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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땅에 그루터기 (사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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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그루터기 (사 6:1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선수적인 사랑이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아직도 바벨론 포로 직전의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 때문에 타국의 침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아주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론적 메시지입니다. 
마치 베어진 나무에 그루터기가 남아 있어서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지극한 소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8.15 해방의 달을 맞이하여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확인해 가고 있습니다. 
한일합방 이후 한국교회는 비운에 몸서리치는 이 나라 백성들의 민족 운동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의 박해는 충분한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교회를 한꺼번에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안되는 줄 알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는 한국교회는 즉시 고난과 순교의 피의 광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제의 만행을 지켜보던 국내외의 시선은 한국교회의 종말을 예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듯이 거룩한 씨를 남겨 두어 이 땅에 그루터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Ⅰ. 8.15 해방 직전의 한국교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한국교회는 송두리째 말살되는 듯 했습니다. 모세 오경과 요한계시록을 삭제했으며 찬송가를 개편했습니다. 급기야는 신약 중에서도 4복음서만 강론하게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 영광, 심판, 재림, 예수 왕 같은 말들은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 아래로 소속케 했습니다. 

1943년 9월부터 주일 오후 예배와 수요예배를 금지시켰습니다. 교회당에서는 예배 시에 온갖 우상숭배와 정치적인 행사가 먼저 행해졌습니다. 그 결과 20여 교회가 폐교회가 되고 2000여 성도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씨의 성장 운동은 온갖 고통 속에서도 중단할 줄 몰랐습니다. 

일제는 1945년 8월 17일을 기하여 자신들의 체제에 거역하는 한국 땅의 지도자들을 모두 같은 날에 죽이기로 결정하고 명단까지 작성하였습니다. 
그 리스트(List)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명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환란 날을 감하셨습니다.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케 했습니다. 마침내 저들의 신이라고 하는 일본 천황 히로히또에게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 땅에 해방의 감격이 왔습니다. 8.15 민족해방은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일본의 온갖 우상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성경이 명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민족 광복은 영적인 새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15 민족해방으로 이씨 조선 500년의 왕정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도래하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완전 해방이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첫째는 일제 식민통치가 해방 후에도 잔존 계승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방이 된 후에도 친일세력들의 지배 아래서 민주주의적인 권리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예컨대 귀속재산 불허나 농지개혁 과정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민족의 과제는 민족의 자주, 민주주의, 민족 통일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제는 일제 식민통치하 민족독립 운동기에 제시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상황이 일제 식민통치 때와 같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볼 때 만족할 만한 것은 못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눈부신 발전은 가히 세계사적입니다. 세계에서 조선(造船) 1위, IT(Information technology) 1위 등 인적 자원과 첨단 자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세계적입니다. 

과연 우리 스스로가 이 같은 축복을 수용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은 남북 분단으로 인해 민족 양심이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해방과 함께 친일파를 처단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여전히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없으면 반공전선을 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10년 동안 일본군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많은 중국인들이 그들을 도와 부역했는데 2차 대전이 끝난 후 가차 없이 그들을 처단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국민당의 장개석이나 모택동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 치하에 있던 때 4-5년간 조국을 배반한 부역자들을 '드골'이 귀국하여 정권을 잡은 후에 가차 없이 처단했습니다. 비시정권의 수장이었던 패탱 원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가 무기징역으로 무인도에 유배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분단된 상황에서 북한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1949년 친일역적들을 재등장 시켜야만 했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민족 양심이 유린당했는가 하면 학문의 세계가 제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가공할 핵 전쟁무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8.15 민족해방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Ⅱ. 8. 15 해방 직후의 한국교회

종교적인 새 출애굽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일대 정비작업이 불가피했습니다. 

1) 북한 교회의 재건운동
(1) 출옥성도를 중심한 재건운동
1945년 11월 14일부터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이기선 목사와 만주 봉천신학원장 박형룡 박사를 강사로 하여 심령부흥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때 교역자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고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다섯 가지 원칙을 발표하자 조선 장로교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홍택기 목사 등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①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참회한 후 교역에 나갈 것 
②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③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④ 위와 같은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 한국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⑤ 교역자 양성기관인 신학교를 복구할 것 등이었습니다. 

(2) 교권주의자들을 중심한 재건운동
총회장 홍택기(제 27회) 목사 등은 교권계승을 주장했습니다. 
① 옥중에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킨 사람이나 수고는 같다. 
② 교회를 지키면서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 
③ 신사참배에 관한 것은 하나님이 직접 관계해서 해결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으나 이것은 교권 장악을 위한 묘략에 불과했습니다. 

