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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돌보아 주는 사람 (사 6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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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돌보아 주는 사람 (사 66:1~4)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설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입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람을 신으로 추앙하고 섬기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중에서도 죽은 사람을 신으로 떠받드는 경우도 우상 숭배지만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을 신으로 떠받들고 섬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일수록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과거에 왕조에서 왕들이 자신이 신이라고 했던 왕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단명합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12:23절에 보면 ‘헤롯 왕’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자신이 신처럼 행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그냥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쳐서 벌레에 먹혀 갑자기 죽게 합니다. 
행12:23을 보세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뭐가 먹어 죽었습니까? 벌레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바이러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볼때마다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만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고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예배(worship)가 뭡니까? 
인간이 절대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성경은 예배를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요 본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예배 받기를 원하시고 당신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수없이 많은 곳에서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이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인간이 참된 예배를 드릴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과 신실성이 결여된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분의 맹렬한 진노만을 촉발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말씀을 보세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의 본질을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것에만 치우쳐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외적인 형식, 무가치한 것만은 아닙니다. 형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입니다. 즉 내면적인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열납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에 참된 예배는 실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나와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가 아니고 우리의 삶속에서 드리는 모든 삶이 다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인생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Coram Deo)에서의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삶, 직장에서의 삶, 우리의 생활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의식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 와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릴 때도 아무리 값진 것을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부정한 방법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하나님이 받지 않는 것입니다. 
또 아름다운 찬송을 드릴지라도 평상시 이웃에 대해 참소하는 혀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물과 찬양이라면 하나님이 역겨워 하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그런 것은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명심하세요.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이 받으시면 /최고의 제물이 되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최악의 쓰레기가 된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러기에 예배에 성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돌아보아 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할까요?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봉독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할렐루야! 
  
여기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 구절이 우리의 마음을 잡습니다. 
옛날 성경에는 “내가 권고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돌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십니다. 
  
본문 2절 중간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여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누굴 말하는 것일까요? 
돈이 없는 사람일까요? 일할 능력이 없어 궁핍한 사람일까요?. 고아와 과부를 말할까요? 물론 그들 중에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마음에 탐욕이 가득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무익하며 하나님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다고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도움이시오 보호자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5:3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빈부격차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라면으로 한 끼를 해결해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넉넉하셔서 한끼에 4~5만원하는 식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경제적으로 가난하다하여 마음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다고 심령이 부자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겸손히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천국의 상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을 위해 어떤 대가도 지불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일이라면 목숨도 내어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습니까?벨기에에 나병 환자의 아버지인 ‘따미엔’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님은 대단한 갑부였습니다. 부모님의 재산으로 일평생 호의호식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따미엔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절망의 땅, ‘몰로카이 섬’로 갔습니다. 그곳은 우리나라의 소록도와 같은 곳입니다.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곳에 가서 나병환자들과 똑같이 움막에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둔 밤길을 걸어서 움막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환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됐습니다. “따미엔! 흥, 자기야 몸이 성하니까 배부른 소리를 하지.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려서 몸이 썩어 들어가 봐. 어디에서 소망을 찾고 하나님을 찾겠어, 웃기고 있어…” 그 이야기를 들은 따미엔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움막에서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 제게도 문둥병을 허락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는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자의 상처를 어루만졌고 고름을 빨아내며 함께 그들의 피를 만졌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의 몸의 감각은 무뎌졌고, 눈썹마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마디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에게도 나병이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따미엔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가 저들 앞에서 ‘우리'라는 말을 떳떳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제게 문둥병을 허락해 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는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문둥병에 걸린 우리들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나병 환자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따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던 몰로카이가 소망과 생명이 넘치는 섬으로 바뀌어 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가난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우상과 욕심과 교만한 마음을 다 비우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복을 나누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돌보아 주십니다. 
  
2. 통회하는 사람을 돌보십니다. 

