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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라 (창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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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라 (창 18:1~8)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보니, 웬 사람 셋이 자기의 맞은쪽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장막 어귀에서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다.]

• 처서 절기

처서를 지나 백로를 향해 가는 때라 그런지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 상쾌합니다. 벌써 낙엽을 준비하는 성급한 나무들도 보입니다. 여름내 우리의 고단한 아침잠을 깨우던 매미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羽化登仙의 꿈을 이루었으니 이제 만족하고 있을까요? 여름 휴가철도 지났으니 이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 삶을 무르익혀야 할 때입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제주도 올레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한번 다녀오신 분들의 입소문을 타고 올레길은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의 로망이 되고 있습니다. 시흥 초등학교에서 시작되는 올레길 제1코스는 성산포를 지나 광치기 해변을 지나갑니다. 성산포 앞 바다는 참 잔잔합니다. 바다를 보면 어린아이들처럼 풍덩 뛰어드는 이들도 있지만, 깊은 침묵에 잠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제주도를 사랑하는 시인 이생진 님은 성산포 앞바다를 바라보다 바다의 설교를 듣습니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설교하는 바다> 전문

가끔은 설교가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말의 부질없음을 느낄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비 내리는 숲길을 걸을 때, 눈 쌓인 벌판을 걸을 때,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에 들었을 때,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는 바닷가에 앉았을 때,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말을 잊습니다. 그 시간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느라 잊고 있던 ‘영혼’이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순수’(innocence)의 호출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때 사람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고 맑습니다. 가끔 바다와 숲과 별 하늘의 설교를 듣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가을의 길목에서 여름내 달떴던 우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가을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낯선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이

한창 더운 어느 날 대낮, 아브라함은 장막 어귀에 앉아 상수리나무가 만들어 준 서늘한 그늘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니 웬 낯선 사람 셋이 자기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자 아브라함은 마치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달려 나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그들을 영접합니다. 낯선 이를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익숙한 우리의 감성으로는 참으로 낯선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16세기의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매우 흥미롭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화면의 왼쪽에 세 명의 나그네가 서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해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 해는 거룩한 존재들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이 그리곤 했던 後光(halo)인 셈입니다. 아브라함은 비굴해 보일 정도로 납작 엎드려 그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해로부터 빛줄기 하나가 그의 엎드린 몸 위로 내리쬐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있는 이들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들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낯선 이들을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인 양 맞이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빛줄기는 이 지극한 환대의 정신이야말로 ‘거룩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환대란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누군가가 내 삶에 들어올 여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가끔 예기치 않은 이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던 일을 중단시키고, 소중한 시간을 조각냅니다. 마음이 분주할 때는 슬그머니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찾아온 사람에게 단 10분, 아니 단 1분만이라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영성적인 삶이란 그런 것임을 렘브란트는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종교와 문학’을 가르칠 때, 저는 강사 휴게실에서 가끔 김흥호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동서양 철학에 두루 능통한 선생님을 만나 뵙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선생님께 커피나 녹차를 타 드리면서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여쭤보곤 했습니다. 양명학과 주자학의 본질적 차이라든지, 율곡과 이황의 ‘心’의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 전습록을 읽을 때 유념해야 할 개념이 무엇인지…. 어떤 질문을 하든지 선생님은 허락되는 시간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5분일 때도 있고 10분일 때도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그때 선생님에게서 개념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삶을 배웠습니다. 주어진 현재야말로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톨스토이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때이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지금 해야 할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 시중 드는 족장

아브라함은 그 낯선 나그네들에게 자기를 좋게 보시면, 자기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이 얼굴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길어 오고, 그들이 쉴 수 있도록 시원한 그늘 밑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는 아내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세 스아(seah)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구우라고 말하고, 자기는 집짐승 떼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맡겨 요리를 하게 합니다. 음식이 장만되자 그는 엉긴 젖과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고는 나그네들이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한 집안의 어른인 그가 마치 하인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당신을 한없이 낮추신 겸비의 그리스도를 흘낏 봅니다. 

이 광경을 머리에 그려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번집니다.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어찌 보면 이게 인간관계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이, 아니 이 마음이 참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 말 한 마디 속에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말 한 마디는 그를 형용하는 어떤 말보다도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을 이렇게 천명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6:39).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도 하찮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어느 신학자는 인간의 구원체험을 가리켜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 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더욱이 그가 나를 관용의 마음으로 대할 뿐만 아니라, 나를 지극히 귀중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목사 시인 고진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은 후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는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우리 마음이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우리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는 아직 길을 떠날 때가 아니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길을 떠나야 할 때는 언제입니까?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불평과 원망이 마른풀처럼 잠들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지니고도/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맑은 하늘이 내리시는/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입니다. 그 때는 어쩌면 하나님과의 깊은 합일을 경험한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현존체험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이웃들을 통해 열릴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왔던 이들이 시인이 말하는 그런 기쁨을 안고 돌아설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만 합니다. 행여 우리와 만난 이들이 우리의 거친 자아에 찔려 상처를 입거나, 우리의 오만한 태도로 말미암아 마음을 더욱 굳게 닫게 되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 약속과 비밀 나눔

오늘의 본문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셨겠습니다만 극진한 대접을 받은 세 나그네는 사실 하나님과 그의 사자들이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10절에서 비로소 그들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들려주는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10)

장막 어귀에 숨어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허탈한 웃음은 일 년 후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밀가루 세 스아로 만든 빵과 송아지를 잡아 나그네를 대접했다고 전합니다. 스아는 대략 7.33리터에 해당되는 분량이니까, 세 스아면 대략 22리터가 됩니다. 한 말이 넘습니다. 어린 양이라면 모를까 송아지를 잡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심히 지나쳤지만 아브라함과 사라가 준비한 음식은 세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습니다. 사실 세 스아로 만든 빵이란 잔치를 위해 준비하는 음식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환대와 이삭의 탄생은 이렇게 해서 잔치를 매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성서의 이야기꾼은 천의무봉의 솜씨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 받는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낯선 이들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이와 더불어 당신의 비밀을 나누십니다. 사실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 앞에 현전했던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결정하기 위해 가던 길이었습니다. 지극한 공경심으로 배웅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17)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열어 보이는 것을 일러 계시(revelation)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스스로 영의 눈이 밝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공경할 줄 아는 사람,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줄 아는 이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우리는 소돔을 구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노력을 잘 압니다. 의인 열 명만 있었어도 그 성은 멸망을 면했을 것입니다. 흔히들 소돔은 남색(sodomy)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그들이 망한 것은 나그네를 학대하는 배타적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슬픔’이라는 그림은 임신과 더불어 버림받은 시엔이라는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입니다. 그의 벗은 몸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두 팔로 감싸안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 여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고독과 슬픔의 정서를 환기시킵니다. 고흐는 그 여인을 돌봐주어야겠다고 생각해 결혼을 결심하지만, 가족들은 시엔과의 결혼을 만류합니다. 

시엔조차도 고흐의 호의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고흐는 시엔과 결별하도록 자기를 설득하러 온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단 한 번도 선함을 본 적이 없는 그녀가 어떻게 선량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숭고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를 값없이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자아가 없었기에 누구든 환영할 수 있었고, 세상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기에 고통에 처한 이들을 온몸으로 품어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랑에 부딪힌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주님을 통해 마음의 상쾌함을 얻은 이들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라.” 이 말 한 마디가 우리의 모든 관계맺음의 기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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