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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약 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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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약 4:13~16)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잠4:14)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들어야 할 질문이고 깨달아야 할 질문입니다. 이것은 ‘너희 생명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또는 ‘누가 내일의 너희 생명을 보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미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생명에 대한 제한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입니다.
  
야고보는 우리 인간이 자기 인생에 대하여 자신감 있게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는 존재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실로 인생의 한 치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14절)고 했습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 부근 인도양에서 일어난 남아시아지진해일 ‘쓰나미’로 인해 인도네시아와 주변국 나라들 심지어 인도까지 바닷가의 많은 마을들이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이 쓰나미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11만 229명을 비롯해, 스리랑카·인도·타이 등 주변국 해안지역에서 총 15만 7천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당시 일어났던 쓰나미는 바다 밑에 있던 지층이 어긋나면서 생긴 것인데 그 위력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이백만 배가 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진 해일이 일어 난 후에 사람의 시체는 많았지만 야생동물의 시체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쥐떼와 조류들과 그 밖의 들짐승과 같은 야생동물은 사람에게 없는 감각기능이 있어 재앙이 나기 전에 엄청난 지진을 감각으로 느끼고 대비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나 알고 있는 것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을지라도 야생동물 만큼도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종국을 알지 못하고 불확실성가운데 있으면서도 허탄한 자랑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시성입니다.
  
야고보는 ‘너희는 잠간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절)고 했습니다. 인생은 잠 깐 나타났다가 순간 사라지는 안개 같은 ‘잠간’의 인생이고 사라지고 마는 허무한 인생입니다. 곧, 일시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일시성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시102:11)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시39:5)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욥14:1-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1:24) 

  
소멸성입니다.
  
생명에는 육으로 받은 생명이 있고 영으로 받은 생명이 있습니다. 육의 생명은 죽으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소멸하는 육체의 생명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을 알지 못하고 경시하면서 소멸되는 육의 생명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종국은 허무함이고 절망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제한성을 가진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가?’ 를 질문하거나 그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두 가지 우를 범하고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그 하나는 13절의 말씀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야고보는 당시 부를 쌓아가는 상인들을 인용하여 그들이 장사의 목적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들의 굳어있는 자기 확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계획이나 높이 쌓는 물질이 우리의 인생과 생명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한가지의 필요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유에 말씀으로 이 부분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16-20)

  또 다른 하나는 16절의 말씀입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우리의 생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할 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바로 ‘허탄한 자랑’ 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인생의 자랑은 모두가 허탄한 것입니다. 이런 허탄한 자랑은 잠간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에 이런 것들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을 줄 모르고 그 질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허탄한 자랑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인간으로서 제한성을 가진 우리에게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고 질문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질문의 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성경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의 답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15절과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15절)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절)   
  
첫 번째는‘주의 뜻이면’이란 말씀이고 두 번째는‘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새 번역 성서에서는 ‘주의 뜻이면’을 ‘주님께서 원하시면’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선행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 때는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와 아닌가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그러므로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행의 핵심을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함께, ‘이웃사랑의 법’을 최고의 법(약2:8)으로 칭하면서 선행의 핵심으로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선행의 삶을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어야 하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역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다시스로 가는 것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인간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키소’는 돈을 넣는 주머니를 말합니다. 돈 주머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코소’는 술잔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무엇을 즐기고 사는가를 묻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인생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어디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카소’는 사람의 노여움을 가리키는 말로 인내력을 묻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감정을 얼마나 잘 다스리는 가를 가리키는 말로 자제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기감정을 잘 조절하며 살았는 가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치관을 가지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정표현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나의 즐거움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표현하고 있는 감정표현은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내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그 일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크고 고통스러운 일이었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함께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의 심중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예수님은 그날 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끝내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의 생명은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하시는 것이 되었기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인류구원의 대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행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과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23:34)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시고 위하여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워하시고 분노하시거나 저주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용서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인생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는 영원한 삶의 길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깨닫고 답하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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