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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강한 이유 (대하 1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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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강한 이유 (대하 13:1~12)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당해서 소중한 것들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습니까?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저항>하는 것이요, 하나는 <수용>하는 것입니다. 저항이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하면서, 온 세상을 향해 분노를 품고 좌충우돌하는 것입니다. 수용이란 그 모든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동차 타이어가 오랜 시간을 견디는 까닭을 아십니까? 처음에 타이어 제조업자들은 도로의 충격에 저항하는 타이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타이어는 오래 못 가고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충격을 흡수하는 타이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찢어지지도 않았고, 수 만 킬로를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응용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습니다.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여라. 일단 일어난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더 이상 불행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도록 가로막을 수 있는 첫 걸음이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모아 북 왕국을 만들어 떨어져 나갈 때 분노하여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두 지파 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저항하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수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역대하 11장 1-4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와 베냐민 족속을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에 속한 모든 이스라엘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소중한 것들을 잃으신 적이 있으시지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잃어버린 재산, 실추된 명예....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아직도 그 끈을 놓지 못해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분은 없습니까? 어렵겠지만, 엎질러진 물을 담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인생을 아예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보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그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단지 이대로 끝은 아니라고 외칠 수 있다면, 희망을 불꽃을 피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회복될 것입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유대인 랍비가 아들과 함께 수용소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날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 한 구석으로 갔습니다. 그리곤 어렵게 구한 버터 한 조각을 주발에 넣고 거기에 심지를 꽂은 뒤 불을 붙였습니다. 초를 구할 수 없어 버터에 불을 켠 것입니다. 

그리곤 말했습니다. <얘야,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을 살 수 있고, 물 없이도 3일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단다. 희망은 어둠을 밝히는 이 불과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희망의 불이시다. 이 불이 네 속에서 꺼지지 않게 해라> 아들은 이 말을 마음에 새겼고, 아버지는 죽었으나, 끝까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길 기원합니다.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온 르호보암이 했던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열 지파를 잃은 그 상실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다시 나라가 강성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기를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희망의 불꽃을 피웠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르호보암 왕과 남 왕국 백성들이 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하나는 성읍들을 쌓아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11장 5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유다 땅에 방비하는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니, 곧 베들레헴과 에담과 드고아와 벧술과 소고와 아둘람과 가드와 마레사와 십과 아도라임과 라기스와 아세가와 소라와 아얄론과 헤브론이니 다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어 견고한 성읍들이라> 그들은 잃어버린 열 지파 때문에 계속 울분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힘들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성읍을 쌓았습니다. 그게 다시 찾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재물을 잃으셨나요? 다시 일터로 나가십시오. 명예를 잃으셨나요? 다시 성실한 삶을 통해 명예를 회복해 나가십시오. 사랑하는 이들을 잃으셨나요? 다시 사랑할 사람을 만나십시오. 칼빈 선생님은 아들이 죽은 후, 온 세상에 내 아들들이 많다고 하면서 믿음의 아들들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둘째로 르호보암과 남 왕국 백성들이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더욱 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남 왕국 사람들은 북 왕국 보다 자신들이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은 북 왕국이 가지지 못한 것 두 가지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분입니다. 알아보니 북 왕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긴다고 했습니다. <북 왕국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섬긴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이 갖지 못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걸리라> 

북 왕국에는 없고 남 왕국에만 있는 또 한 가지는 성전이었습니다. 비록 북 왕국이 영토가 넓고 백성이 많지만, 북 왕국은 성전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남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 왕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성전을 성전답게 만들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이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더 정성껏 제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이 필요했고, 돕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보면,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의 후손들이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또 흠이 없는 정결한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남 왕국은 이 말씀을 따라 철저히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일을 꾸준히 계속했습니다. 이는 르호보암이 죽을 때까지 십 칠 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르호보함이 죽었고, 그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아비야도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애를 썼고, 정성껏 제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비아냥거리면서 불평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힘이 약한데, 성전에서 제사나 열심히 드리면 뭐가 되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비결이라고 믿었습니다. 묵묵히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북 왕국과 남 왕국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에서 남 왕국이 승리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그들이 오직 여호와만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약한 그들이 강한 적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약한 남 왕국이 강한 북 왕국을 이길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철저한 예배자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성전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겼던 일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아비야 왕은 스마라임 산지에서 만난 북 왕국의 군사들을 향해 자신들이 지난 세월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려고 노력했는가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왔다>, 이것이 그들의 무기였습니다. 

그 내용을 하나씩 확인해 봅시다. 8절을 보십시오. 북 왕국이 금송아지를 섬긴 것을 비판합니다.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너희는 금송아지를 섬기지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또 9절에서는 제사장 문제를 언급합니다.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 이게 북 왕국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은 다릅니다. 그 다음 10절을 보시면,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들이 수종 들어>라고 합니다. 남 왕국은 자격 있는 사람들만 세웠습니다. 

또 11절을 보면 날마다 제사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잔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결국 아비야 왕이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철저히 하나님을 섬겨 예배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너희에게 없는 성전이 우리에게 있고, 너희에게 없는 거룩한 제사장이 있고, 너희가 하지 않는 제사를 우리는 하나님께 드린다>, 이게 아비야 왕이 당당하게 외친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북 왕국 군사들은 아무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모두가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그 전쟁에서 하나님이 남 왕국을 도우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거룩한 제사장들을 세워 하나님께 제사하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도우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성전에 나와 제사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이 간단한 영적 원리, 축복의 원리를 배우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예배자를 축복하십니다. 강하게 만드십니다. 아름다운 예배자가 되십시오. 이를 통해 승리하십시오. 그러려면 두 가지를 잘 해야 합니다. 