본문 2절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여기 “심령에 통회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통회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으로는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돌아보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심령에 통회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1)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불의에 대한 통회를 해야 합니다. 2)더 나아가 자기를 들어내며 자랑했던 ‘자기 의’에 대한 통회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고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예배가 열납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민족적인 우상숭배하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경건한 사람들이 통회 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 받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는 애통하는 모든 자에게 내려집니다. 애통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가롯 유다와 같이 비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베드로더 더 나뿐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애통하며 회개를 기회를 잡았고 가롯 유다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여자의 일생”이라는 작품을 쓴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학교를 퇴학당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방황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자 퇴학을 시킨 것입니다. 그 후에 신앙과 결별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가 주인이 된 인생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에 그는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해서 10년 만에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작품마다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파리에는 호화아파트를 가지고 쉴 새 없이 아내와 애인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허랑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습니다. 그의 은행에는 쓰고도 남는 수억의 돈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는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잠을 자지 못합니다. 1892년 1월1일 밝아온 새해 아침, 그는 살아야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못하고 자기가 항상 사용했던 종이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이미 정신병자가 된 그는 정신병동에서 몇 달 동안 알 수없는 말을 하며 허공을 향해서 절규하다가 그의 나이 4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칩니다. 
그의 무덤 묘비명에는 그의 말년에 쉴 새 없이 하던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지만 실상은 비참한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많은 명성, 부귀영화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없는 자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는 그 어디에도 평안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세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할렐루야! 
그렇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누린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십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는 것입니다. 
돈이, 건강이, 권력이 주는 평안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합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통회하는 자에게 평안이 임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위로가 있습니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 속에 있는 죄를 통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심령에 통회를 하는 사람을 돌보아 주십니다. 
  
3. 말씀을 따르는 사람을 돌보십니다. 
  
본문 2절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을 돌보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새 번역 성경에는 “나를 두려워하고 내 말을 따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듣고 따르는 사람을 하나님은 제일 좋아하십니다. 
목사도 목회를 할 때 보면 설교를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성도를 좋아합니다. 어떤 성도가 제일 예쁜지 아십니까? 말씀을 들을 때 아멘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아멘을 잘하면 생각이 딴데 가지를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이유가 뭘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찌 그냥 두시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세요.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결국 약속대로 엄청난 복을 누렸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어린 사무엘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 나올 때 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합시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마르다 동생 마리아도 좋은 것을 선택하였다고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앉아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 때 그는 그를 칭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을 헤아리자면 수없이 많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따르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하시고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냥 무턱대고 따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지 말고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열매가 맺어집니다. 
  
옛날 평안북도 정주에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백 사겸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 지역에 외국인 선교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을 짓게 되었는데 재정이 부족해서 완성을 못했습니다. 그때 백 사겸은 자신의 땅 전부를, 1000평을 팔아서 교회를 완성했습니다. 

이 일에 선교사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땅을 다 팔았으니 이제 뭘 먹고 살겠습니까? 결국 선교사는 예배당이 건축된 그날 백사겸을 그 교회의 사찰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평양에 데려다 공부를 시켜 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파커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프린스턴 신학교와 프린스턴 대학원을 졸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일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박사, 인문학박사, 법학박사, 문학박사 학위까지 5개 학위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바로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6.25때 우리나라 문교부 장관을 지낸 백낙준 박사입니다. 

백낙준 박사가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아무리 노력을 했더라도 농부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하나님께 헌신하니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평범하게 예수를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온전히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고 말씀에 헌신하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을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신분상승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면 신분이 상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귀족이 됩니다. 하나님 자녀면 하늘의 귀족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적 신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나를 믿어 달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끝까지 믿고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돌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입니다. 믿음의 그릇이 적으면 누리는 복도 적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회복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나님이 손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을 손보실까요? 우상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 형식적으로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손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마음이 가난한 사람, 통회하는 사람,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좋아하시고 크게 돌보아 주시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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