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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 항해길 (행 27: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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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항해길 (행 27:18~26)


마지막으로 김밥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요즈음 김밥 가게도 불황이지만 김밥 가게 옆의 도너스 가게는 더 엉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경제 불황에다가 건강 챙기느라고 도너스 가게를 더 이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김밥이 도너스를 위로하기로 결심하고 도너스의 어깨위에 손을 다정히 얹고 그 어깨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도너스 형제, 힘을 내게 조금만 견디면 좋은 세월 오지 않겠나?” 그러자 도너스가 신경질을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고 합니다. “제발 내 어깨 치지나 말게나. 설탕 다 떨어지면 난 정말 끝장이란 말이야.”

우리가 삶의 고통을 만날 때 정말 필요한 것은 위로이지만 우리의 위로는 자주 이웃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통만 더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위로가 오히려 욥을 더 궁지에 몰아넣은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 사도의 항해 길에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바울이 선객들을 위로하는 장면을 보도합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 진정한 위로가 어떻게 이웃들에게 나누어 져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예, 드디어 죄수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밝혀 이제 가이사에게 항소하게 되어 가이사 황제의 최종 판결을 받고자 이스라엘 가이사랴 항구에서 이탈리아 로마 행 배를 타게 된 것입니다. 

행27:1을 보십시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이제 죄수 바울은 해로를 통해 로마로 이송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가이사랴 항에서 두로를 거쳐 소아시아 남단의 항구 도시 동 지중해의 관문이었던 무라(Myra)(5절)를 거쳐 무라에서 배를 갈아타고 여러 날 만에 니도(Cnidus)(7절)맞은 편에 이르렀으나 심한 바람으로 기착하지 못하고 그레테 섬 방면으로 항해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그레테 해변을 끼고 항해 하던 중 갑자기 소위 유라굴로(유로스=동풍, 아퀼로=북풍, 북동풍)광풍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이 바람은 남풍이 그레테 섬의 한 가운데 솟은 2,456m의 이다(Ida) 산맥과 부딪치며 생성된 강력한 북동풍으로 배를 남서쪽 망망 대해로 밀어내 파선 직전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선원들은 배의 가구를 다 버리며 악전고투했으나 풍랑은 잦아들지 않습니다.(18절)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져 없어졌더라” 저는 오늘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형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풍랑도 잦아들지 않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남북 대치의 상황도 별로 호전될 기미 없이 다시 맞는 광복 기념일-이런 역사의 풍랑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바울 사도에게서 배우고자 합니다. 

*인생의 파도, 역사의 풍랑 속에서-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절망적 풍랑 속에서도 바울 사도는 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4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과 하나님사이에 열린 소통의 채널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하나님의 천사는 이 풍랑 중에도 바울 곁에 그렇게 가까이 머물러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일어나도 역사의 주인, 전능자가 우리 곁에 그렇게 가까이 머물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지금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고. “너는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너 때문이라도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이 음성들은 바울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져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에 피터 로드(Peter Lord)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자기 집 파티에 플로리다 대학의 곤충학자 한 사람을 초청한 일이 있었는데 자기 집 뒷 뜰에 연결된 숲속을 산책하고 오더니 그 숲에는 적어도 18가지 종류의 귀뚜라미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귀뚜라미라고요?” 그는 그 집에 여러 해 살아왔지만 한번도 의식적으로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실은 약 200가지 종류의 귀뚜라미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문득 이 설교자는 사람은 듣기를 배우는 것이며 듣는 귀는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고 말합니다. 

아가5:2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0:4에서 고백하기를“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 싼 이 대기권은 온갖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들을 듣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파수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제가 기도의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풍랑을 만날 때 먼저 할 일-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입니다.

