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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라 여호와 앞에서 (시 9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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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여호와 앞에서 (시 95:6~11)


미국의 부흥사 무디(D.L.Moody)가 주일날 교회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거지 소년이 교회에 들어가겠다는데 안내위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디가 소년에게 다가서자 안내위원들이 만류합니다. "목사님, 얘는 안됩니다. 예배분위기가 훼손되어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거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아해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강대상 위에까지 소년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설교시간에 무디는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입장불가였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오니까 성전 안만 아니라 강대상 위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죄인인 모든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남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런 우리들을 안고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가셨습니다. 소년이 입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날 성도들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구원에 대한 감동과 감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치 없고, 쓸모 없는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목표아래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 를 행동지침으로 삼았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고 있음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즉 겉으로는 예배요 말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사람이 중심 되고, 사람이 드러나고, 사람이 기뻐하는 예배는 하나님과 무관한 예배입니다. 

겉으로는 기도요 말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정작 자신의 주장과 고집, 욕심만 내세우는 기도는 하나님과 무관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하고 드리는 기도와 예배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이 기도하는 내 앞에 계시며, 예배하는 내 옆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바로 앞에 얼굴이 닿을 듯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예배할 때도 내 곁에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습관적이고 진부한 예배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삶을 바꾸는 역동적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초대장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시편 93편부터 100편까지는 예배의 초대장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예배로의 초대장이 본문 시편 95편입니다. 본 시편의 주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부터 이 시는 예배의 부름이나 안내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예배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로 무릎을 꿇으라

영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은 하나님 사랑, 국민 사랑, 나라 사랑으로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살폈습니다. 어느 날 가난한 과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과부는 여왕이 친히 왕림하심에 어쩔 줄 몰라합니다. 여왕이 과부에게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이 집을 찾았던 손님 중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누구입니까?" 과부는 대답을 합니다. "가장 소중한 손님은 여왕 폐하시옵니다." 여왕은 실망한 눈빛으로“예수님이 당신을 찾은 가장 귀한 손님이 아니십니까?" 

그러자 여인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여왕 폐하,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십니다.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러자 여왕은 과부의 신앙에 감탄하며 돌아갔습니다. 궁궐로 돌아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과부를 위로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천사였습니다.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이 나라에 세세토록 주인이 되시고 궁궐의 주인이 되어 주소서. 그리고 생전에 이 왕관을 주의 발 앞에 드리며 살게 하소서."

본문 6절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존경과 복종의 의미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방식은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예배가운데 존경과 복종이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뜻과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책망할 때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 (삼상 15:22)고 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예배행위,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예배행위를 지적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무릎 꿇고 자신을 낮추면서 아멘으로 받는 행위입니다.

한신대 김정준(金正俊)교수는 "교회에 의자가 들어온 이후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예배 태도를 잃어버렸다. 과감히 의자를 치워야 한다" 고 강조합니다. 의자가 들어온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기호와 편리성 때문입니다. 예배는 즐거움으로 드리지만 무례하거나 천박하지 않도록 경건한 태도를 유지해야 만합니다. 4절에 보면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원문에 나오는 '그 위에' 란 뜻은 '그 손안에' 라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면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이기에 무릎을 꿇는 태도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음성을 들으라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유교 신자였는데, 항일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독방에 갇혀 지내는데, 어느 날 감옥의 마루 틈 사이에 쪽지 하나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심하던 차에 쪽지를 꺼내 읽어보니 신약 성경의 산상수훈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5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라" 는 말씀입니다. 그는 허무 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라고 비웃으며 쪽지를 다시 마루 틈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런데 심심해서 쪽지를 다시 꺼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꺼내 보고 비웃고 다시 꽂아 넣고 그러다가 다시 꺼내 보고 비웃고는 다시 꽂아 넣고... 이렇게 수백 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의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그는 말씀에 감화를 받아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기독교계의 빛나는 지도자로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가 신비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있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게 된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너희가 오늘날 그의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기원문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조건문으로 시작합니다.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선택사양(option)이 아닙니다. 예배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해야 합니다. 여기에 예배의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고, 나의 잘못된 부분이 무엇이며 결단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 직장과 사업장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를 통해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삶의 기준이며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삶이 되려면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로 마음을 강퍅케 말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수도사를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끝없이 자기 얘기만 합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을 들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는 가만히 상대의 찻잔에 물을 부었습니다. 가득 차 있는 찻잔에 계속 물을 부었습니다. 물이 주르룩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야기 도중에 말합니다. "수도사님, 아직 잔을 비우지 않았는데 어째서 자꾸만 물을 붓습니까?" 

그러자 수도사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마음이야말로 당신의 생각으로 꽉 차서 내가 할말이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내 말을 들을 여지도 없고 빈방이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 찻잔과 같습니다." 내 생각으로, 내 고집으로, 내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면 아무 것도 들리는 것이 없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여기의 '강퍅' 이라는 단어는 '반항하다, 완고히 하다' 라는 뜻입니다. 주로 하나님 앞에서의 반항적인 태도에 사용되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더 큰 불행을 초래합니다. 왜 므리바와 맛사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본문은 강조합니까? 믿음과 순종이 없이 나아가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 임재 하심을 보여주고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순종하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변화되지 않음은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미혹되었습니다. 마음이 잘못된 곳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하나님을 광야에서 만나고도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관심사가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고기 한 조각 못 먹어 원망했고, 물이 조금 없을 때 불평했고, 음식이 모자랐을 때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다른 곳에 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미혹되어 강퍅한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음과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강퍅한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예배를 훼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면서 땅의 것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까? 여전히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지위와 더 나은 건강을 위해 예배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녀들이기에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바른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며 생명의 양식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가 될 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디 여호와 앞에서 무릎을 꿇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귀가 열려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강퍅함을 물리치고 순종하는 마음이 되어 하늘의 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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