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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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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 (요 9:1~12)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서러움을 경험합니다. 
그 서러움 중에 가장 큰 서러움은 아마 보지 못하는 서러움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날 때부터 맹인이 된 한 사람이 출연합니다. 
그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도 볼 수 없었습니다. 
노을 지는 석양의 신비로움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됩니다. 


이 맹인이 눈을 뜨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1. 한 사람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2-3절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대할 때 흔히 할 수 있는 질문이겠지요? 
어릴 때부터 정신지체아가 되었거나 소아마비가 되었거나 난치병 또는 불치병에 걸렸으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부모의 죄 때문인가?”라고 한번쯤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이해되어 왔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맹인을 보는 두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1) 제자들의 관점은 이 사람의 과거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맹인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과거에 어떤 죄를 졌기에 이렇게 앞을 못 볼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죄의 결과로 질병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 부모의 죄 때문에 질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5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우리 부모들이 반듯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 또한 자신의 죄 때문에 질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약 5:16절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죄와 질병을 연관시켰습니다. 
이런 말씀 때문이었는지, 제자들은 이 사람의 과거를 캐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가만히 보면, 제자들과 같이 너무도 쉽게 과거에 초점을 맞춰 사람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떤지 알아? 그 사람 믿지 마!”
“이제까지 말썽만 피웠는데 별 수가 있겠어요?” 

이런 모든 말들은 ‘과거에 이러이러했으니까 현재도 별 수 없어!’라는 과거에 초점이 맞춰진 평가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초점을 맞춘 판단, 선입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기와 의욕을 떨어뜨렸는지 모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고 평가합니다.

3절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여러분,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미래에 초점을 맞춰 평가해야 합니다. 

어제까지 망나니였고, 어제까지 게으르고, 어제까지 몹쓸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내일 그를 어떻게 쓰실지 모릅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주님이 묻지 않으시는데 왜 우리가 묻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미래의 전혀 새로운 삶을 기대하시면서 바라보십니다. 
저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할 때 성도들에게 늘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을 바라볼 때 성에 차지 않고,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을 붙들고, 세우시고,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믿고, 하나님 때문에 자녀들의 미래를 기대합시다.”
기억하시지요?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실패의 경력, 흔히 말하는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도 실패의 경력이 있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대면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살인 전과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문자 그대로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 역시 실패의 쓰라린 경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붙드셔서 찬란한 미래를 가꾸셨습니다. 
맹인이 보게 되는 이적에는 이와 같은 주님의 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시는 데에 온갖 지저분한 일을 다 하셨습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꼭 이런 방법으로 치료하셔야만 했을까요?(질문) 
고쳐주시려면 좀 폼 나게 손으로 한번 쓱 쓰다듬고 “다 나았느니라.”하면 안 됩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셨을까요?(질문) 
거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 맹인에게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정도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열왕기하 5장 10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아람장군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아람장군 나아만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문둥병을 고쳐보겠다고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내다보지도 않고 대뜸 “요단강물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러면 낫게 되리라”고 한 마디 말만 던졌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의심도 생기고.......슬그머니 부아가 났습니다. 
“아니, 엘리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상처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해도 성이 찰까말까 할 판인데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한 마디 내뱉고 내다보지도 않다니........ 요단강 물에 몸을 씻어 나을 것 같으면 차라리 우리 아람나라의 다메섹 강, 아마나 강, 바르살 강이 훨씬 낫지. 나는 못하겠다!” 

그 때 지혜로운 하인이 “이것은 당신의 믿음을 테스트 하는 것입니다. 몸이 낫는다면 이보다 더 한 일인들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믿고 순종해보십시오.” 
나아만 장군이 하인의 권면을 듣고,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믿음의 테스트!
이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합니다. 
오늘날 이런 개명천지에서도 맹인이 지나가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는데 맹인의 얼굴에 흙칠까지 해놓았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얼마나 빈정대고 웃었겠습니까? 

사람들의 재미있다고 웃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옵니다. 
“아무리 당신이 보기를 원한다지만 믿을게 따로 있지. 그 말을 믿고 실로암 물가로 가느냐?”는 조롱소리도 들립니다. 
2Km 이상이 되는 길을 가면서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일어서고 하면서 쏟아지는 비웃음을 받을 때 “내가 꼭 이 짓을 해야 하는가?”하는 회의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이런 회의를 극복하고 순종합니다. 
그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꼭 믿었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보게 되는 이적에는 이와 같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3.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16절에 보면,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을 고쳤기 때문에 종교적인 엘리트인 바리새인들은 엉뚱하게도 안식일에 대한 신학논쟁을 벌입니다. 

‘안식일에는 일해서는 안 되는데,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느냐? 안식일에 일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
여러분, 안식일에 18년 동안 앞을 못 본 맹인을 보게 한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어요.

