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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을 우러러 주목한 사람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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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주목한 사람 (행 7:54~60)


우리는 새벽기도 시간에 사도행전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제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때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던 유대인-디아스포라 출신인데,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새로운 기독교공동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예수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외국에서 온 사람들로 본토에 아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자기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예루살렘에 오고 보니 말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 때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행6:2-3)라고 했습니다.  온 교회는 사도들의 제안을 받고, 기뻐하면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일꾼을 세웠습니다. 

초대교회의 귀한 일꾼 7명은 집사라고 부르지만, 성서신학자들은 교회 최초의 일꾼에게 마땅한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뿐이지, 후에 장로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의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서 7집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7집사님 중에 스데반이나 빌립을 보면 다만 구제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전도에 앞장서고 능력 있는 지도자들이 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을 보면 복음전도와 능력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이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란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테파노스’라고 하는데, 그 뜻이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이름대로 순교의 면류관을 쓰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쓰신 집사님이십니다.   

7집사님들은 사도들이 안수하여 세운 교회의 일꾼입니다. 안수는 성직을 위임하고,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고, 전가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성별하여 세우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집사님들이 믿음이 있었고, 성령이 충만하였고,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었어도, 이제부터 공적인 지도자요, 일꾼임을 만천하에 공포하시면서 안수하여 임직하였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사역을 정당성을 인정받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습니다.  행6:8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행한 기사와 표적이 무엇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으며,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당시에 예상해볼 수 있는 기사와 표적은 병을 고친다든지, 귀신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일어나 설교하면 그를 반박하거나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 사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외국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는 자유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유인이라고 하면 본래는 유대인이었으나, 주전53년 폼페이우수가 쳐들어와 유대를 정복하고수많은 유대인들을 노예로 끌고 가서 로마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그들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 자유인들에게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구레네에서 돌아온 사람들, 알랙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스데반을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씀하는데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행6:10에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자유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이 사람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고 공회에 제소하게 하였습니다.   자유인들은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렀습니다.   

거짓증인들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6:13-14)라고 모함하였습니다.   “이곳을 헐고”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을 헌다는 말인데, 전에 예수님을 잡아 죽이던 유대인들이 하는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 유대 교권자들은 다시 스데반을 성전 모독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라고 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죽음으로 몰아가는 극한 상황인데, 자기를 모함하는 사람들이 둘러 있는데, 그래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도 경건한 사람, 그 얼굴에 진지함이 있고, 성숙한 면모를 보이는 사람을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순수한 은혜가 넘칠 때에 영광스러운 광채가 나고, 풍기는 온화함으로 보는 이들로 감동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을 가진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두 돌판에 율법의 십계명의 말씀을 하나님에게 받아가지고 산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모세가 증거의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기게 그를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생 계속된 것은 아니고, 율법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올 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50이 되고 60이 되면 예쁘다, 예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밝은 표정이 있고, 어두운 표정이 보입니다.   천사의 얼굴이 있고, 어둡게 그늘진 얼굴이 있다는 말입니다.    천사의 얼굴을 가지시고, 밝고 긍정적인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곱게 늙어가야 합니다. 

스데반은 백성들에게 잡혀 끌려가서 공회 앞에 세워졌습니다.  이제부터 대제사장의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네가 성전을 헐겠다고 했느냐,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고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스데반의 장문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수없이 원망하였고,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우상숭배와 범죄로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은혜의 하나님, 복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 공회에 잡아 세우고 핍박하는 이들을 보면서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바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2-53)라고 외쳤습니다.  의인이라고 하면 메시아,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옛날 의인이 오신다고 예언하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더니, 이제는 그 의인 예수를 잡았으며, 살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제 유대 교권자들을 향하여 예수를 잡아 죽인 살인자들이라고 지적할 때에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찔림은 회개로 이어지지 않고,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교권을 유지하려는 집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교권자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간다는 말은 머리에 재를 뿌리거나, 옷을 찢거나 하는 행위와 유사한 행위입니다.  극심한 분노를 나타내었습니다.  죽이고 싶을 때에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이 전에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 순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기독교 역사상 처음 순교자를 내는 순간이요, 그런 자리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그런 무서운 순교의 자리를 감당하게 역사하시고 충만하게 임하여 주셨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외칩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했지, 일어나 서 계신다는 말은 이곳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주석학자들의 견해는 몇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주장하는 견해는 환영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순교자 스데반집사님이 첫 순교자로 하늘나라에 올라오는데, 첫번 순교자를 환영하시기 위하여 서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환영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격려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마지막 순간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요, 신앙의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 스데반을 응원하고 힘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격려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격려를 받아야 힘을 얻고, 주님이 응원해주실 때에 순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늘이 열린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시고 앉아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는 사람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기고 흔연히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고, 권력을 바라보고, 물질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면 순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우리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을 바라보십시오. 

