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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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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6)


우리가 만일 어느 사람에 대하여 저 사람은 믿음이 없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비판으로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는 믿음이 있다는 얘기냐,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믿음이 없지만 장차 믿음이 생기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누구를 보고 저 사람은 사랑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예사로운 말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에 대한 치명타가 될 것이고 특별히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치명적인 비판의 말이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교회에 대하여 저 교회는 은혜가 없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지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좀 더 기도를 해야 되겠지요, 좀 더 노력해야 되겠지요, 장차 나아지겠지요, 이렇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저 교회는 사랑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아주 뼈아픈 지적이 될 것입니다. 그 교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단정적인 평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든가 교양이 없다든가 지식이 없다든가 이런 문제는 개선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는 것은 쉽게 개선할 수 없다는 데에 더 큰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사랑이 없다고 지적을 받았을 때 당장 그 사람에게 얻을 수 있는 반응은 무엇이냐면 매너의 변화, 표정의 변화, 친절한 대응방법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고들 말하니까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위의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없었던 사랑이 생긴다는 얘기냐.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남들이 내가 사랑이 없다고들 말하니까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한 어떤 외적인 행동의 변화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연기 내지는 위선이 될 수가 있고 직업의식의 발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미소 짓는 연습. 거울을 들여다보고 미소 짓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미소를 지으라.

제가 과거에 국내 항공사를 이용할 때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항공사 승무원들이 탑승 전 공항 대합실에 앉아있을 때는 도도하고 승객들과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쌀쌀할 수가 없는데 일단 비행기에 탑승하면 천사처럼 변신하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저는 언제 모습이 진짜라는 것이냐 대합실에서의 그 쌀쌀한 모습이 진짜냐, 아니면 탑승한 후에 천사처럼 친절한 모습이 진짜 모습이냐, 아니면 고객을 대하는 직업의식일 뿐이냐. 다시 말하면 외적인 매너만 가지고는 사랑의 유무를 알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언제부턴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열매 내지는 성취라고 여기게 되었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고 일반 대중도 사랑이 최고의 덕목이고 사랑만 있으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이 지배적인 생각이 되었습니다. 비틀즈가 부른 유명한 노래 ‘All You Need Is Love-우리가 필요한 것은 사랑뿐입니다.’ 

