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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히 자복하며 (삼하 12: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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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히 자복하며 (삼하 12:15~25)
 
 
우리 속담에 "죽은 자식 고추(불알) 만지기, 죽은 자식 나이 세기"와 같은 속담이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겨도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괜시리 소용없는 일을 해서는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죽은 아이는 빨리 매장하고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치고 애석하지 않는 과거가 어디 있습니까? 낚시하는 사람들 치고 놓친 고기가 월척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나간 추억은 다 아름답고 애뜻한 것입니다. 왕년 붙잡고 소시적 따지면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코 새로운 반전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교훈을 잘 실천한 한 사람, 믿음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다윗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심히 앓기 시작했습니다. 14을 한번 보십시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이 아이는 불륜의 씨앗이요 죄악 가운데 낳은 자식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13절). 똑같은 충고도 고마운 조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귀찮은 잔소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앓게 된 것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인줄 알고 하나님 앞에 겸비케 되어 아이의 생명을 위해서 금식하며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성경 곳곳에 다윗의 기도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본문보다 더 간절한 기도는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목숨이 위태할 때보다 더 절실하게 기도했습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는 끊어지는 마음으로 간구했습니다. 눈물로 밤을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당시 심정이 얼마나 애끓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어 그 아이를 고쳐주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다윗은 그런 간절한 기도도 허사가 되고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가 죽은 날은 세상에 태어난지 팔일째 되는 날입니다. 살아 있었더라면 할례를 행하는 날이었고 대대적인 축하가 이루어질 날이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아이가 죽었기에 신하들은 다윗이 크게 상심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다윗이 갓 태어난 아이가 병들었을 때도 금식하고 저 야단법석이었는데 죽었다는 것을 고하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죽은 것을 고하는 일을 서로 꺼려하였던 것입니다. 
신하들이 표정과 태도 돌아가는 분위기 등을 통해서 결국은 아이에게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된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복들엑 "아이가 죽었느냐?"물었고 "죽었나이다"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20절에 보면 다윗은 신복들의 예측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반응을 합니다. 그는 먼저 엎드려 있던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몸을 씻고는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였고 경배가 끝난 후 궁에 돌아와서 음식들을 만들게 하여 베부르게 음식들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는 평정과 침착을 잃지 않았습니다. 길길이 날뛰지 않았습니다. 원망도 시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깨끗하게 자신을 단장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다윗은 죽은 아들 고추나 만지작 거리거나 죽은 아들 불알이나 만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식 나이나 세고 있으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쓸데없는 일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어찌 슬픔이 없겠습니까?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벌어지고 결과가 들어났으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집착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신하들이 이런 다윗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물었습니다. 21절을 함께 읽읍시다.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22~23절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디윗의 위대한 신앙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죽은 자식 불알만지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못살게 구는 다윗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집을 보면 죽은 자식 때문에 산 사람들 모두가 다 피해자가 되어서 행복을 잃어버리고 불행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신복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별한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24절에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그 아내 밧세바를 위로 하고 동침"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였지,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내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육신의 정욕으로 취할 때는 아내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 하고 동침했을 때 비로소 다윗의 처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결국 이후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아름다운 은총을 베푸십니다. 24절에 보면 다윗은 평화와 축복의 자녀 솔로몬을 낳게 됩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솔로몬이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응답하시는 분십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강건하게 되고 결국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응답하실 하나님, 나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능력대로 우리들의 간구함을 넘치도록 능히 하실 주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리시기를 축복합니다. 

25절에 보면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나단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과 솔로몬을 축복하시며 솔로몬의 별칭을 여디디야라고 해주셨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겸손히 자복하며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겼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여디디야의 은총, 사랑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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