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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을 따르는 자 (롬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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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따르는 자 (롬 8:5~6)


인간은 영적인 면에서  '육신을 따르는 사람과 '영을 따르는 사람'으로 나누게 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 즉 '육신에 속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간은 그가 인간인 이상 아무리 고상한 인격과 높은 학문과 훌륭한 재능을 갖췄다 할지라도 '육에 속한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구원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는 '자연인'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그 가치 기준이 육의 범위를 초월하지 못합니다. 숭고한 사상, 이념들이 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생활의 이치나 삶의 방법을 일깨워 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라면 결국 육신적인 것이며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연인의 모든 행위는 인간적이며 육신적이며 반 하나님적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들에게 육신대로 살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롬 7:18-23]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8: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람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위가 나오며 악한 마음에서 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지킬 만한 여러 가지 중에서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고 또 도모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결코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며 선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육신의 일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원수 된 자가 사망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생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지만 사탄이 온 것은 인생의 멸망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어찌하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을 좇아 살게 하려 합니다. 부패한 육신에 의하여 사는 자는 늘 마음속에 이 세상의 썩어질 것만을 위하고 생각하게 되며 그것은 후에 사망의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좇는 것은 곧 사탄을 좇는 것이며, 때문에 그들이 좇는 사탄과 멸망할 때 더불어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삶에 집착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완전히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져서 지팡이를 의지해서 덜덜 떨면서 '아이구, 이 놈의 세상 내가 죽어야지. 너무 피곤하고 아파'라고 말했답니다. 그 때 어떤 효녀 손녀가 할머니를 도와드린다고 대접에 양잿물을 타 가지고 와서 '할머니 이거 잡수면 죽을 수 있어요'라고 하니까 담뱃대를 꺼내서 손녀의 머리를 때리면서 '이 자식이 날 죽이려고 한다'고 노발대발하더랍니다. 이 아이는 순진해서 할머니를 도와주려고 했던 거지요.

어떤 사형수는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발이 미끄러지니까 1,2분 후에 죽을 몸인데 '이크,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라고 하더랍니다.
육신의 삶은 후회가 따릅니다.
   
어떤 교회에 남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부친은 그 교회 장로님이셨고 모친은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사업을 잘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 생활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그는 영의 일보다는 육의 일에 치중했습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도 거래처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장에 가서 골프 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에서 안수집사 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사자는 별 볼일이 없었지만 장로님, 권사님이신 그의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교인들은 그를 안수집사로 뽑아 주었습니다. 그랬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일에만 늘 분주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손을 드셨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몸져누웠습니다.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보았습니다. 위암 3기였습니다. 의사는 그의 배를 갈라보았습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다시금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생명이 까물까물 꺼져갑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흐느끼면서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장로님, 권사님의 부모님을 주셨고 나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하셨건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구나! 이 형편없는 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쓰시겠다고 안수집사로 뽑아주셨건만 그래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정신 차리지 못했구나.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 육신, 내 영혼이 둘 다 지옥에 떨어질까봐 하나님은 내 육신은 불러 가시고 내 영혼은 구원해 주셨구나! 얘들아, 너희들은 어찌 하든지 예수님을 잘 믿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라. 그럼 우리 모두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그의 장례식 때 그의 육성이 녹음기를 통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흐느꼈습니다.(박상훈 목사 설교중)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새 영을 받아 중생할 때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십니다. 우리 인간의 영이 죽음에서 소생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신자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의미는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영에 속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함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어 언제나 성령과 동행케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을 소유한 자에게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그의 자녀가 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마지막 영화의 그 순간까지 계속하여 우리의 근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도록 자라기를 바라시는데 이는 성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육신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하였으므로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하면 영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민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등에 업고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친구가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 등에 업고 가는 아이는 누구인가?" "응. 우리 아들일세." 짓궂게도 그 친구는 이번에는 등에 업혀있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정말로 너를 등에 업고 가는 이 아저씨가 너의 아버지냐?" 

그러자 아이는 뜻밖에도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글쎄요. 사실은 잘 모르겠는데요." 그 기막힌 소리에 아버지는 아들을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그쳤습니다. "내가 지금 너를 등에 업고 가는데 내가 너의 아버지인줄 모른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그러자 아들이 당돌하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를 등에 업고 간다고 해서 무조건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군도 나를 등에 업어주고 옆집아저씨도 내가 귀엽다고 업어주지 않습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아버지는 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너를 먹여 살리겠느냐?" 그러자 아들이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먹여준다고 해서 무조건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삼촌도 나를 먹여주고 다른 사람도 나를 먹여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아들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만일 내 아버지라면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대 보세요."
이것이 집안의 탕자의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지금도 풍성하신 복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할지라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새 생명'이라 부릅니다. 이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 자의 특징 중의 하나는 마음의 평안함입니다.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알기에 평안함이 있습니다. 때로는 다가오는 고난이나 환난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인 기쁨이 주어질 줄을 믿고 알기 때문에 그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습니다.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벌은 큰 아이의 얼굴 주변을 맴돌면서 윙윙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이는 무심결에 손을 들어서 벌을 떨쳐내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벌은 갑자기 큰 아이의 눈언저리에 따끔하게 침을 쏘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아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손으로 쥐고서 아파 죽겠다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은 성에 차지 않는 듯이 이번에는 작은 아이의 얼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지레 겁을 먹고서 아버지 뒤에 숨었습니다. "아빠! 벌이 나를 물려고 해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작은 아이를 토닥거려주면서 이렇게 달랬습니다. "얘야, 겁먹지 말아라. 이미 저 벌은 네 형을 쏘았기 때문에 그 벌에는 더 이상 침이 없단다. 너를 쏘려고 해도 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큰 아이의 얼굴에 박혀있는 벌의 침을 뽑아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작은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여기 벌의 침이 있잖아! 저 벌이 너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침으로서 너를 해치지는 못한단다."

영적으로 죄의 침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침을 이미 쏘아버렸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침을 쏘았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침을 이미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망의 침으로 쏠 수가 없습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복음을 증거하실 때 한 여인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혀 왔습니다. 이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여인을 예수 앞에 세우고는 예수께 그 여인에 대한 처리를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모세 율법에서는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하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부정한 죄로 고소하려 함이요,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예수의 교훈인 사랑의 법에 모순됨을 지적하며 비난하려는 그들의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하여 그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응답에 그 곳에 여인을 처벌하러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씩 떠났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의 현명한 대답은 죽음을 당하여야 했던 여인을 구원하였고, 예수님도 유다인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여인과 예수만 남게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모든 자와 더불어 자신도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의 죄에 대해 용서를 선포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용서하심과 명령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어집니다. 주의 용서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시 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영을 따르는 자'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 가는 모든 과정에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로서의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자기 아비에게 자신의 분깃을 달라는 이야기로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부자 아버지 슬하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세계를 동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오게 될 분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의 고집을 안 아버지는 그에게 돌아갈 재산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자기 재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곧 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탕진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돼지를 치는 종의 자리에까지 전락하였습니다. 게다가 먹을 것이 없어 심한 굶주림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배고픔으로 인해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회상하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바로 일어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목격하고 아직도 상거가 먼데도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은 아버지의 기뻐함과 아들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이웃 사람들과 함께 돌아온 아들로 인해 기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죄인의 회개를 자장 기뻐하십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 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담대히 부를 수 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은 성령께서 증거하시며 보증이 되십니다.
영을 따르는 자로서 영의 일을 생각하고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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