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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루마리와 에바 (슥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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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와 에바 (슥 5:1~11)


미국에는 도로 표지판들이 참 잘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미국에 가서 운전을 하며 다니게 되었을 때, 길을 찾아 가는 표지판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주의'나 '경고'의 표지판들이 참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가 있으니 천천히 가라는 표지판, 사슴이 잘 건너다니는 길목이니 조심하라는 표지판을 비롯하여, 이 동네에는 귀먹은 어린이가 살고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표지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운전자의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곳마다 정말 자세하게도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한미군들에게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가장 불편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도로 표지판들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그 첫 번째로 꼽는다고 하는데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알게 된 것은, 그런 경고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바로 그 경고 내용에 해당되는 사고를 일으켰을 때에는 그 벌도 과중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비슷한 정도의 사고를 내거나 위반을 하더라도 그런 경고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일으켰을 때에는 평소보다 갑절의 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제가 살던 동네에서 언젠가 '공사중'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골목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미 도로공사용 차량 한 대는 길가에 세워져 있었지만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고 또 이미 퇴근했을 만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냥 평소의 제한속도 그대로 통과해 버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어떤 교통경찰이 제 집에 찾아와서 전날 저녁에 그 공사 차량의 뒤쪽에 앉아서 쉬고 있던 인부들이 제 차가 감속하지 않고 지나갔다는 신고를 해 왔다고 하면서 위반딱지를 떼어주는 바람에 꽤 많은 벌금을 물어내야 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경고가 확실하면 할수록 그 경고를 어겼을 때에 받는 벌은 더 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 사회에서는 아주 당연한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중에도 그와 똑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의 인생길에 큰 경고판을 하나 세워 두고 계시며,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당연히 중한 벌을 받도록 정해 놓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세워진 하나님의 경고 표지판, 그리고 그것을 보고도 위반하면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중벌이 과연 무엇인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경고를 인생들에게 명백히 보여 주는 '두루마리의 표지판'입니다. 

본문 1절로 4절에 기록하기를 "1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2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3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4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 유다인들을 향하여 '선민의 회복'과 '열방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해 주고 있던 선지자 스가랴는 이 5장에서 이제 '다섯 번째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든즉"이란 말은 바로 지금 스가랴 선지자의 눈앞에 나타나는 환상의 장면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하나를 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루마리'란 바로 구약 성경을 기록했던 책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책이란 좌우로 길게 연결된 양피지에다 내용을 기록한 후에 둘둘 말아서 보관했던 것이었고, 성경 역시 그런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스가랴가 환상 중에 본 두루마리는 상당히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광이 십 규빗"이요 "장이 이십 규빗", 즉 폭이 거의 5미터이고 길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두루마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큰 두루마리가 말려져 있지 않고 펴져 있었으니, 실상 이것은 무슨 두루마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엄청나게 큰 플래카드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 두루마리는 "날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구약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는 보관장 속에 안치하고 문을 닫아 두는 법인데, 그 두루마리는 하늘 위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큰' 두루마리가 '펼쳐진 채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이 모든 사람의 눈에 '분명하게 보이고 정확하게 읽혀질' 수 있게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즉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사실은 무슨 숨겨진 비밀이거나 스가랴 한 사람에게만 몰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는, 공개된 진리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 그 '공중에 날아가는 대형 두루마리'에 씌어 있었습니까?

스가랴에게 그 환상의 의미를 해석해 주고 있던 천사는 3절 말씀에서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 세상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저주'가 바로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다는 뜻입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저주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각각 그 두루마리의 "이편"과 "저편" 즉 양쪽 면에 하나씩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무릇 도적질하는 자"와 "무릇 맹세하는 자"들은 "끊쳐질 것이라"는 저주들로서, 바로 십계명의 제8계명과 제3계명에 해당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즉 "도적질하는 자"에 대한 저주는 바로 십계명의 후반부인 '이웃에 대한 계명'을 범하는 죄들에 대한 저주를 대표하는 것이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에 대한 저주는 십계명의 전반부인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어기는 죄들에 대한 저주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스가랴가 본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은 바로 율법 전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며,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큰 글자로 씌어 있었기 때문에 십계명을 다 들어가지 못하고 그 두 가지 계명들만 대표적으로 기록된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서 '율법'이 특별히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범죄자는 "끊쳐지는" 벌, 즉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에서 끊기어지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쫓겨나가게 되는 벌이 반드시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 상반절의 "내가 이것을 발하였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에서 "이것"이란 바로 '죄에 대한 저주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며, 범죄자를 반드시 벌할 것은 당신께서 스스로 천명하시고 공언하신 사실로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이루고야 마실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이것"은 곧 이어지는 4절 하반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면서"라는 말씀의 주어에도 해당되는데, 이것은 그런 범죄자에게 형벌이 내릴 때 바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그 형벌의 집행자처럼 작동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사법 제도에서는 여전히 미해결의 범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심증이 확실하여 체포는 했지만 물증이 부족하여 처벌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며, 어떤 범죄는 아예 아무 단서도 없이 그냥 오리무중에 빠져서 영원히 '풀지 못할 미스터리(unsolved mystery)'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니 미국의 유명한 은퇴 풋볼선수처럼 자기의 전처를 살해하고도 비싼 변호사만 잘 쓰면 아무 탈 없이 무죄방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로 크나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정확하고 공의로운 법 아래에서는 그런 '증거 불충분의 불기소 처분'이나 흐지부지한 판결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백(白)보좌 심판대' 앞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자기가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저지른 죄들을 두고 적당히 변명하거나 부인하여 어물쩍 넘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 표지판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단정지' 신호를 지키지 않고 그냥 지나가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혔을 때에 "나는 표지판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빨간 팔각형 모양으로 돋보이는 그 표지판이 그 교차로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의 눈에라도 금세 들어오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세워져 있는데 어떻게 그런 핑계를 둘러댈 수 있겠습니까?
  
