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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으로 보이라 (막 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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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보이라 (막 7:1~23)


신종 풀루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종 인플루엔자 A 라고 하는데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생긴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바이러스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람에게 감염을 일으키고 있는 호흡기 질환의 원인 바이러스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종의 독감입니다. 감염된 환자의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서 감염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 계절 인플루엔자 증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발열(37.8℃), 콧물, 인후통, 기침 등의 증상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오심, 무력감, 식욕부진, 설사와 구토 증상이 함께 나타나기도 합니다. 신종 인플루엔자 A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재채기나 기침을 할 경우에는 화장지로 입과 코를 가리고, 화장지를 버린 후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손을 자주 씻고, 손으로 눈, 코, 입을 만지는 것을 피해야 하고요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 등이 있는 사람과는 접촉을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열나고 기침하는 사람과는 접촉을 피하라는 것이고요 그래서 병이 옮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쓰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손을 자주 씻는 것이라고 합니다. 손만 잘 씻어도 병이 옮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하네요. 지금과 같은 속도면 어쩌면 올 연말까지 전 국민의 1/3이 감염될 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한데 충분한 치료약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과 검사비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쁜 짓을 일삼던 사람이 그 나쁜 짓을 고만 둘 때 손 씻었다는 말도 하고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나는 예수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했지만 식사하기에 앞서서 손을 씻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도 권장해야 할 식사 예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그릇에 물을 담아 내오기도 하는데 그걸 잘 모르는 우리네 사람들이 목마르다고 마시는 웃지 못 할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우리네 식당에서는 물수건이 나오죠. 손 씻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손만 씻는 것이 아니라 세수까지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어쨌든 원래 서양 사람들은 손으로 빵과 같은 음식을 먹었기에 손 씻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그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가문마다 나름대로의 전통이 있습니다. 어떤 전통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역사적으로 형성·축척되어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관습·행동 따위의 양식. 또는 그 핵심을 이루는 정신이라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통은 오랜 세월을 흘러내리면서 어떤 단체나 공동체가 굳게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바 손을 씻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었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청결해야 하고 그 첫째가 손을 씻고 그릇도 다 씻어 놓은 것이지만 음식을 담기 전에 다시 한 번 씻으라고 하는 것이야 우리네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해서 부정한 손으로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죽을죄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지키면 좋은 도리입니다. 근데 그게 때로는 불편할 때도 있고요 시대가 흐르면서 그건 아니다 싶은 것도 있고 전통을 따르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랬다고 이놈 하면서 호령을 하고 긴 장죽으로 이마를 탁 때리던 옛날 할아버지들처럼 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 싶은 것도 있습니다. 하긴 예전에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있었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왜 손도 안 씻고 빵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단지 손도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다 보면 배가 아플 수도 있는데 보기에도 흉하고 위생에도 좋지 않으니 손을 씻고 먹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염려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비난입니다.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전통도 지키지 않는 나쁜 놈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제자들을 말리지 않은 예수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싸잡아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계명 중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니 이에서 더 큰 법이 없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옳습니다” 라고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요. 계명의 핵심은 사랑하라는 것 입니다. 그러데 지금 이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장로들의 전통을 핑계로 해서 그걸 제자들이 지키지 않았다고 싸잡아서 예수님까지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들이야 말로 외식하는 자로구나. 입술로는 공경하는 척 하면서 마음은 내게서 멀지 않으냐?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너희들이야 말로 헛되어 경배하는 자가 아니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은 통해서 교훈을 받고 은혜를 받고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를 흠집 내서 못된 사람으로 만들까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처럼만 보입니다. 물론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이 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 이유를 자세히 알아보아야 하고 그래서 오해 없이 그 사람을 받아줄 수 있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고 거기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도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그겁니다. 앞뒤 따져보기도 전에 먼저 비난부터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자기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합니다. 비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이건 반드시 지켜야 할 말씀입니다. 그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루어나가는 디딤돌과도 같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비난한다고요? 그럼 비난하기에 앞서서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먼저 알아보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리고 고의로 그럴 수도 있고 실수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깜빡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옛 습관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부터 했어야 합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을 수가 있어.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다 보면 다칠 수도 있지 뭘 그걸 가지고 그래, 그래요. 우리가 늘 다루고 있는 부엌칼에도 우리가 다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다칠 수가 있냐고 하시는 부엌칼을 손에 잡지도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네 기독인의 삶에도 이런 저런 금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술 담배 문제일 것입니다. 한데 솔직히 말해서 술은 입에도 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누구는 괜찮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으로 우리들이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십계명에도 나와 있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한데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가책을 받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됩니다.