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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너희는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대하 1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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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대하 15:1~19)


'해방둥이'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던 1945년에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그 당사자들은 알 길이 없었겠지만, 자기 아들딸이 조국의 해방과 함께 태어나게 되는 것을 본 그 부모들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로 해방 전의 세대와 해방 후의 세대는 같은 땅, 같은 나라에 태어났지만 그 사는 환경은 극과 극이라 할 만큼 다른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휴전둥이'라는 말은 쓰지 않지만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던 1953년 7월 27일 이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와 동족상잔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었던 '6.25 세대' 사이의 차이점 역시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어려운 시대에 살았던 사람에 비해서 태평성세의 시기에만 살게 된 사람은 아무래도 '약골'이 되기 쉽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절로 인내를 배우면서 연단이 될 수밖에 없지만 온실 같은 환경에서만 자란 사람은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그처럼 국난의 시기에 살아 보았던 세대만 체험적으로 알 수 있지 그저 평화시대만을 즐겨 왔던 신세대에게는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위험, 남조 유다가 이제 막 전쟁을 끝내고 평화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을 바로 그 시점에 더욱 정신을 차리고 극히 조심해야 할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는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제 '8.15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해방 이후 이미 64년이 흘러갔고 휴전협정 이후만으로도 벌써 56년이 되는 지금, 점점 더 국난의 시대를 기억할 줄 모르고 전쟁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세대로 흘러가고 있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하여 이 평화시대에 우리의 '손이 약하여지지 않도록'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강하게 연단시키는 길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평화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써 늘 깨어 있는 긴장의 연속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절로 7절에 기록하기를 "1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2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3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4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5그 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6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7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기 "아사랴"라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아사 왕과 유다 백성들을 "나가서 맞이"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앞의 14장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남조 유다가 구스 사람 세라와의 전쟁을 이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선지자 아사랴가 나가서 그들을 환영했다는 뜻입니다.
  
2절 이하에 이어지는 선지자 아사랴의 말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선포된 것인데, 그 첫 일성은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는 경고였습니다. 

사실 유다 백성들은 바로 조금 전의 전쟁에서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와 함께 하는' 신앙을 유감없이 발휘했었습니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군과의 전쟁에 임할 때 그들은 "주밖에 우리를 도와 줄 이가 없습니다."라는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대하 14:11).
  
바로 그처럼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함으로써 이제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 유다 백성을 향하여 선지자 아사랴가 새삼스럽게 '너희가 여호와를 찾고 돌아와야만 한다.'라고, 일견 그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을 외쳤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전쟁 때, 즉 급할 때만 여호와를 찾지 말고, 지금 평안해졌다고 생각되는 바로 이때에 더욱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 신앙생활을 강화해야 할 때라고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저 위기가 닥칠 때만 하나님을 찾다가 평안해지면 곧 하나님 잊어버리고 마는 행위를 반복하면, 그런 신앙생활이란 강하게 성장하기커녕 정반대로 점점 더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3절 이하에서 아사랴 선지자가 옛날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 때에 반복하여 저질렀던 일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사 시대 때의 이스라엘은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이 없고 율법이 없은 지 오래된" 영적 암흑기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어 주셨습니다.
  
즉 급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즉시 그들을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환난 때"가 지나가기만 하면 곧 하나님을 잊고 예전 생활도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 시대는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나라와 나라가 성읍과 성읍이 서로 치는 전쟁에 피차 상한 바 되는", "고난으로 요란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고 선지자 아사랴는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 옛날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말고, 이제 전쟁에서 이기고 평안이 시작되려 하는 바로 이때야말로 더욱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 섬기는 손에 힘을 더해야 할 때라고 일깨워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평화시대에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만 말하는 것은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공통된 생리입니다.
이런 자들은 환난이 닥치면 같이 비명소리만 낼 뿐입니다.
반면에 평안할 때에도 오히려 각성 촉구와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참된 선지자의 자세이며, 그런 선지자일수록 환난 중에도 오히려 소망을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깨어 있는 성도는 바로 그처럼 평화시대에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고 긴장시켜 주는 선지자의 소리를 들을 줄 압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환난이 닥쳐오고 전쟁에 휩쓸리게 될 때만 부랴부랴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급한 불끄기' 식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금세 식을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새로운 환난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쇠도 빨리 달구었다가 급하게 식히기만을 반복하면 깨지기 쉬운 철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역시 평소부터 은근하면서도 꾸준하게 연단시켜야 어떤 시험에도 깨지지 않도록 질기면서도 단단하게 성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일 없고 별 환난이나 시험이 없을 때, 그래서 하나님도 별로 열심히 찾고 싶어지는 않는 평화시대일수록, 우리의 '손이 약하여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깨워 주고 우리의 삶에 긴장감을 더하여 주는 선지자의 경고를 더욱 청종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평화시대야말로 최고의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호기(好機)인 줄 알아야 합니다. 