첫째는 좋은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어찌 생각하면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제사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있어야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자신을 위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자격을 갖춘 제사장이 되십시오. 거룩하고 정결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둘째는 예배에 목숨을 걸고 정성껏 드리십시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우선 예배 참석을 잘 하셔야 합니다. 모든 예배에 참석하십시오. 주일 낮 예배, 오후예배, 수요예배에 꼭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새벽기도회에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 교회가 멀다면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회에라도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금요기도회, 구역예배에 참석하십시오. 신앙은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만큼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서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사모함으로 정성을 다하십시오.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목사님 한 분을 잘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부흥과 열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한 주일에 열 번 이상 예배하는 데 대해 감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한국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돌아가면서 그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일주일동안 여러 교회를 돌아보며 새벽예배, 수요예배, 철야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습하는 예배는 보았어도 진정한 예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예배는 연습이 아닙니다.> 

그 목사님이 목회하는 미국교회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의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예배를 위해 온 성도들이 엄청난 준비와 기도와 헌신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찬양을 한번하기 위해 6개월 동안 기도와 연습을 하고, 주일 전날 교우들은 집에 있는 청소 도구를 가져와 성전을 온 종일 청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음향 장치 등을 모두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정성 없이 예배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예배하기 위한 준비부터 철저히 하십시오. 토요일은 우리에게 주말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날입니다. 가족들이 입을 옷, 드릴 헌금, 성경 찬송 등을 잘 준비해 놓으십시오. 

그리고 주일 아침 늦지 않도록 일찍 서두르십시오. 헐레벌떡 뛰어들어오지 않게 하십시오. 지각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람을 만나러 가도 지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겠습니까?

예배당 안에 들어오면 조용히 기도로 준비하십시오. 예배 전에 올겐 연주를 합니다. 그 시간은 잡담 시간이 아닙니다. 주실 은혜를 사모하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찾아 본문을 미리 읽어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예배 순서에 정성껏 참여하십시오. 지난 6월에 중국에 갔을 때 홍광교회 손영남 목사님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손 목사님이 청년들과 함께 중국 남쪽까지 순회하면서 약 두 달 동안 곳곳에 집회를 인도했다고 합니다. 작년에 갔을 때 어느 교회에 가보니, 예배 중에 사람들이 자꾸 드나들더라는 것입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예배당 뒤편에서 차를 마시고 다시 들어온다는 겁니다. 

목마르면 나가서 녹차 한 잔 마시고 들어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설교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그런 예배는 집어치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성껏 예배해야 성령께서 역사하신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작년에 그 교회 교인이 6백 여명 되었는데, 올해 일 년 만에 다시 가보니, 얼마나 부흥했는지 무려 2천 여명이 모인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자 모든 것이 부흥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정성스런 예배에 은혜를 주십니다. 예배 잘 드릴 때 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토미 테니>의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란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책 제목 그대로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분은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간절하게 굶주려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로 삶을 가득 채우고 굶주림을 충족시킨다. 우리는 매주, 매달, 매년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하나님으로 우리 빈곳을 채우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 임재의 빵 부스러기를 조금만 얻어먹어도 만족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빵 부스러기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전체로 모셔들이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 굶주린 사람들, 그 분이 어찌 이들을 외면하시겠는가?> 여러분, 하나님께 굶주린, 사모하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교회의 수준은 예배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가 경건하고도 은혜로운 예배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어려울수록 더욱 예배 참석에 힘쓰십시오. 어려워도 예배에 빠지면 안 됩니다. 누가 뭐래도, 아무리 힘들어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결코 축복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한국 교인들이 얼마나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지를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남편이 승진 명단에서 빠졌다고 시험 들어 교회를 등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방 중 자신의 집에서 기도할 때 "주우...시옵소서"라고 길고 크게 기도해주지 않아서 시험 든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 끝나고 인사 나눌 때 시선을 주지 않았다고 시험 든 사람도 있고, 악수할 때 손을 꽉 잡아주지 않았다고 삐낀 사람도 있습니다. 비 오는 날 교회에서 우산 잃어버리고 화가 나서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식사 후 요구르트를 자기만 못 먹었다고 시험 든 사람도 있습니다. 주일 날 여동생이 결혼하는데, 교인들이 오지 않았다고 시험 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차장 안내 요원이 불친절하다고 예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예배도, 교회도, 하나님도 등진다면 어찌 축복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시편 20편 1-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힘들수록 성소에 나와 눈물의 제물을 드리십시오. 더 꾸준히 나오십시오. 시험 거리가 생길수록 더 간절히 예배하십시오. 

어찌 보면 어려운 여건에서 예배에나 열중하는 모습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우직한 어리석음이 승리를 안겨줍니다. 남 왕국이 우직하게 남들이 뭐라 하든 하나님께 정성껏 제사를 드렸더니 승리한 것처럼, 여러분 끝까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애국의 길도 같습니다. 어제가 광복절이었는데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애국의 방법은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우직한 예배생활이 조국을 건질 줄 믿습니다. 

오를 때는 몰랐는데 / 내려와 올려다보면 / 퍽도 높은 산을 내가 넘었구나 

건널 때는 몰랐는데 / 되 건너와 다시 보면 / 퍽도 긴 강을 건넜구나 

이제는 편히 쉬고만 싶어 / 다시는 / 떠나지 않으렸더니 

아아, 당신 

그래도 / 움직이는 산 / 굽이치는 강 

나를 부르는 / 당신 

이해인 님의 <나를 부르는 당신>이란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하나님을 향해 경건한 예배자로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손안에서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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