싸늘하고 냉정한 박재된 인간, 율법주의자일 뿐입니다.
인간미가 없어요.
저가 여러 교우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그 어떤 제도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맹인을 고친 이적에는,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시골 교회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수요저녁예배를 마쳤는데 ‘아무개 집의 어린 딸이 몸에 열이 펄펄 끓어 다 죽어간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시골 여자 전도사님과 교우들이 가보니, 저도 물론 따라갔지요, 아이가 이미 고열에 의식을 잃었어요! 
그때 시골에서는 아스피린도 없고, 타이레놀도 없고, 고작 꿀물만 입에 떠 넣고, 비약이라는 ‘영사(수은을 고아서 만든)’만 갈아 먹일 때였습니다. 

시골 여자 전도사님이 ‘우리 기도합시다.’하고 그 죽어가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도하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그치지 않고, 먼동이 터 밖이 환해질 때까지 기도하더라고요. 
저는 어렸을 때니까 한쪽 구석에서 조금 기도하다가 눈을 뜨고, 조금 기도하다가 눈을 뜨고, 그랬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먼동이 터 창이 훤히 밝아올 즈음 죽어가던 아이가 눈을 뜨고 “엄마 배고파!”하고 말을 하더라고요!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아이가 살아난 것은 그 여전도사님의 사랑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사랑이 육신의 질병도 고치고, 영혼의 질병도 고칩니다.
맹인을 고친 이적 사건에는 이렇게 사람에 대한 기대,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에는 이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되었습니다. 

1.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인 맹인들이 있었습니다. 

불신과 편견을 가진 바리새인들입니다. 
39절-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우리도 맹인인가?”
얼마나 재미있는 말입니까? 
듣긴 바로 들었어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맹인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맹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면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 맹인이 됩니까? 

㉠ 영적으로 병들면, 영적맹인이 되지요. 

육신이 병들면 식욕이 없어지고, 만사가 시들해지는 것처럼 영적으로 병들면 말씀, 예배, 기도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고, 신앙생활이 시들해집니다.
말씀, 예배, 기도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고 신앙생활이 시들해집니까?
영적맹인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 영적으로 잠들면, 영적 맹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이 잠들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잠들면 보고 듣지 못해 가치혼돈이 일어납니다. 
뭐가 우선인지, 뭐가 차선인지 혼란이 옵니다.
돈 버는 것이 우선인지 예배드리는 것이 우선인지 흔들려요.
영적맹인의 증상입니다.

㉢ 영적으로 죽으면 영적 맹인입니다.

육신이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으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죄를 져도 두렵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죄를 져도 두렵지가 않습니까?
영적맹인이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심각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2. 보긴 보았지만 세상 두려움으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맹인의 부모들입니다. 
21절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들이 정말 몰라서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아니지요.
다 알지만 세상에 대한 두려움, 출교의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얼버무리고 맙니다. 

22절을 보세요.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그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들에게 세 가지 벌이 있었는데. 30일 동안 회당 출입을 금하는 벌, 그래도 반성의 기미가 없으면 동일한 기간 아무도(가족조차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벌, 그래도 거부하면 출교(파문)시키는 것입니다. 
이 부모들은 인간적인 손해 때문에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손해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입니다. 

식당에서 식사하기 전 눈을 감고, 머리를 숙여,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린다는 것은 상당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교인들이 식사할 때를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기도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저부터 드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고개를 한번 쓱 돌리면서 기도를 끝내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그 모습도 경건하게 진짜 감사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3. 육신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도 뜬 사람이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맹인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달라집니다.
처음에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단지 자신의 육신인 질병을 고쳐준 사람으로만 알았습니다. 
11절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다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알았습니다. 
33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신적 존재요, 구원자로 인정하는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38절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이 맹인은 육신의 눈이 떠짐과 더불어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구세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협박에 굴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소환한 종교 지도자들의 맹인됨을 은근히 조소합니다.
30절에 보면 “이상하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못 보는 사람들이 이상했습니다! 

“왜 이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까?”, “왜 이분을 믿지 못할까?”, “이 분을 만나면 얼마나 인생이 달라지는데…”, “이 분을 만나면 팔자가 고쳐지는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본문의 맹인처럼 여러분도 영적인 시야가 환히 열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라고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외톨이가 되더라도, 심지어 목숨을 잃더라도 “예수, 나의 구주!”를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맹인이 눈을 떠서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제발 너희도 영적인 안목이 열려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믿으라.’

복음성가 -‘나는 알았네.’
“알았네 나는 알았네 잿빛 생활에 지쳤음을 세상 쾌락을 찾아봤으나 고통뿐이었다네 삶은 의미없고 안식 없었네 그러나 이젠 달라 새 삶이 내게 임했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자리에 있습니까?
㉠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인 맹인의 자리에 있습니까? 
㉡ 보긴 보았지만 세상 두려움으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의 자리입니까?
㉢ 영적인 눈을 떠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의 자리입니까? 꼭 그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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