8절로 15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8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9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10아사 왕 십오년 삼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11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12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13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14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15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선지자 오뎃"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사랴 선지자가 '오뎃의 아들'인 것을 생략해서 부른 것입니다.
아사는 그 아사랴 선지자의 말씀을 듣자마자 "마음을 강하게 하는" 즉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신앙 강화 운동에 즉시 돌입했습니다.
  
그는 먼저 "가증한 물건" 즉 우상과 우상 숭배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씨를 말리다시피 제거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호와의 단을 중수"했는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전 보수 공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유다에 속한 지파 사람들 뿐 아니라, 북조 이스라엘에서 남조 유다로 신앙의 정통을 찾아서 내려왔던 사람들까지 다 함께 모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많은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는 바로 그날 구스 사람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하나님께 감사제를 함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아사 왕은 온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게" 했습니다.
즉 온 백성들과 함께 헌신의 서약을 재삼 다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맹세를 어기는 자는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하면서 온 백성이 함께 "여호와께 맹세"했을 때, 온 유다가 그 맹세를 "기뻐"했으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셨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길 것 즉 '최고의 헌신'으로써 섬기겠다는 맹세를 함께 했습니다.
이런 맹세는 사실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이고 일반적으로 거부감이 앞서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은 좋지만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믿고 따르겠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사 왕과 유다 백성들이 그런 서원을 함께 맹세했을 때에는 그 회중에 큰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인들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체험할 수 있는 '신비'에 속합니다.
하나님을 '대강' 믿고 '적당히' 따르겠다고 하면 사실 거기에는 아무 감격이나 기쁨이 따를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 거하는 불법체류자가 '그저 주민등록증이나 받아서 좀 편하게 살자.'는 일념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때에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한 서약을 할 때에도 별 감동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내 나라를 위하여 이 한 몸 바쳐 충성하겠다.'고 진심으로 서약할 때에는 거기에는 그런 충성심이 넘치는 진짜 군인들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전율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바로 이런 체험적인 '헌신의 감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저 간신히 주일예배나 출석하는 것으로 끝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이렇게 평화시대를 살게 해 주셨으니 정말 목숨 대신에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뜨거운 헌신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만난 바 되어 주시는' 과정입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전쟁 통에 어떻게 이웃집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겠습니까?
아무리 냉대와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이런 평화시대야말로 가가호호 방문전도할 수 있는 호기(好機)가 아니겠습니까?
  
세계적인 대 경제공황을 맞이하게 되면 진짜로 선교사를 파송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좀 불경기라고는 하지만 과거의 우리 조상 시대 때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훨씬 더 잘 살고 있는 이때야말로 '보내는 자'의 사명에 죽도록 헌신해야 할 적기(適期)인 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태평가를 부르면서 놀라고 주어진 때가 결코 아니라, 이때야말로 자신의 '최고의 것, 전부의 것'을 다 바쳐서 헌신해야 마땅한,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될 최고의 기회인 것을 꼭 깨닫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평화시대일지라도 개인적 신앙 전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영적 전시(戰時)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6절로 19절에 기록하기를 "16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17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18저가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19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아사 왕은 대대적으로 그런 국가적인 우상 제거 작업을 진행하던 중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에 봉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대표적인 우상숭배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사 왕은 분명히 인간적으로 참 괴로웠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 아닌 자기의 친어머니가 바로 우상숭배의 대표자요 주도자가 되어 있었으니, 그 난감한 입장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끝내 바른 선택과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자기 어머니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녀가 만들었던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 역시 완전히 가루를 내고 불살라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본문 17절에서는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기록이 있지만, 앞서 14장 3절에서는 아사 왕이 "산당을 없이 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산당'이란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마다 곳곳에 세워져 있던 우상숭배의 처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마 아사 왕이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가까운 지역의 산당들은 다 제거했지만 지방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산당들까지는 완전하게 제거하지 못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엄격하게 따져 볼 때에는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산당들을 깨끗이 없애버렸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본문에서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만 보아서도 분명합니다.
즉 아사 왕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신도 그 앞에 두지 않았으며 우상 타파를 위해서는 자기 어머니까지도 폐위시킬 정도로 충성된 자세를 보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었다 할지라도 교회적으로는 여전히 우상종교와 이단기독교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이후의 장로교는 바로 그런 전쟁을 해야 한다는 쪽과 '이제 다 끝난 일인데 뭐 그리 예민하게 나오느냐?'라고 적당히 무마하려는 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에 참여한 목사들에 대한 회개와 자숙의 요구는 묵살을 당하고 반면에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교수들이 가르치는 신학교가 총회 직영신학교로 정식 인준이 되었습니다.
일제 때에는 '적군'과 싸우느라고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그처럼 평화시대를 맞이했으면서도 장로교의 다수 목사들은 교회 내에 있는 '우상을 불사르고 산당을 제거하는' 일을 어물쩍 넘기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 나라의 '사방에 평안을 주시는' 대신에 '6.25 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매를 드신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을 때에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각 신자의 개인적인 영전(靈戰)에는 결코 휴전이나 종전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일장기를 달게 하던 일제의 핍박은 우리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식을 욕하는 부모형제나 교회에 다니는 아내를 핍박하는 남편과 시어머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비록 '태후의 위를 폐하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이 '영적 집안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임을 고백하면 즉시 총을 난사하던 공산군들은 저와 대부분의 여러분들에게는 오직 교회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과거의 일입니다.
하지만 주일 지키기 위해서 숙직 날짜를 바꾸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조차 무슨 큰 직무태만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직장의 상사들은 여전히 이 사회 천지에 깔려 있습니다.
  
