 그런고로 예수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세요.”합니다. 아까는 병중이었지만 지금은 죽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야이로]는 대단히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됩니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병들었다고 하던 딸이 죽었답니다. 아마도 머리가 하얘지고 하늘이 노랬을 것입니다. 

이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계속 가야겠습니까? 아니면 끝내고 말아야 하겠습니까? 짧은 순간[야이로]의 머리는 복잡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여러분이[야이로]였다면 이 순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아멘”할 수 있는 시간입니까? 

유명한[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명언이 있습니다.“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위하여서는 네 이성을 제한하라.”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은 언제나 내 이성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성으로는 끝난 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끝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야이로]는 바로 이 기로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딸이 죽었다는 자기 집으로 갑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행동자체가 믿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야이로]로서는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서는 시작입니다. 때로 우리가 하는 실수도 이것입니다. 섣불리 끝났다고 하지 마세요. 주님은 시작이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각해서 안 된다고 해서 안 되는 것입니까? 내가 끝났다고 해서 정말 끝나는 것입니까?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너무 일찍 실망을 하고 포기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도망하고 파산하기가 일쑤입니다. 때로는 질병이라고 하는 사건은 불행이요, 실패요, 원치 않는 사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만 아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질병과 죽음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의 사건입니까? 그 중요한 사실 앞에서 오늘“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바 어떤 믿음을 의미하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으로만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영력을 잃으면 영혼이 시든다. / 그대가 가지고 있는 믿음만큼 젊고 의심만큼 늙는다. / 자신감만큼 젊고 두려운 만큼 늙는다. 희망만큼 젊고 실망만큼 늙는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는 믿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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