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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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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고전 1:18~25)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린도전서입니다. 이 고린도전서는 말 그대로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라는 지역은 그 당시에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혹시 그리스 지도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그 지역이 어떤 곳인지를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는 그리스의 북부에서 남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본토의 대표적인 지역인 아테네나, 북부지역의 대표적 지역인 마케도니아에서 남부지역, 즉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는 그리스의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를 연결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해상을 통해서 물자를 운반할 때, 고린도 지역에서만 육로를 이용하면, 전체적인 이동거리가 300km정도 절약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해안지역을 돌아서 항해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훨씬 안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그 당시에 남쪽과 북쪽, 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고린도가 그 당시에 인구 70만의 대표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번성한 지역에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요즘으로 대도시교회입니다. 아주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에 자리잡은 대도시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이 고린도는 오늘날의 그리스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교회의 주된 성도들은 유대인과 헬라인들, 즉 그리스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교인들간에 분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바울은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안에 나느느 누구로부터 세레를 받았다, 나는 누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다투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다양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은사들도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들이 그들에게 오히려 분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간에도 분쟁이 있었습니다(고전11:18-22). 이러한 분쟁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권면하기 위해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런 분쟁가운데 있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를 향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우리 그리스도들의 신앙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해야할 유일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사람들과 다른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 진정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랑이 무엇이 되면, 우리가운데 분쟁이 사라지고, 진정한 성령의 코이노니아, 교통하심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유대인의 자랑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22-24절은 바울이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가,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의 중심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게 보이지 않지만, 영어성경이나, 원어성경을 보면, 22절의 맨 앞에 “왜냐하면”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바로 앞 절인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나서, 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22-24절입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이유, 왜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지에 대한 이유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는데, 그가 유대인든지, 헬라인이든지 상관없이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그에게 표적이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의 지혜, 특별히 철학적 지혜들이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 능력이고 참 지혜이기 때문에 그는 다른 표적으로나 다른 철학이나 과학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표적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으로부터 유대인의 특징중의 하나가 표적을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표적이란 것은 어떤 사실을 주장함에 있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적적인 증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라고 하면,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기적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할 때에, 그러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사실 바울에게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마태 12:38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의 특징,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저 십자가위에서 내려와 보라”는 식의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만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만 표적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표적을 구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는 수험생이나, 그 수험생의 부모에게 표적은, 정말 간절한 것입니다. 지금 암치료를 받고 계신 분들에게 표적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그런 기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그런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 병을 치료해 주십시오. 살아계심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제 가족을 위해 기도할 때나, 교회의 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치료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정말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16절에 보면 야고보 사도는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여러 가지 우리의 문제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있는 환자들을 고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운데 경제적인 어려움가운데 있는 이들의 경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분명히 그런 역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동일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구하는 바와 같은 놀라운 표적들이 바울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표적이 자랑이 되면...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일어난 그 놀라운 기적, 표적들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주목하고, 십자가만을 강조합니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강조를 두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는 교회내에 다툼과 분쟁이 있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쟁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서로간에 분쟁과 다툼이 있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가운데, 표적이 자랑이 되고, 기적이 자랑이 되고, 하나님의 은사가 자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선물들이 자랑이 되어서 그것 자랑하다가 서로간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표적을 받지 못한 사람, 뭔가 이적적인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 병고침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마치 자신의 표적만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인 것처럼 자랑하면서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표적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나는데, 표적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고, 그것이 자랑이 되면 결국 교회에 분쟁과 다툼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삶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지도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려면, 표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표적, 그 이적이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갈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이나 이적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런 표적이나 이적이 아닙니다. 암을 치료받고, 아주 어려운 문제가 해결받는 그런 표적과 기적이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여러 가지 많은 표적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소경이 눈을 뜨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병이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등 여러 가지 표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어쩌면 수 만명,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이 이적들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러한 표적들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표적을 보면 또 다른 표적을 구했고, 그 표적을 보면 또 다른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끊임없이 지상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적을 본 그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가운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불과 120명에 불과했습니다(행 2:15). 