본문 2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의 영혼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백이나 환청에 불과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믿는 일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는 ‘말씀 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사55:10-11의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까?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 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 함이니라”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이를 가르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 인생의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난다 해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붙들고 나아간다면 그 풍랑은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 전 전북 익산 하림 주식회사를 방문하여 점심 식사를 할 때 김홍국 회장실 벽면 액자의 글이 생각납니다. “이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그 글은 자신이 운영하던 공장의 대형 화재를 겪고 난후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후의 김 홍국 장로님이 재기하면서 붙잡았던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 글은 본래 찬송가 “고요한 바다로”의 한 구절입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2)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 찬송보다 더 많이 알려진 “만세 반석 열리니”의 작사자이기도 한 영국의 어거스트 토프레이디(August Toplady) 목사는 세상에 태어난 다음해 아버지가 전사하여 홀 어머니 손에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가난과 질병으로 점철되었고 불과 38세 밖에 못 산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남긴 유언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는 나의 영혼을 내가 경외하는 전능자이신 나의 하나님께 겸손히 의탁합니다. 그는 진실로 내가 경험해 온 가장 은혜로우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나는 22년전 내가 회심할 때 나의 죄를 씻어 주시고 자신의 의로움으로 옷입혀 주신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가 보여주신 영원한 부요하심과 그의 변함없으신 친절에 근거한 나의 선택과 칭의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습니다.” 그는 자신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주님이 마침내 약속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하실 것을 확실히 믿었고 이 믿음으로 인하여 그는 인생의 가난과 질병 그리고 죽음의 풍랑 속에서도 여전히 감사하고 여전히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풍랑, 역사의 풍랑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이 위로를 받는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동일한 풍랑 속에 고생하던 이웃들에게 참된 위로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22절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라” 이 위로의 메시지는 다시 25절에서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에게 오늘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지도자가 풍랑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기도 중에 우리 조국의 배가 내일의 번영의 항구에 반드시 도착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풍랑속에 있는 회사의 직원들에게 CEO가 이렇게 말씀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원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나의 하나님은 어제 저에게 저의 회사가 수년 내에 놀라운 은혜를 입고 재기하여 세계 선교를 위해 존귀하게 쓰임받는 회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정적으로 풍랑을 겪고 있는 어느 날 그 집의 가장이 가족들을 모아놓고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그리고 나의 자녀들아. 어제 나는 QT중에 주의 음성을 들었단다. 그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이 우리 가정을 새롭게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이제 이 고난을 곧 끝나고 우리는 새 역사를 쓰게 될 것이라고. 그러므로 가족들이여, 안심하고 아빠와 함께 기도의 무릎을 꿇고 새로운 내일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준비했으면 좋겠다” 그런 나라, 그런 회사, 그런 가정의 내일이 상상이 되시는 지요? 우리의 역사는 그런 지도자, 그런 CEO, 그런 가장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새 마을 운동을 하면서 조국 근대화에 매진하고 있을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이상으로 우리 국가 우리 사회에 위대한 도덕적, 정신적 영향을 끼친 분이 있었다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회사, 직장, 관공서, 학교, 교회등이 당시 가나안 농군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새 나라의 비전을 키워갈수 있었는지요. 가나안 운동은 사실상 당시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던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초창기에 여름 수련회에 전 교인이 함께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소하여 교육을 받았던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그때는 김용기 장로님은 타계하시고 그 아들 되신 김종일 목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때였습니다. 본래 가나안 농군학교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부터 김용기 장로님께서 농민 운동과 복민 이념을 기초로 조국 광복과 그 이후의 복된 조국의 미래를 꿈꾸며 시작하신 운동이었습니다. 그분의 일생의 모토는 “한손에 성경, 한손에 괭이를!”이었습니다. 

그는 용인, 광주, 원주 등에서 시작하여 조국 방방곡곡에 메마른 황무지를 개간하여 가나안의 이상촌을 건설하여 복된 민족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이 어려울 때마다 산 중턱에 있는 기도실에 들어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던 중보 기도자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기도실 입구에 무엇이라고 씌어있는지 아십니까? “조국이여, 안심하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회사를 위해, 우리 교회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정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자라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고, “한국 교회여, 안심하라”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여, 안심하라”고. 기도하시겠습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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