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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화목한 자 (욥 2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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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화목한 자 (욥 22:21~25)


6.25동란 때 북한 공산군이 서울을 진격해 왔습니다. 더 이상 공산군이 남하 하지 못하도록 한강다리를 폭파했습니다. 그때 한강 다리위에는 남쪽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폭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참혹한 일입니까? 국군이 아무 예고도 없이 다리를 폭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이제 곧 다리를 폭파할 예정이니 더 이상 이 다리에 들어서지 마십시오.”라고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너야만 살아날 수 있었기에 그 경고가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길을 막는 국군을 밀치고 노도와 같이 다리 위를 진입했습니다. 다리를 폭파하는 순간 끊어진 다리 밑으로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다리가 이미 끊어 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밀려오는 군중들의 힘으로 인해 끊어진 다리 난간에 서있던 사람들까지 다리 밑으로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비극적 참사가 60여 년 전 이 땅에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는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발전의 대동맥인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나 시원스럽게 뚫려 있습니다. 계곡이 있는 곳에는 다리를 놓고, 산이 가로막는 곳에는 터널을 뚫고, 바다가 있는 곳에는 물위로 다리를 놓았습니다. 특히 영종도를 보십시오. 낙후된 작은 섬 영종도가 세계가 주목하는 동북아 허브공항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4년 연속 세계 공항 서열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영종도와 육지를 잇는 영종대교와 고속도로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다리가 끊어진 곳에는 파멸이 있고, 다리가 놓인 곳에는 눈부신 발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곳에는 영원한 멸망, 지옥의 형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불행과 실패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죄악으로 인해 마치 끊어진 다리처럼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하셨습니다. 

이 안타까운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과의 사이에 생명의 다리를 놓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땅위에 놓인 다리의 재료는 철근콘크리트나 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놓으신 다리의 재료는 예수님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였습니다. 이 고귀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을 잇는 유일한 다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인 욥기 22장 21절에 말씀하시기를“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의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둡니다.

본문 21절에“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하시면서, 22절에는“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마음에 깊이 간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106절에“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빛입니다. 

1. 빛은 생명입니다. 

빛없는 곳에서는 생명이 살 수도 자랄 수도 없습니다. 이 강단의 화초를 보시기 바랍니다. 대체로 그늘에 강한 식물들이지만 그래도 빛이 필요하기에 낮에는 강단 C.I의 형광등을 켜두고 있습니다. 엄동설한에도 햇빛이 잘 비취는 곳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진달래꽃이 핍니다. 

빛이 없는 곳에는 식물도 동물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빛은 사람의 건강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유럽 사람들은 동양 사람들에 비해 우울증 환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흐린 날이 많아 햇볕을 충분히 쪼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죽은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 24절에도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2. 빛은 자유를 줍니다.

빛이 없는 캄캄한 곳에서는 자유롭게 행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빛에 비유하여 광복(光復)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광복절(光復節)이라고 합니다. 빛을 다시 찾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하셨으며,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는“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빛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간직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죄악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간난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므로 하나님과 화목한 곳에는 노예제도가 사라지므로 억압받던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므로 하나님과 화목한 곳에는 양반과 상민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므로 하나님과 화목한 곳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여성 상위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헬렌 켈러(1880-1966)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여류작가로서 살아간 기적의 사람입니다. 그는 간증하기를“내가 배운 것 중에 최대의 소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무엇인가의 노예로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3. 빛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 성전 실내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성단에 있는 꽃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언제입니까? 빛이 있을 때입니다. 빛이 없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캄캄한 곳에는 불안과 공포가 있습니다. 산이 아름답지만 빛이 있을 때 한해서 그렇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산속은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밝게 비췰 때 그 산은 다시 아름다워 집니다.

우리는 지금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전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주 환경이 그렇습니다. 문화적 환경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무너지는 가정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자살자가 매일 30~4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환경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삶,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합니다. 항상 소망 중에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승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절대로 우울하지 않습니다. 자살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의 삶의 의지력이 강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9절에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의 삶의 의지력에 대해 기록하시기를“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영의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삶의 승리가 있습니다. 

二.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전능자에게로 돌아갑니다.