'제한속도'를 초과하여 달리다가 감시카메라에 찍혀서 벌금딱지를 받게 되었을 때에 "그 도로의 제한속도가 얼마인지 몰라서 그랬습니다."라는 변명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제한속도 숫자가 뚜렷이 적혀 있는 표지판이 바로 그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같은 자리에 항상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못 보았다는 것이 어떻게 핑계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이 성경 말씀은 '날아가는 큰 두루마리'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보고 읽을 수 있도록, 즉 아무도 나중에 핑계를 댈 길이 없도록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필연적인 징벌을 명백히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에는 반드시 시력검사도 같이 받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운전 중에 전방에 멀리 있는 표지판을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교통 표지판들을 읽지 않고 그냥 운전하면 반드시 사고를 낼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본인도 다치지만 타운전자나 보행자에 대한 인명 피해를 내게 될 것이며 또한 전체 교통질서에 크게 방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서, 교통 표지판을 읽지 못하면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의 경고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예 인생을 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인생을 망칠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피해를 끼칠 '범법자'요 '악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지 아니하고 '사람 앞에서 악인'이 되지 아니하도록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위에 '큰 두루마리의 경고 표지판'으로 나타난 성경 말씀 한절 한절을 늘 눈여겨 읽고 마음에 깊이 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저주에 스스로 사로잡히게 만드는 '에바의 함정'입니다. 

5절로 11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5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7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8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9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10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매 11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루마리의 경고를 받고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이 어떻게 되고야 말 것을 곧 이어지는 "에바"의 환상을 통하여 보여 주고 계십니다.
'에바'란 당시 곡식을 잴 때 쓰던 용기로서 약 22리터 정도의 양을 담을 수 있는 광주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의 '에바'는, 아까 두루마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통의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서 "한 여인이 앉을" 만한 크기로 나타났습니다. 

그 "에바"를 가리켜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눈'이지만, 본문에서는 눈이 '사람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마음의 창'과 같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의역을 했으며, 이 번역을 따른다면 그 '에바'가 바로 '불경건한 자들의 사는 모습'과 같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혹은 이 '모양'이라는 단어를 직접 '불법' 혹은 '죄악'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은, 그 에바 한가운데 앉아 있는 여인을 가리켜 "이는 악이라"고 그 천사가 해석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처럼 '죄악'을 어떤 여자로, 특별히 '음녀'라는 단어로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여자가 남자보다 죄가 더 많다는 뜻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유하는 이유는, 죄가 사람을 유혹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치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경우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죄란 것은 본능적으로 마음이 절로 끌려가고 또한 좀처럼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달콤한 꿀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죄란 것은 어느 누구라도 '참 짓고 싶은' 것이며, 한번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함정'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처럼 죄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면 그 다음은 끝장일 뿐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그 여인을 에바 속에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고 했습니다.
즉 그 여인이 에바에서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을 때 그 입구를 눌러 덮고 무거운 납 뚜껑을 얹어서 완전히 가두어 버리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여인은 그 에바 속에 갇혀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만 기다리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에바는 "학의 날개 같은 날개"를 가진 두 여인에 의하여 "천지 사이에" 즉 하늘 위로 들려서 "시날 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시날 땅'이란 바로 바벨론 제국의 주요 도시들이 세워져 있던, 즉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악명 높던 지역이었습니다.
  