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까지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속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그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무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쩔 수 없을 때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했던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럴 상황이 오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요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가 사실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넘어진 사람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도 털어주고 다친 데가 있으면 치료도 해 주고 부축도 좀 해주고 이게 바로 관심이고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은 무엇이냐고 할 때 모든 전통을 지키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랑의법을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삶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전통이냐 말씀이냐 하는 질문은 사실 우스운 것입니다. 이왕이면 전통도 지키고 말씀도 지켜야죠. 전통이라고 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전통이 절대의 진리는 아닙니다. 이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네 전통 복장과 색깔만 해도 그렇습니다. 백의민족이라고 해서 흰색의 한복이 우리들 전통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전통 복장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그나마 전통 복장이라는 것도 요즘은 개량 한복이라고 해서 많이 바뀌어 있습니다. 색깔도 흰색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전통입니다. 물론 전통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네 전통인 것은 맞지만 또 그걸 지켜야 하지만 시대에 맞게 적용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안의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을 지키되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걸 죄악시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경계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십계명에도 나와 있는 당연히 지켜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가난하다 보니 부모에 앞서서 하나님께 드리고 보면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으니 부모에 대한 도리는 못하더라도 양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러느냐 하면 사람들이 이걸 악용하는 것입니다. 무슨 감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부모님께는 드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르반 하나님께 드리다 보니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하면서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이걸 주님이 지금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도리 이상으로 자식 된 도리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을 지키느냐 말씀을 따르냐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이분법적으로 자꾸 접근하려고 합니다. 전통이냐 말씀이냐?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왕이면 둘 다 지키면 더 좋다는 것이죠. 전통을 따르는 것도 말씀 안에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먼저 하나님의 자녀다워야 합니다. 내게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 이마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쓰여 있지 않다고 해서 그 누구라도 나를 겪게 되면 역시 저 사람이야 말로 진짜 예수쟁이야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교회에 열심히 드나들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교회 일에도 앞장서고 술 담배 안 하는 그런 모습도 귀하지만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그리스도인다운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결코 모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의 마음에 훈훈함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누구든지 힘들고 지칠 때는 가서 기대고 싶은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 마음이 괴로울 때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 함께 있으면 지극히 편안한 사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사람, 알게 모르게 어려운 사람을 붙들어 주고 세워주는 사람, 이웃의 일을 내 일처럼 가서 돌보아줄 수 있는 사람, 남에게 티내지 않고 조용하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사람, 자기도 힘들고 지쳐있을 텐데도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맡아 수고해 주는 그런 사람, 말 한마디만으로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고 힘이 나게 해 주는 사람 뭐 이렇게 이야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무엇이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것인지. 결코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닌 조용히 실천하는 사람, 마치 그림자인 양 항상 어두운 쪽에 서서 곁을 지켜주는 그런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누가 내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누구 옆을 지켜줄 수 있을 때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런 밝은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 동반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여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몇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전통대로 따라야 된다고 하는 그 마음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이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도 비난하면 안 되는 것이냐 그건 또 아닙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찌 단 한 번의 비난도 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 비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비난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 비난했던 일을 얼마 후 또 다시 반복해서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습관처럼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난에 내 마음에 붙잡히지 않도록 하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거기에 매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면 눈을 돌리세요. 비난하면서 그 자리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같이 안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같이 안 있어서 또 비난이 된다면 같이 있음에도 상대방도 지극히 편안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면 됩니다. 

그러니까 손을 안 씻고 먹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면 먼저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떠다 주던가 아니면 물수건이라도 준비해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주 습관적으로 손도 안 씻고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이런 준비를 해 주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상대방이 마음을 상하지 않고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도 지혜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러나 항상 비난거리만 찾는 사람들 같습니다. 매사에 비난하고 또 비난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왜 잔소리하게 만드냐고 합니까? 아니요? 잔소리가 계속되면 아니 상대방이 잔소리로 여기게 되는 그 순간 이는 더 나쁜 데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잔소리를 들을 때 아니 잔소리라 생각될 때 아 그렇구나 하기보다는 짜증부터 나지 않던가요? 오죽하면 잔소리를 하겠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내가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해도 내가 그걸 보고 잔소리를 안 하면 됩니다. 못 본 척 그냥 넘겨요. 그리고 내가 한 걸음 더 나가서 상대방처럼 해 봐요. 