그렇게 많은 사람들, 어쩌면 수만, 수십만의 표적을 직접 보고,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가운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그 때에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120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표적으로부터,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부터 표적에 의존하려는 신앙, 기적에 의존하려는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병낫기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나, 우리의 어려운 문제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바울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까? 독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고 그들이 찬양할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지만,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기적이 그냥 기적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징표로서, 구원의 증거로서 기적을 구하는 것, 그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마음속에 병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면 안되겠구나, 우리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면 안되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늘 하나님앞에서 병낫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징표가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 구원의 징표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혜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다면,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지혜가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철학을 하고, 그 철학에 근거해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삶에 새로운 동기를 갖고자 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9절의 표현을 빌면 그들이 추구한 것은 지혜와 총명, 즉 지식입니다. 철학적인 지식 그것이 참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참 지식을 가지는 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고,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구원의 징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합리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헬라인들, 이방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말은 불합리하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들이 생각하기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은 전혀 그럴 듯하지도 않고,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존중하고, 그들이 그렇게 추구해왔던 플라톤의 철학과 같은 그런 고상한 철학이나 과학적인 지식이 오히려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비합리적지고, 비논리적이고, 고상한 철학이나 과학만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에 가장 많이 만연되어 있는 생각입니다. 특별히 현대과학은 신은 없다고 단정합니다. 창조는 없다고 단정합니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크고 복잡한 우주와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우주를 창조해낸 인격적인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에 보이는 일들을 볼 때 신은 없다고 말합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이렇게 세상을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류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류의 죄를 2000년전 유대땅에 온 한 젊은 유대인의 죽음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고상한 철학과 첨단의 과학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의 가치관이고 2000년전 헬라인의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헬라인들이 지혜를 구하고 총명을 구하지만, 그들이 구하는 그 지혜가 궁극적인 지혜, 참 지혜가 아니고, 그들이 구하는 총명이 참 총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멸망받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멸망받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고 불합리한 것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참 지혜이고 참 총명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내에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사람들가운데 높은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그가 가진 지혜와 그가 가진 지식과, 그가 가진 로마의 시민권과 그 모든 것을 다 똥처럼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자랑함으로 교회내에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가운데 조금 못배우고, 조금 공부못하고, 조금 아는 것이 부족한 것이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자신의 조그만 지식과 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2.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주는데 그것은 표적을 구하는 삶도 아니고 고상한 철학이나 과학을 추구하는 삶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24절에 보면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외에 다른 구원의 능력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당신께서 하신 일이 너무 많으시지만, 사도신경은 단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신앙의 핵심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 특별히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십자가는 아무런 능력이 없고, 무능력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 군병들에 의해 찢기고, 핧키다가, 끝내는 못박히시고, 죽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채찍질 당한 그곳이, 어떻게 죽임을 당한 그곳이 능력의 현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그 채찍질 당한 곳,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하신 곳, 그곳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고, 너희를 만든 나 전능하신 여호와의 능력의 현장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채찍질 당해야 하고, 내가 조롱받아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 그 곳에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채찍질을 당하고,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조롱을 받으시고,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가 능력의 현장이고, 능력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비참한 그 죽음의 현장이 바로 능력의 원천이 되고 능력의 현장이 되는가요? 그것은 그 죽음의 현장, 그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서 바로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순간에,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죽음의 위치에서 예수님이 죽음을 맞으시는 그 순간에 비로소 우리를 위한 영단번의 제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바로 능력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능력입니다. 십자가만이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 됩니다. 그 십자가만을 우리의 자랑으로 삼고 평생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고 지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첨단의 지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플라톤의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나, 동양의 노장사상과 같은 그 고상한 철학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지식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가장 미련하게 보이는 것,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그것이 가장 논리적이고 그것이 가장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는 지, 그가 어디로 가는 지, 그의 존재가 무엇인지, 이 세상의 존재가 어떠한지에 대해 아는 사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 그들이 진정으로 올바른 지혜와 지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이 땅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지혜에 뛰어난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간직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표적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랑은 교회에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증거로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표적이 주어질지라도 십자가외에 그들을 구원할 표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헬라인들은 그들의 지혜를 따라서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 어리석고 미련하고 멸망받을 자라고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교회안에서 자신의 지혜가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분쟁케 하는데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표적, 이런 지혜말고 진정한 표적, 진정한 지혜 그것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진정한 표적, 그 진정한 지혜,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표적이고,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그 십자가가 유일한 자랑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아래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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