그 에바 속의 여인은 바로 그 시날 땅으로 옮겨져서 거기서 그녀를 위하여 지어지게 될 "집이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집"과 "처소"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처소'와는 대조되는 것으로서 바로 '악인을 징벌하기 위한 처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악의 상징인 여인'이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신앙 공동체 안이 아니라 바로 우상숭배하는 불신자들의 공동체 안이며, 그런 악한 불신자들의 종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저주의 집'인 지옥에 감금되어 영원히 "머물게" 되는 것밖에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몸은 바벨론에서 해방을 받고 돌아왔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바벨론의 악한 잔재에 물들어 있을 위험이 다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악의 요소라도 이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깨끗이 구별해 내고 하나도 남김없이 그 악의 고향인 '시날 땅'으로 쫓아내 버리는 것이 실로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마 귀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은 바벨론 제국을 생각할 때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한 분노심만 가득했을 것이며 따라서 바벨론 제국이 그들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언제 갚아 주실까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바벨론 제국이 당연히 받게 될 벌이 언제 내려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벨론 제국의 죄악의 잔재를 조금이라도 본받거나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바 속에 악의 상징인 한 여인을 가두어서 바벨론의 시날 땅으로 쫓아내 버리는 환상을 통하여, 바로 이 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생각할 때에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는 것을 두고 분노하며, 정신대의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치를 떨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일본을 볼 때 아직도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 그것만 보고 있지만, 그 죄에 대한 징벌은 그저 하나님의 공의에 맡겨 두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그 일본이 남겨 준 나쁜 잔재를 빨리 버려야 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폭음을 하고 술주정을 하는 이 대표적인 악습이라든지, 중고등학교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군대에 이르기까지 무슨 조직만 되면 그 안에서 후배를 구타하면서 기합을 주는 못된 전통 등, 우리는 아직까지도 일본에게서 배웠던 이런 '악습의 광주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세계에서 미신이 가장 많은 나라로 악명 높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신사참배로써 우리 조국의 기독교를 그토록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일이 바로 엊그제인데,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죄악까지도 모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소위 '단군 숭배'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따져 보아도 아무 변변한 철학도 윤리도 사상도 없으며 정말 허황된 전설 하나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서 온 국민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지주로 삼겠다고 하고 있으니, 시급히 '시날 땅'으로 내쫓아야 할 '죄악의 광주리'를 오히려 수입하려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망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들께서는 새를 잡을 때 쓰는 아주 간단한 올무를 잘 아실 것입니다.
'바구니' 한 개를 기다란 '줄'이 달린 짧은 '막대기'에 걸쳐서 한 쪽을 세워서 엎어 놓고서 그 밑에다 모이를 뿌려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새가 와서 그 바구니 밑에 있는 미끼를 먹을 때 막대기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면 간단하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지는 것도 똑같습니다.
일단 유혹의 미끼에 대하여 마음이 끌리고 거기에 탐닉하게 되면 바로 '에바의 광주리'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며,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그러하니라"는 말씀대로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대부분의 불신자들의 '인생 모양'인 것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가는데 가끔 가다가 한 주일 쯤 빠지는 것 정도야 어떨라고.'라고 하면서 주일을 빼먹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자신을 유혹하는 마귀의 미끼인 줄을 정말 모르겠습니까?
'요즘 경기가 너무 나빠서 밥 먹기도 힘든데.'라고 하면서 아주 당연한 듯이 십일조를 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주일헌금은 내고 있다고 자기 스스로 합리화시키는 생각, 그것이 바로 제 발로 '에바의 광주리' 안에 들어가려 하는 천하의 바보짓인 줄을 정말 모르겠습니까?
  
'일단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생활하자.'라고 하면서 고3이 되면 아예 교회와는 잠시 담을 쌓고 공부만 하겠다는 계획, 자신의 전 인생이 죄악의 도성 '시날 땅'으로 아예 완전히 이주해 버리게 될 것이 뻔히 보이는 무서운 함정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그러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을 끝까지 모르겠다는 사람, 바구니 밑에 있는 미끼를 먹겠다고 그 안에 들어가는 어리석은 새들과 아무 다를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라고 엄히 경고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악은 그 모양이라도 즉시 버리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악의 광주리' 속에 갇히게 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으시는 '납 뚜껑'이 덮이게 되면 다시는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상과 짝하려는 유혹'을 제거하고 '불신자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함정'을 철저히 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도로에 경고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 경고 내용을 가능하면 많은 운전자들이 어기고 그래서 많은 벌금을 부과하고 많은 위반자를 감옥에 집어넣고자 하는 것이 그 원래의 목적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가능하면 그 표지판의 경고를 잘 지켜서 어찌하든지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길이 되게 하고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역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어기고 지옥의 형벌을 받도록 만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 말씀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라는 장애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고를 예의주시하고 순종하여 참으로 평안하고 복된 금세와 내세를 달려가도록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크고 높이 걸린 플래카드'처럼 누구나 다 보기 쉬운 것이며 '간단명료한 교통표지판'처럼 누구나 다 지키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성경의 '두루마리'만 보고 따라가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복스러운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로의 표지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법에 의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벌금형 정도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음주운전으로 수차례에 걸쳐서 적발되거나 사람을 치어 죽이게 되면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벌을 받아도 아무 변명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전에 이미 충분한 경고가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발하심" 즉 '명백한 저주를 미리 선포하심'으로써 그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고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성경, 여러분이 매주일 듣고 있는 강단의 말씀, 여러분이 주말마다 구역예배를 통하여 나누고 있는 성경공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텔레비전만 틀어도 들을 수 있는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들, 정말 이 시대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큰 글자로 기록된 '두루마리'가 온 천지에 '날아다니는' 때가 언제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명백한 '두루마리의 경고'를 보고도 지키지 않는 자는 '에바의 심판'을 결코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시편 기자가 고백하며 찬양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인생길을 이처럼 밝고도 분명하게 비춰 주시는 '두루마리'의 지시와 '에바'의 경고를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조금도 치우치지 않고 아무 사고나 파선을 당하지 않는 가운데 끝까지 신앙의 대로를 안전하게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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