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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안 공동체를 꿈꾸며 (암 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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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공동체를 꿈꾸며 (암 9:11~15)


(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 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15)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윗의 천막을 일으키고

오늘 말씀의 분위기는 그동안과는 너무 다릅니다. 아모스는 모든 예언을 이스라엘의 죄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예언의 마침은 그에 대한 대가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5:2)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6:8)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8:1)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9:1) 아모스서 곳곳에서는 이런 심판의 말씀이 메아리칩니다.

오늘 말씀은 아모스서에 나오는 유일한 희망과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심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아모스는 현 이스라엘 체제의 철저한 실패를 선언하고 그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새로운 세상을 말하는 순간 현 이스라엘의 해체는 급속도록 진행됩니다. 더 이상 지금의 체제에서는 일말의 희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비판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안 사회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단지 심판과 비판의 메시지만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희망과 대안 공동체를 제시하며 나아갔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그가 부름을 받던 1장 10절의 여섯 개의 동사로 압축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1:10) 4개의 동사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은 심판의 사역입니다. 2개의 동사 건설하고 심는 것은 회복의 사역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심판의 사역이 더 많았습니다. 죄가 관영하여 바벨론에게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주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판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새 공동체를 세워 자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31:33) 이 새 언약이라는 말에서 ‘신약’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공동체를 내다보며 예언을 하였고 준비시켰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형성된 공동체, 그리고 포로기에서 돌아와 이스라엘을 새롭게 시작한 공동체가 바로 예레미야가 준비시켰던 공동체였습니다.

아모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은 도무지 희망이 없습니다. 여로보암 왕이나 제사장 아마샤로 대표되는 지도체제는 더 이상 변화의 소망이 없습니다. 아모스는 그들을 향하여 날카로운 비판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비판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새로운 대안 공동체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빼어든 무기는 바로 다윗 왕조의 부활입니다. 11절입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아모스는 예언자들 중 처음으로 다윗 시대로 돌아가자는 새 나라의 모델을 제시한 예언자였습니다. 다윗 시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부강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부강함이 지금처럼 불의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그에 대한 축복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열왕기에서는 다윗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15:5)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행13:22)는 평가를 받았던 왕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는 공법과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던 시대였습니다. 다윗 왕의 업적을 계승한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왕상4:25, 표준새번역) 자기 포도나무 아래 평안히 거하는 것 이것이 정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 예언은 남 유다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할 것이라는 그런 예언이 아닙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유사한 시대에 남쪽에서는 미가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예언의 내용도 아모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회복이 그들의 주된 메시지였습니다. 아모스가 꿈꾸었던 새 시대는 공법과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다윗 시대의 회복이었으며 그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진 그런 틈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된 통일왕국 건설의 꿈이었습니다.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움직이려 할 때 단순한 비판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제시될 때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 때 출애굽이라는 비판의 힘만 가지고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는 희망과 대안을 제시했기에 수백만의 히브리인들이 그 길을 따랐고, 광야 40년의 혹독한 시련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일은 12제자로 상징되는 새로운 대안 공동체의 건설이었습니다. 낡고 헌 부대에 대한 비판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가죽 부대를 터트릴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포도주마저 못쓰게 만듭니다. 새 부대가 만들어지거나 희망이 제시될 때 낡은 가죽 부대의 해체는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고, 포도주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12제자 공동체에 의해서 교회가 탄생했고 이 교회가 팔레스틴이라는 좁은 땅을 넘어 전 로마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희망과 대안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는 희망과 비전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국사에는 시대마다 뚜렷한 비전들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조국 독립’이라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싸우는 ‘전사’가 필요했습니다. 가난하고 못살던 시대에는 ‘근대화, 산업화’라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성실히 일하는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독재와 억압의 시기에는 ‘민주화’라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거리의 ‘투사’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민족을 이끌고 나갈 비전이 무엇입니까? 그 대안 세력은 무엇입니까? 지금은 비전이 안개 속에 있습니다. 비전이 보이지 않으니 건강한 도덕성도 상실되고 이기주의만이 만연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29:18)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통일이라는 비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의 뚜렷한 비전으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통일은 번거롭고 성가신 비전이 되었고, 우리 사회는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 극단적인 이기심의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삶은 결코  자신의 행복도 민족의 발전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통일이 비전이 되는 것은 보다 큰 꿈을 위해서 자신의 작은 것은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양보하고 희생하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운 평화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통일과 평화가 살아 있는 비전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다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무수한 비판들이 있습니다. 이 비판들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이나 비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성장추구와 이기적 축복에만 여념이 없는 그런 영성을 대체할 새로운 영성 공동체의 출현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중세시대에는 성 프랜시스와 그 작은 형제단의 출현이 있었기에 중세 교회는 부패와 무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황폐한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이 다 무너져 가고 있다.” 그는 이 부름에 순종하여 중세 교회를 새롭게 짓기 시작합니다. 그가 갔던 청빈의 길, 구제와 선교의 길, 비움과 성화의 길은 중세 사회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비판보다 중요한 것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대안이 제시되면 낡은 가죽 부대는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대안공동체의 탄생이 시급합니다. 