2) 남한 교회의 재건운동
(1) 남부총회의 교권계승(조선신학교)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 신학교로 가결한 것은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과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선신학원은 평양신학교가 진리 운동 때문에 폐교 조치(1938년)를 당한 후에 조선 총독부 보호 아래 1939년 10월에 개교하여 해방될 때까지 성장했습니다. 초대 교수로는 채필근, 김주영, 함태영3월 15일, 이정로 등이었고 그 후 김재준, 송창근, 유인구 등으로 보강되어 자유주의 신학의 산실이 되었으며 지금의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2) 출옥성도를 중심한 정통계승(고려신학교)
출옥한 지도자들은 북한에서 재건운동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습니다. 월남한 저들은 한상동 목사를 중심하고 남부총회에서 자유주의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가결한 것에 놀란 나머지 남한교회 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재건운동의 방향은 ①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② 지도자들의 자숙 

③ 순교자의 산실인 평양신학교 계승이었습니다. 
고려신학교에서는 당시에 만주 봉천에 있는 박형룡 박사를 초빙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1946년 7월에 남영환 전도사를 보냈으나 실패하고 1947년 4월에 송상석 목사를 봉천에 보내어 박형룡 박사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박형룡 박사의 귀국이 늦어지자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서리로 하여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마침내 박형룡 박사는 1947년 9월 26일 송상석 목사와 함께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동년 10월 14일 교장직에 취임했습니다. 

(3) 서울에서의 정통계승(장로회신학교) 
고려신학교는 설립 다음 해인 1947년 10월 14일 박형룡 박사가 합세함으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인식을 새롭게 받으며 그 신앙노선이 개혁주의 한국장로교의 방향을 재조명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고려신학교에 취임한다는 소식이 전국 교회에 펴져 정규오등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은 부산까지 내려와 이미 고려신학교에 편입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박형룡 박사와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 사이에 신학교 운영에 관한 의견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고려신학교의 총회 승인 문제, 둘째 선교부에 대한 의견 차이, 셋째 신학교 이전 문제 등으로 서로 일치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박형룡 박사는 1947년 10월 14일 취임하여 그 다음 해인 1948년 4월 고려신학교의 교장직을 약 6개월 만에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별설교에서 말하기를 "권징보다는 복음 전파자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영적 갱신운동을 강조했던 고려신학교의 본래 정신보다는 전국교회를 수용하는 신학교육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앙 양심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한상동 목사와 의견의 일치를 보일 수 없어 결국 1948년 6월에 서울에 장로회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가 지금의 사당동에 소재한 총신대학의 전신입니다. 

Ⅲ. 서울에서 고려신학교 복교 

1) 고려신학교 폐교 후 고신대학 인가
1946년 9월 20일 일제 말엽 일본군국주의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가 투옥된 신앙의 지도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 고(故) 주남선 목사, 고(故) 손양원 목사, 고(故) 한상동 목사 등 옥중 신앙동지들의 특별기도의 산물로 항도 부산에서 개교한 학교가 고려신학교입니다. 
해방을 만나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로 얼룩져 버린 상처를 씻고 새로운 교회재건운동의 역사적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제 강요에서 평양신학교가 폐교 조치를 당한 후(1938) 1939년에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드디어 1940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신학원'이란 이름으로 조선 총독부의 비호 아래 다른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해방 후 1946년 4월 당시 남부총회(38이남의 전 장로교회)는 위와 같은 조선신학교로 개칭하고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이고 친일적이었습니다. 평양 감옥에서 출옥한 지도자들은 해방 후 남부총회의 결의가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크게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항도 부산에서 신앙의 정통(바른 신학)과 생활의 순결(바른 생활)을 모토(Motto)로 하고 옛 평양신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고려신학교를 개교한 것입니다. 