엿새 동안 계속 벌어지고 있는 그 전쟁은 목사도, 전도사도, 교우 한 명의 지원도 없는, 그저 여러분 혼자 알아서 싸워야만 할 '영적 각개전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신자 사원들은 그처럼 이 나라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산당'의 세력을 대항하여 그 마음을 '일평생 온전히' 지키면서 끝까지 싸워 승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평화시대에 그 정도의 국지전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면 정말 '크고도 어려운 싸움'이 닥쳐올 때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과거 우리의 신앙 선조들처럼 끝까지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처럼 '반시 동안의 고요함'을 주셨을 때에 더욱 '믿음의 방패'를 굳게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으로 갖추어진 완전무장을 한시도 벗어 놓지 않고 각자의 영적 전투에서 끝까지 이김으로써, 이 전투하는 지상교회에 반드시 닥쳐올 미래의 큰 싸움에서 그 숙달된 용맹과 힘을 멋지게 발휘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매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보시면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평화시대를 값있게 사용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평화시대에 그냥 놀고먹는 자들에게 어떤 '상급'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평화시대라고 해서 긴장의 끈을 완전히 풀어놓고 있는 자에게 그 '평안'이 계속될 리가 없으며 결국 '다시 전쟁'이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사방에 평안을 주고 계시는' 바로 이때에 더욱 '영적으로 긴장하고, 선한 사업에 죽도록 헌신 충성하며, 각자의 영전에서 필승지세를 이어감으로써' 이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영화 '라이언 이등병 구하기'에 보면, 그 제임스 라이언 이등병(Private James Ryan)을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끝내 죽게 되는 밀러 대위(Captain Miller)가 마지막으로 하는 아주 감동적인 대사가 나옵니다.
  
바로 "James... earn this. Earn it."이라는 말입니다.
이 'earn'이라는 말은 '벌다, 획득하다, 받을 만하다' 등의 뜻의 단어이지만 이 문맥에서 이 단어를 우리나라말 한 마디로 직역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잘 써 먹어라'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여튼 이 밀러 대위가 라이언 이등병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와 자기 부하 6명이 목숨을 대신 바쳐서 그에게 준 생명의 선물을 가치 있게 잘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는, 이제 나이 든 할아버지가 된 제임스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묘비 앞에 서서 자기 아내에게 '자기가 과연 가치 있는 삶을 살아 왔는지,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즉 과연 '자기가 그 일곱 명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만한 인생을 살아 왔는지를' 물어 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와 6.25 전쟁을 통과하면서도 오늘날과 같은 이 평화시대를 우리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이처럼 자유로운 공기와 풍요한 땅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해 주기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평화시대를 '잘 써 먹고' 있습니까?
이 순교자들의 희생이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우리 생명의 값어치를 하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일제의 압제나 공산군의 위협이 전혀 없이 이 완전 민주화 된 주권국가에 살게 되었으며 구한말 아니 건국초기까지 이어졌던 그 찌든 가난을 조금도 겪지 아니하고 이처럼 세계 경제순위 10위권을 바라보는 부요한 사회에서 살게 된 '값'을 정말 얼마만큼 해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이지 이 반만년에 걸친 한민족의 역사 중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시대를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온갖 불만족스러운 것들을 찾아내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보내고 있는 하루하루의 날들이야말로 사실은 '복에 겨워 넘치고 있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절정에 달한 평화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평만 가득하고 그저 허송세월로만 낭비하는 가운데 점점 더 '영적 약골'이 되어 간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요 말이 안 될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시기입니다.
이처럼 '전쟁이 끝나고 사방이 평안한' 때야말로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완벽한 시대입니다.
  
국가적인, 대외적인 큰 박해가 없는 이 '반시 동안 고요한 때'야말로 우리가 집안에서, 학교에서, 직장과 사업처에서 마귀와의 1대1 전투에서 가볍게 승리하면서 용사로서의 실력을 키워나가야만 할 최상의 기회인 것입니다.
아무 일 없다고 놀기만 하다가 '우리의 손이 약해지지 아니하도록' 늘 말씀의 경고를 통하여 영적 정신무장을 갖추고, 이 좋은 시절에 주시는 진짜 '상급'을 받으면서 '사방에 평안을 주시는' 축복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순교하는 대신에 '선한 사업'에 충성을 다하며 각자의 '선한 싸움'에서도 순교의 각오로 싸워 이김으로써, 진정 '평화시대를 사는 값을 제대로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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