우리 각 개인들에게도 희망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녀 교육에 목을 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소박한 기대입니다. 우리 인생에 무언가 나은 미래가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인생은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젊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이 무엇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것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그 희망 때문입니다. 오늘을 사는 청년들의 비극은 그들이 꿈을 꾸기에는 현실이 너무 각박하다는 것입니다. 당장 취직하고 빚을 정리하고 결혼하기에 벅찬 현실입니다. 청년이 꿈을 꾸지 않는 시대는 불행하고 그 사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계속 ‘꿈 너머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그 나이 120세가 되도록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신34:7) 했던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다면 우리에게 은퇴라는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꿈을 꾸게 해주기시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만국을 기업으로

아모스가 꿈꾸었던 다윗 왕조의 회복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12절입니다.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에돔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를 가리킵니다. 에돔은 경쟁 관계에 있는 나라지만 이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꿈꾸었던 나라는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회복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서서 만국을 기업으로 삼는 보다 세계적인 꿈이었습니다. 

아모스는 그의 메시지를 시작할 때 이스라엘 주변 민족의 죄를 책망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죄를 부각시키기 위해 전술적인 효과만을 노린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의 시각은 항상 세계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권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주변 나라들에게도 정의를 원하십니다. 아모스가 믿었던 하나님은 온 세계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며 온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만군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를 ‘복의 근원’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샘물이 터져 그 이웃나라도 복을 받는 꿈입니다. 이스라엘은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결코 작은 민족주의에 사로잡힐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층과 예수님의 충돌이 빚어지고,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사도 바울의 충돌이 빚어졌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꿈의 크기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층들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회복,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율법 엘리트들만이 참여하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유한 자만이 아니라 죄인들과 가난한 자도 함께 하는 나라,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하는 우주의 대가족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율법과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중심주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온 세상임을 알고 그는 유대의 특권들을 다 버렸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유대의 작은 틀을 벗어나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꿈도 저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의 비전은 분단된 국가가 하나가 된다는 민족사적인 의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과 갈등이 그치고 동북아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더 큰 그림입니다. 서로 원수 된 사람들이 하나 되어 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함께 사는 모델을 제시한다는 보다 문화적이고 정신사적 차원의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김구 선생님이 ‘나의 소원’ 이라는 글에서 꿈꾸었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은 문화로 세계를 경영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가 통일을 통하여 서로 함께 사는 법과 평화를 이루는 법을 보여준다면 세계의 문화와 정신성을 높이는 위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세계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모델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나 우리 마음도 세상을 향하여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자기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을 쌓은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 길을 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을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하여 다시 회복되는 다윗의 장막에 풍요로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여름이 건기라서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때는 더 이상 농한기라는 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13절 이하에 그 기름진 축복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추수하는 자의 뒤를 따라서 밭을 가는 자가 땅을 일굽니다. 추수하자마다 바삐 씨를 뿌리기 위해서입니다. 

씨를 뿌리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포도를 밟을 준비를 하느라 바쁩니다. 땅이 기름지고 자연 환경이 적합해서 씨를 뿌리고 거두기에 정신이 없는 모습입니다. 산마다 포도주를 만드는 데 차고 넘칠 정도여서 “산들이 단 포도주를 흘린다”고 묘사합니다. 작은 산들 또한 열매로 가득하여 그 열매에서 뚝뚝 떨어지는 즙으로 말미암아 산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풍요의 약속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단지 유토피아적인 말씀인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성서에서는 가나안 땅을 흔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스라엘의 지도를 한 번 보십시오. 그곳에 파란 색으로 표시된 곳이 별로 없습니다. 

해안가에만 녹색의 띠로 표시된 평야지대가 있을 뿐 대부분 고동색의 산지입니다. 비도 많이 오지 않고 큰 강도 없습니다. 그나마 광야가 많고 돌멩이 투성이고 석회암 지대라서 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에 비하면 애굽 땅이 이 표현에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였을까요?

그 말씀의 의미는 현대 이스라엘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성지순례를 자주 가는데 성지순례 하다 보면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를 방문하면서 드는 느낌은 좀 더럽고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건물들은 짓다 만 것처럼 보이고 화장실은 불결합니다. 음식도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다 이집트에서 국경을 통과하여 이스라엘에 접어든 순간 마치 시골에서 도시로 온 것처럼 풍경이 바뀝니다. 깨끗한 집들이 서 있고 푸른 정원과 화단이 있습니다. 곳곳에 푸른 야자수 열매와 각양 과실들이 가득합니다. 전에는 애굽이 낙원같고 이스라엘이 황무지 같았는데 이제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민족이 어떤가에 따라 아무리 천혜의 자원이 있다 해도 황무지로 만들 수 있고, 아무리 황무지일지라도 낙원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국토를 낙원으로 만들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사막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스프링클러를 통해서 물을 공급해서연중 끊이질 않고 사막에서 토마토나 오렌지 등의 과실을 거두어들입니다. 포도 농법을 발전시켜 양질의 포도를 연중 생산해서 수출합니다. 그야말로 땅에서 쉬지 않고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단 포도주가 산마다 뚝뚝 떨어질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켜 그 환경을 낙원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허황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단 포도주가 흘러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시길 기도 합니다. 여러분 ‘돈방석’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실제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작은 기업을 하는데 너무 사업이 잘되어 돈을 놓아 둘 곳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받는 즉시 방석 밑에 집어넣었는데 정말 돈 방석처럼 두툼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허황된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사야 60장 5,6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에게는,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민족에게는 하나님은 이처럼 풍요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물질의 축복이든 영적인 축복이든 명예의 축복이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부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만드십니다. 단 그 전제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거짓과 술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요, 또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이런 은혜를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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