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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쓴 뿌리 (히 1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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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쓴 뿌리 (히 12:15~17) 

 
어떤 목사님의 교인 상담 이야기입니다. 예수 잘 믿는 집에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집에 시집을 가면 우선 마음고생 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도 그런 줄 알고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던 것과는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시댁식구들이 점점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시부모님들에게 하루 세끼 밥을 다 차려주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아침 반찬과 점심 반찬이 같으면 불호령이 내렸습니다. 

 한번은 시부모에게 밥을 차려 드리니 밥이 모자라 라면을 끓여 먹는데 그것을 본 시어미가 하는 말이 ‘너만 별미를 해 먹느냐’고 하더랍니다. 더욱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교회의 안수집사인데 아내의 이런 고통을 들어줄 생각은 못하고 ‘당신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금요기도회나 철야기도회 참석하여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질 않는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경우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이 아마 있을 줄 믿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슨 기도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마음의 쓴 뿌리가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쓴 뿌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요 고통입니다. 

 오늘 15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쓴 뿌리는 가지고 있으면 은혜생활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은혜가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괴로움이요, 또 자기뿐 아니라 남까지 괴롭게 만든다는 일입니다.

 은혜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선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만 생각합니다. 또 은혜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 자기를 숨기려고 합니다. 결국 자기도 불편하여 도무지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고, 남도 괴롭게 하여 은혜 속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쓴 뿌리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1. 성경은 ‘은혜를 가로막는 쓴 뿌리들’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를 질 그릇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질그릇은 조금만 상를 받아도 금이 갑니다. 그런데 이 질 그릇이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잘 믿는 가정에서도 외견상으로는 신앙생활 잘 하는 것처럼 보여도 가족들 간에 이러한 갈등이 있다면 교회에 나와야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무거운 마음이 있으면 아무런 재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마음의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참 이상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면 그것을 늘 기억하고 있게 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푼 것 보다는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더 잘 기억해 둡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약점입니다. 목사들도 별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섭섭하게 한 것은 늘 기억하게 됩니다. 그것을 지워 버려야 하는데, 특별히 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다 기억 속에 저장해 둡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그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어 더 큰 상처를 남김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일수록 남의 허물을 기억해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깨지고 상처받은 마음은 그대로 두면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세상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이 있습니다. <돈>과 <술>과 <쾌락>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실 그런 방법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잊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병>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마음의 부담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감추려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더 큰 절망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은 도리어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외형적으로 그럴듯하고, 말하는 것은 신앙적인데, 가정과 직장에서 보면, 완전히 딴 판입니다.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아직도 그 마음에 쓴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니 신앙생활도 이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치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2. 마음에 쓴 뿌리를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나로서는 불가능이란 말입니다. 요즘 <치유목회>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주로 <가정사역>을 다루는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이것은 주로 상담학적 방법으로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 끄집어내어 놓게 함으로 치유되도록 유도해 가는 방법입니다.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부부교실, 등에서 이런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일 뿐, 근본적인 치유는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가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해 보려고 그처럼 애썼으나 점점 더 깊은 마음의 부담으로 빠져들었던 것처럼, 인간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주관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성군인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Create im me a clean heart) 깨끗한, 정결한, 맑은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창조가 무엇입니까? 그릇이 토기장이 손에서 완전히 새롭게 빚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성경적인 용어로는 <거듭남>(Borne Agai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할 때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란 사람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 날수 있습니까?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이 때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3:5 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즉 성령으로 다시 태어 나야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여러 가지로 상징됩니다. 첫째 물(水)로 나타납니다. 물은 정결케 씻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불(火)로 나타납니다. 불은 더러운 것을 녹여 버림을 의미합니다. 셋째 바람(風)으로 나타납니다. 바람처럼 뿌리 채 뽑아 버립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담의 핏줄로 이어지는 죄의 쓴 뿌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위적인 노력으로 뽑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 창조해 달라고 다윗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나로서는 내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할 수 없다는 철저한 좌절감이 있어야 합니다. 즉 벽에 부딛쳐야 합니다. 이 좌절감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솔직해 집니다.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한 쓴 뿌리는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까지 자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가지고 하는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는 사람 앞에서 하는 기도가 됩니다. 문학적으로, 교양적으로, 사람들이 기도 잘못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자존심을 가지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라면 아직도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그렇게 하는 기도에서 무슨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우선 다윗처럼 철저한 자기 파괴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간음죄를 짓고 선지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목사를 통한 설교) 철저하게 자기가 무너졌습니다. 침상이 썩어 나가도록 통회하며 울며 자신을 들어냈습니다. 신앙인의 마음의 평화는 눈물 뒤에 옵니다.

 여기서 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가면> 뒤에 숨어있는 자신을 들어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위선의 가면>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마다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솔직한 고백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으로 음성이 들려 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결단과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내가 얼마만큼 순종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위하여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6절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를 위해 성령이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려고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럴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나에게 임합니다.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때 내게 상처를 준 상대방까지 수용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 앞에 인정받으려는 생각이 앞섰지만, 이제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비록 나는 약해서 항상 깨질 수 밖에 없지만, 나의 약함 속에서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하게 역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고후12:10) 이런 은혜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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