이런 노래를 듣다보면 사람들은 마음이 흥분되고 당장이라고 세상이 낙원으로 바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되지요. 사랑, 사랑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이다. 사람이 악하게 되는 것, 비뚤어지게 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사랑이 최고의 덕목인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충분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고 사도 요한도 ‘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사랑은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얘기냐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만을 따지는 것이 자칫하면 최고의 인본주의적인 발상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없어도 사람들끼리 사랑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낙원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서로 사랑만 한다면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지옥이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천국이고 그게 기독교 아니겠느냐. 그게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굳이 하나님을 논하지 않아도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만 한다면 인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 All You Need Is Love 이 말의 올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곡을 작사 작곡한 존 레논이 어떤 사람이냐를 굳이 말할 필요 없이 사랑이 필요하지만 사랑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다는 얘기냐.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냐. 맞아, 맞아. 사랑만으로는 못살아, 그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랑이 무력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무력함. 무력한 사랑.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요. 그러나 자녀가 아플 때 부모의 그 모든 사랑으로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가져온다고 해도 고칠 수 없는 문제가 이 세상에 있어요. 그럴 때 우리는 사랑의 무력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자기 자녀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버지가 데려오기도 하고 어머니가 데리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 부모가 사랑이 없어서 그 문제를 고치지 못했습니까. 사랑하는데도 낫지 않으니까 본인들의 사랑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의 사랑과 정성만으로 고칠 수 없었던 문제를 예수님께 부탁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사랑을 요구하셨습니까. 아니에요.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국내에 소개가 되지는 않았지만 인포머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80년대에 미국 할리우드에 사는 미국 부자들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세상에서 사람이 원할만한 것은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돈 ․ 건강 ․ 젊음 ․ 미모 ․ 친구 ․ 애정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인생이 공허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잘 몰라요. 그러다 보니까 그들이 마약 ․ 술 ․ 쾌락에 탐닉합니다. 젊은이들도 그렇고 그들의 부모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같이 가진 건 많은데, 아마 사람들은 ‘가진 게 많아도 진정한 사랑이 없어서 그럴 거야.’ 천만의 말씀! 그들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사랑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친구들이 늘 차고 넘치고 남자친구 여자 친구도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명이 있고 주변에 같이 파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그런데도 인생이 공허해요. 그 많은 친구와 애정을 받는 것 같은데도 인생이 공허해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 몰라요. 그리고 누가 나의 진짜 친구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요. 저 사람이 내 돈이 좋은 것인지 내 외모 때문에 저러는 것인지 나를 이용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부모도 자기의 삶에 너무 연연하다보니까 어떻게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부모도 자기가 잘났고 자기의 쾌락과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다보니까 자녀에게 어떻게 부모가 되어주는지도 알지 못하고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자녀를 어떻게 훈육해야 되는지도 몰라요. 자기 자신의 삶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부모가 어떻게 자녀의 삶을 컨트롤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공허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사랑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사랑에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랑만 말하지도 않았고 믿음만 말하지도 않았어요.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랑 그것도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다시 말하면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할 때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지만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할 때 거기에 효력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믿음의 능력이 사랑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믿음이 있고 그리고 그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할 때 효력이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 그냥 사람들끼리 사랑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치 사랑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사랑이 모든 종교나 윤리의 최고 덕목인 것처럼 생각하다보니까 하나님을 배제한 사랑 ․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노력 ․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의로움 ․ 하나님을 배제한 착함 ․ 하나님을 배재한 인간, 결국 인간은 다시 자기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경험한 것은 소외입니다. 

자기 소외.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에서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이 스스로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나무 뒤에 숨지 않습니까. 인간의 소외 현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사랑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애정이든 인간의 어떤 것이든 그 의미가 상실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인포머라는 영화에 주인공의 여자 친구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어요. 1980년대를 무대로 한 영화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에이즈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때에요. 그러니까 그 여성에 에이즈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연락이 안되고 제3자가 겨우 그 여성의 남자친구인 주인공에게 연락했어요. 오라고 합니다. 남자친구가 도착해서 물어봅니다. 

왜 나를 불렀냐고. 그랬더니 제3자가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불렀다 그 때 명대사가 나옵니다. ‘What''s that got to do with anything?-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냐? can love fix anything?-사랑이 무엇을 고칠 수 있다는 얘기냐?’ 저는 지금까지 그런 대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로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잘 묘사했다고 봤습니다. 

인간의 사랑의 한계. 우리는 사랑에 목마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조금만 사랑을 더 받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이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랑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잘 몰라요. 사랑의 무력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그것을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유는 충분한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아니고 사랑 자체가 한계가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내게 흡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든 친구의 사랑이든 인간의 사랑에 한계가 있다 보니까 나는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내 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랑을, 세상에 있는 사랑을 다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목마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닙니까.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 명이고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은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그걸 보고 참 불쌍한 여자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합니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면 굉장히 유복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걸 불쌍한 여자고 제대로 사랑을 못해봤고… 남들보다 사랑 더 많이 했어요. 사랑 많이 받아봤어요. 그런데도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려니와~’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받은 것 같지만 여전히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그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사랑의 무력함 때문입니다. 사랑의 한계에요. 허무함 앞에 서있는 인간에게 사랑은 무의미합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사랑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얘기냐. 허무함 앞에 서있는 인간에게 사랑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사랑이 더 슬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허무하다고 보기 때문에 사랑 자체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서야 사랑에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랑으로써 믿음이 역사할 때만이 거기에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힘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받아주셨고 그 사랑을 통하여 우리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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