이 신학교가 박형룡 박사, 박윤선 목사로 이어져 오는 개혁주의 신학(칼빈주의)을 추구하는 진리의 고려신학교였습니다. 그 후에 고려신학교는 온갖 역사적 시련 속에서 숱한 오해와 박해를 받으면서도,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어오면서 성장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 12월 30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문교부로부터 전 고려신학교의 폐쇄령과 동시에 고신대학으로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려신학교'란 교명이나 '고려파'란 교파명은 이 땅에서 없어지게 되고 '고신대학'이라는 법적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2) 서울에서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운동
그 후 불행스럽게도 1973년 고신대학 일부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교단의 헤게모니 쟁탈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자신들의 정당성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세상 불신법정에 소송을 제기하여 법적 투쟁을 야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란 논문을 내어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의 정당성을 천명했습니다. 이일로 인하여 보수교단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고려파가 성경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와 고려파의 정신은 형제끼리(신자간) 불신법정 소송문제는 성경에 위배된다고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제 23회 총회의 결의까지 한 바 있었으나 그러한 정신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24회 총회는 제 23회 총회의 결의를 교묘하게 번복하였습니다.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불신법정에 송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소를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1976년 9월 1일 고신 제 26회 총회에 시한부(1976년 9월 25일)'공개시정촉구결의서'를 반고소 고려측 이름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신 총회는 답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6년 10월 19일에는 역사적인 반고소 고려측 총회가 출범하게 됐습니다. 반고소 고려파 총회의 출범은 그보다 먼저 1976년 3월 9일에 복교한 고려신학교 운동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서울에서 폐교된 전 고려신학교 복교는 ① 고려신학교의 본래 이념을 되찾고 ② 교단의 발전적 요새지를 지방인 부산보다 서울에 확보하여 전 남한은 물론 예기되는 북한선교의 전략기지를 확보하고 ③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보수신앙의 여러 교파와 제휴하여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선교사명을 감당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교한 고려신학교는 반고소의 옛 고려파 정신의 복고이고 순교적 신앙(정통 신학)과 순교적 생활(바른 행위)의 옛 고려신학교의 부흥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로서 마지막 사명은 조국과 아시아와 세계를 복음화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순교적인 제물이 됨에 있습니다. 

1984년 5월 22일 교단명칭을 반고소 고려측에서 '고려'로 변경하여 부산측의 고신과 구분키로 결의하고 이를 문공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각 총회 유지재단 명칭은 부산 고신은 고려로, 서울 고려는 개혁고려로 되어 있습니다. 

제 42회 경기노회에서 고려신학교 복교를 결정했습니다(1975. 10. 27). 복교 추진위원회가 경향교회당(용산구 동자동 35-25)에서 월 운영비 70만원으로 발족했습니다(1975. 11. 25). 기독신보에 고려신학교 모집공고를 발표했습니다 (1975. 12. 29). 크리스챤 신문에 고려신학교 입학 전형일자를 발표했습니다 (1976. 2. 17). 마침내 개교(1976. 3. 9)를 결정하고 1976. 3. 9 - 3. 12까지 손명복 목사를 강사로 입학감사 집회((주제: 옛적 같게 하옵소서)를 결정했습니다. 개교일로부터 서대문구에 소재한 영천교회당에서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1개월). 그러다가 삼각산 제일기도원(종로구 평창동 산 11번지)에서 고려신학교 현판식 예배가 있었습니다. 

삼각산 제일기도원에서 1976년 4월 14일에 시작하여 청량리 동도교회 교육관(1979. 4. 9),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상아탑학원(1981. 3. 2), 그리고 신림동 고려신학교(1983. 9. 6)로 험한 여로를 남기면서 13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는 마침내 우리에게 축복의 비젼(Vision)을 허락하셨습니다. 경기도 파주군에 소재한 땅 6만평을 주시고 그 중 3,000평의 대지를 조성하고 연건평 1,900평의 신축교사를 건립하도록 하였습니다. 

① 본관(548평)은 도서관, 교수실, 교실로 사용되고 ② 예배실(411평)은 약 2,000명을 여유 있게 수용하고 ③ 식당(133평)은 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여유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1989년 7월 건립 기공예배를 드리고 1990년 9월 13일에 세계적인 관심 속에 준공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의 종들을 배출하는 명실공히 교단직영 신학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천 고려파, 통괄 고려파의 실패한 역사는 형제끼리 불신법정에 송사한 일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6장 1-11절에 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경의 불변성,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 성경의 완전성, 성경의 영원성, 성경의 역사성, 성경의 거룩성을 파괴한 성경전체를 부정하는 패악입니다. 

실패한 역사는 복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의 생리이고 순리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부산고신 교수들 사이에서도 내용적으로 찬반양론이 첨예합니다. 알고 보면 양론이 될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떤 교수들은 고려신학교의 전통은 고신대학이 가져갔으니 서울 고려신학은 명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신대학은 옛 고려파의 거룩한 전통을 계승하지 못하고 껍데기만 가져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형제끼리, 교회끼리, 교수끼리 고소고발을 불신법정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전통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러한 전통이 우리에게 있어서 체험이 아니고 역사라 해도 우리의 전통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또한 한국 교회사에 자랑스럽게 전개된 우리의 전통을 치장 삼아 우리의 약점을 가리워 보자는 어설픈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전통을 힘입어 남의 신앙이나 평가해 보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진리운동의 맥을 찾아 우리가 피곤할 때 신앙의 족보를 더듬어 앞서 간 신앙 조부들에게 갈 길을 물어 보고 지혜를 얻어 우리와 자손들이 이 길을 거침없이 가자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앞서간 선배들의 영예로운 신앙노선에 바로 서서 세계 선교를 향한 위대하고 거룩한 운동에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충성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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