본문 23절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하셨습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과 등을 돌린 상태에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등지고 어두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성경에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에 팔아넘긴 가룟유다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직접 사역하실 때 주님 곁에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발탁되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운데 포함된 사람이 기룟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늘 주님 곁에 함께 있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신비로운 기적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신임이 두터워 재정까지 맡았습니다. 예수님의 총애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주님을 은30에 팔아 넘겼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마나 함께 의논하고자 나가는 그의 모습을 가리켜“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행한 시간이므로 이미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해가 지고 어두워진 자연의 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가롯유다의 영적인 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조금 전 빛에 관해 말씀을 드렸듯, 빛은 생명입니다. 빛은 자유입니다. 빛은 아름다움입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지고 나간 가롯유다의 말로가 어떻습니까?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천추만대에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주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두움의 삶이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빛이신 예수님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의 영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가문도 좋고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살아가는 어느 큰 부잣집에 딸이 한명 있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얼굴도 아주 예쁘고 다 좋은데 키가 너무 컸습니다. 2m 7cm였습니다. 그 좋은 집안의 딸이 키가 너무 커서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결혼하는 것인데 큰 키 까닭에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처녀야, 처녀야, 키가 너무 커서 걱정이지?”하고 물었습니다.

“예”“내일 새벽 3시에 난쟁이 한 사람이 네 집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때‘난쟁이 씨, 나랑 결혼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그 난쟁이가‘싫다, 싫어’라고 할 것이다. 난쟁이가 싫다고 한번 말할 때마다 키가 10cm씩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날 새벽3시가 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문 좀 열어주세요.”나가서 문을 여니 난쟁이가 와 있었습니다.“난쟁이씨, 나랑 결혼해 주세요,”“싫어”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정말 키가 1m 97cm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이튿날 또 왔습니다.“나랑 결혼해 주세요.”“싫어”하자 1m 87cm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또 왔습니다. 다음날 또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1m 77cm가 되었습니다. 이 처녀가 고민을 했습니다. 2m 7cm에서 1m 77cm가 된 것은 감사 하지만 77cm가 좋을까, 67cm가 좋을까 고민 하다가, 모델이 될 것도 아니고 결혼할 것이니까 67cm가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만 더 만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벽에 난쟁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3시가 되니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난쟁이 아저씨, 나랑 결혼해 주세요.”했습니다.“싫어 싫어, 싫단 말이야, 싫다는데 왜 잔소리야.”라고 짜증을 내며 말했습니다. 한번만 싫다고 해야 하는데 네 번 씩나 거듭 싫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40cm나 작아졌습니다. 그만 키가 1m 37cm가 되고 말았습니다. 큰 키보다 더 흉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꾸민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가운데 마귀가 하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절대 사람을 복되게 하지 않습니다. 잘되게 해주는 것 같지만 더 나쁘게 하여 결국은 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나가면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으로 유혹을 하지만 결국은 실패자가 되게 합니다. 불행하게 합니다. 멸망하게 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에게 마귀는 미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럴 것 같아 선악과를 따 먹었더니 아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에덴의 행복은 다 깨어지고, 원죄의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우화가 있습니다. 어미 꿩이 새끼들에게 늘 이런 주의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땅 위에서 먹이를 찾아 먹을 때 입으로는 먹이를 먹되 귀를 열어서 내 음성이 들리는지 주의를 기울여라. 내가 땅을 보고 있다가 너희를 해치려는 짐승이 나타나면 크게 소리를 칠 테니 내 소리가 들리면 지체 말고 나무 위로 날아오너라. 

너무 멀리가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 멀리가지 마라.”그래서 꿩 새끼들은 엄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먹이를 찾으면서 입으로는 먹이를 먹고 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렸습니다. 꿩 새끼 한 마리는 맛있는 먹이를 먹는데 팔려서 형제들과 떨어져 멀리 갔습니다. 꿩 새끼들이 한창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여우 한 마리가 꿩 새끼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새끼들이 위험하게 된 것을 본 엄마 꿩이 소리를 지르자, 새끼 꿩들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위험이 다가온 줄을 알고 일제히 나무 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엄마 꿩과 멀리 떨어져 있던 꿩 새끼는 위험을 알려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만 여우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실패자가 되어 불행의 늪에 허덕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 품을 떠나는 것을 자유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삶의 멋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실패의 길, 불행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임을 깨달았습니다. 거지의 모습으로 뉘우치며, 후회하며 돌아오는데 이를 본 아버지는 부둥켜안고 기뻐하셨습니다. 아들의 위치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자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돌아와 돌아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돌아와 돌아와 환난 있는 곳과 죄 범한 데와 미혹 받는데서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돌아와 돌아와 집에 돌아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찬송가 525장)

이 찬송은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문제로, 하나님과 화목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사람은 교훈을 받아 마음에 깊이 간직합니다.
주님의 교훈은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사람은 전능자에게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로 돌아가면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로 돌아가면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로 돌아가면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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