유대 교권자들은 체면도 없습니다. 사리 분별도 없습니다.  자기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는데, 최고 지도자들이란 자들이 폭도로 돌변합니다.  그들이 일제히 큰 소리를 지릅니다.    귀를 막고 누구의 소리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 내치고 돌로 쳐 죽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묻은 옷을 증인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후에 사울이 회개하여 바울사도가 됩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스데반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마지막 죽어가는 스데반은 주님을 우러러 바라보는 순간에 주님이 죽으실 때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주님이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린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했습니다.  스데반도 먼저 자신의 영혼을 주님에게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영혼을 받아달라는 기도는 아주 중요한 기도요, 마지막 우리의 전부를 주님에게 맡기는 기도입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기도합시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죽어가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크게 외쳐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생애를 본받고 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는 말은 죽었다는 말 대신에 완곡하고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생애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돌에 얻어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돌이 인정사정없이 머리와 가슴과 얼굴과 목, 온몸에 날아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온 몸을 떨게 합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옵니다.  이러다가 조금 후에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강심장의 사람들도 두려워지는 것이 사실이요, 지금 누구라도 두려워 떨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요, 평안히 잠을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려운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을 우러러 바라보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가야하는 길, 십자가의 길을 반드시 끝까지 걸어가겠다는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계획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눅13: 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가야 하는 길, 주님만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교회의 순교자는 우리 주님이 첫 열매요, 스데반이 두 번째의 열매로 순교의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순교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튀레스’라고 하는데 그 말은 ‘증인’이라는 동의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순교자라는 뜻은 증인,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증인을 세울 때는 두 사람 이상을 세워야 증인으로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증인이 된다는 말은 그 진실을 증거하는데 생명을 내 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도 죽기를 각오해야만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살다가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순교의 자리에 들어갑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널리 증거하고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 이래 성도들은 순교를 통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의 익나티우스 감독은 “나는 주를 위하여 순교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떡으로 만들어지는 반죽이 되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회 안에 순교자라고 하면 모두 주님을 위한 순교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나 일본의 신도이즘에 반대하다가 죽으신 성도들은 마땅히 순교자입니다.   공산당 치하에서 순교하신 분, 이슬람교 사회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순교하신 분들 모두 순교자들입니다.  

그런데 개신 교회와 구교 가톨릭교회와 종교전쟁으로 죽은 사람이라든지, 같은 개신교회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런 순교도 있습니다. 이렇게 나온 순교자를 “교파 수호를 위한 순교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옛날에만 순교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일의 히틀러에게 대항하다가 죽은 본회퍼 목사를 비롯하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죽은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나 흑인의 인권운동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백인의 총탄에 죽은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 같은 분들도 현대의 순교자들입니다. 동유럽의 동방 정교회 성도들은 세계 제1차 대전 때에 터키의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백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순교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본받아야 할 재산으로 알아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우리의 살고 죽는 능력이 되십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바울이 흘린 피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지하묘소 카타콤 교회의 소리와 콜로세움의 순교자들의 외침을 들어야 하고,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내 던진 신앙의 선배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을 본받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이 때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있는 성령의 내재하고 내주하는 것만이 아니라, 폭발적인 능력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였는데, 어떤 무아지경에 이르거나 황홀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여지고 말씀에 대한 확신에 사로잡히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곧 예수 충만이요, 성경 말씀 충만인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하고 보니 그 눈에는 세상이 보이지 않고 하늘나라가 보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일어나서 응원하고 격려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 영안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어떻게 죽고 싶습니까?   사람은 잘 죽어야 됩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이 장엄한 순교를 보세요. 이 영광된 시간을 보세요. 부럽지 않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주님의 영접을 받는 저 스데반을 보세요.  성령충만 합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직 밝은 마음과 소망과 영광과 천사의 얼굴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터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진다고 하여도 마지막 최선을 다하여 무릎을 꿇어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가다듬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응원하시면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주님 안에서 잠에 들었습니다. 순교는 마치 잠자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평온한 죽음이었던지 마치 잠자는 것 같았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부흥사요, 목회자인 스펄젼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 말고 자꾸 우는 것이었습니다.  훌쩍훌쩍 울어서 사모님이 옆에서 ‘왜 우시느냐?’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요즈음 웬일인지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감격이 없어요.   이것은 신앙적 위기야” 그러면서 울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생각하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며 큰 감격이 있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따라 가장 아름다운 죽음 순교의 자리에까지 들어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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