결국 문제는 내 생각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단지 배 아프게 만들 수는 있어요. 물론 보는 사람 얼굴을 찡그리게 할 수도 있고요? 누구 말처럼 까마귀가 형님 하면서 오겠다고 할 정도로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배 한번 아프면 고만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배탈 나는 사람은 또 없더라구요. 그건 꼭 누가 배탈 나느냐 그렇게 깔끔 떠는 사람들 아닙니까? 항상 깨끗하게만 지나다 보니 그 사람은 조금 더러운 것이 있으면 탈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하면 여기에 좋고 저렇게 하면 저기에 좋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들 생각일 뿐이고요 같이 한 배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다 자라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도 다 다르고 거기에 너는 왜 그러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공부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럼 뭐가 공부 잘하는 겁니까? 학교 빠지지 않고 졸지 않고 지각하지 않고 학교생활 하면 그게 공부 잘하는 겁니까? 아니면 성적만 좋으면 공부 잘하는 겁니까? 도대체 뭐가 공부 잘하는 겁니까? 죽어라고 책만 들여다봐도 성적이 안 오르는 아이도 있고요 그냥 건성건성 하는 것 같은데도 성적이 잘나오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행복이 성적순도 아니잖습니까? 한동안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공부는 못해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얼마나 아이가 아파하면 그러겠습니까? 우리 가운데도 그런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이 항상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고 했고 다시 홍수 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하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성령께서 내 생각과 마음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악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의도 자체가 악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는 선해요. 그런데 그게 왜 악한 것으로 바뀌냐 하면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을 위한 생각이 아닌 내 생각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에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 한 마디로 거기에 내가 들어가기 때문에 변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액체입니다. 그런데 물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보면 산소와 수소입니다. 수소 둘에 산소 하나가 결합하게 되면 물이 됩니다. 산소도 기체고 수소도 기체입니다. 그런데 둘이 합쳐지면 물이 됩니다. 산소도 불에 잘 타고 수소도 불에 잘 탑니다. 그런데 물은 거꾸로 불을 끕니다. 

사람이 사는 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게 저 사람에게 좋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내 생각과 그 사람의 현실과의 차이입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떤 때는 그 자식이 얄미울 때도 있어요. 나는 못하는 것을 자식이 한다고 할 때 참 부럽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데 “엄마는 이런 것도 못하지?” 라고 한다면 “그래 맞다 엄마도 못하는 걸 다 하네 기특하지” 하고 말은 하는데 마음으로는 그런 자식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어요. 그게 솔직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어야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보고 어떻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어? 어떻게 직분자가 저럴 수가 있어 하지 말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줄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제자가 되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들을 더욱 불쌍히 여기셨던 주님이십니다. 굶주리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아파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으며 여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찌해서 당신의 제자들은 부정한 손으로 먹습니까?” 할 때도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셨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이 바로 이 긍휼이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랑이 바로 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세상 말로 짠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게 될 때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런 멋진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 서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달라져야 할 때입니다. 말만의 성도가 아닌 무늬만의 성도가 아닌 정말 누가 보아도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내 생각의 옳은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사랑이 있습니다. 긍휼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 마음은 다시 말하면 세워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붙잡아주려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되 나보다도 앞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자 하는 마음이요 나보다 약한 자들로 하여금 나와 함께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마음이요 딱딱하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고 편한 마음으로 바꾸어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길은 우리 모두가 기쁨으로 함께 가야 할 길입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눈에 띄지 않아도 그 존재를 누구나 다 압니다. 그 향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지나치지도 않고 은은하게 풍기면서도 모두의 마음을 향기롭게 하는 그런 향기와 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 하면 주님처럼 살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하시고 내 마음을 주 성령께서 항상 붙잡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대로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아름다운 천국으로 만들어나가는 복된 성도요 복의 근원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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