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원, 그 이후 (갈 3:2~7)

  • 잡초 잡초
  • 323
  • 0

첨부 1


구원, 그 이후 (갈 3:2~7)

 
프랑스의 극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소재로 잡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초점은 탕자가 돌아온 그 다음날에 맞추고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온 날에는 잔치를 열었지만 그 다음날에는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날에도 잔치를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탕자는 이제부터는 형님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될 것이다, 감동 ․ 은혜 이건 전날 다 겪었지만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불가피하게 율법적인 요소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첫날에는 잔치를 열어 주었지만 다음날도 잔치를 열어줄 수가 없는 것이고 이제는 탕자가 자기 아버지 집의 분위기에 다시 적응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권위 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탕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님의 눈치를 봐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율법적이 요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혜만을 놀라워 할 수 있겠습니까.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죄인이 의인답게 살고 정신을 차려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작은 잔치였지만 그 다음부터는 노동, 눈치 그리고 고역의 연속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기독교에도 이러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뭘 가르쳤느냐면 일단 사람이 한번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죄를 한두 개밖에는 짓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세례 받는 것을 최대한으로 늦췄습니다. 죽기 전까지 세례를 안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한번 받은 다음에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니까 당연히 세례를 늦출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탕자가 돌아온 것에 대하여 그 형이 비판했지만 굳이 남의 비판을 말할 필요 없이 남이 나를 비판하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내가 나를 비판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말로 힘든 것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나의 최대 야당은 내 자신이에요. 내 안에 나의 최대의 야당이 있습니다. 

내 안에 비판자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비판자의 목소리를 견디기가 제일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지요. 그래놓고도 너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느냐, 그래놓고서 네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부질없는 짓이다, 소용없는 짓이다, 너는 여전히 죄인이다, 이런 음성이 들려올 때가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살던 집에 가보면 지금도 벽에 잉크병이 깨진 자국이 있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가 방에 홀로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나서 그를 정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그에게 잉크병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 자국이 지금까지 있다고 하는데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때는 잉크병을 던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던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 웨슬리의 회심 기록이 있고 마틴 루터의 회심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저는 그들의 회심 이야기가 첫 번째 회심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회심 이후의 회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도 이미 그리스도인이었고 요한 웨슬리도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적어도 마틴 루터가 씨름했던 문제는 죄인으로서의 죄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죄의 문제였을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씨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그만큼 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회심의 경험은 불신자가 믿는 자가 되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이미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은혜를 깨닫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회심 이후의 회심이에요. 용서 이후의 용서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만 회심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믿고 있는 사람도 다시 회심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는 다 똑같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의 죄가 따로 있고 믿는 사람의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죄는 다 죄일 뿐입니다. 불신자의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다면 이미 믿는 사람의 죄도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엄청난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의 불신을 용서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패도 용서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 말은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 없지요. 처음에도 은혜로 시작하고 도중에도 은혜로 살고 끝까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도 은혜로 시작하는 것이고 도중에도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끝까지 은혜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도중에 율법으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걸 의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과 행실과 행함을 강조하다보니까 처음에 불신자를 믿음으로 초청했을 때는 주님의 은혜만을 가르치지만 이미 믿는 사람을 양육하는 과정에서는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행함 ․ 의무 또 책임 ․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잘못 ․ 책망 ․ 죄의식 ․ 정죄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불신자로 돌아올 때가 좋았는데 그때는 적어도 잔치라도 열어주었는데 이제 잔치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형님과 같이 힘들게 일만 하면서 서로를 탓하고 내 자신을 탓하는 그런 율법적인 삶에 들어오는 우리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남들이 나를 정죄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내 자신이 나의 허물 ․ 나의 부족함 ․ 나의 변화가 더딘 모습에 대해서 낙심하고 또 자책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에 대해서 실망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실망이다.’라든가 아니면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줄로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인데 그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바른 생각입니다. 당연합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남들과 달라야지요. 다르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다름의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변했다는 증거 중의 하나가 우리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변화했다는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 믿기 이전에는 우리 자신이 모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벌써 우리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변화를 수평적으로 찾으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면서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려고 하면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여러분 이런 얘기를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아무개는 교회는 안다니고 예수님은 안 믿지만 법이 없어도 살 분입니다. 

그 분은 남을 괴롭게 한 일도 없고 정직하고 돈도 잘 벌고 아주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아무개는 어떻고 …’ 그런데 수평적으로 비교하면 그리스도인이 얼마만큼 다른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하면 안되고 수직적으로 비교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 믿기 전과 이후를 비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진지하게 따르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현저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게 변화에요. 그게 더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과 후, 거기에서 우리가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실의 변화가 있기 전에 그의 생각의 변화 ․ 그의 목적의 변화 ․ 그의 가치관의 변화 여기에서 모든 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아무리 변화했더라도 변화했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 믿고 착해지고 의로워졌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게 차이점입니다. 내가 달라졌기 때문에 천국백성 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백성은 이미 되었고 그 결과로써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라지는 것 때문에 천국 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건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에요. 그건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달라졌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공로에 의한 것이고 행함에 의한 것이고 사람에 의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이 변하고 우리가 착해지고 의로워졌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천국백성이 된 결과입니다. 그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번째로 우리가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변화가 우리를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의를 취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로마서 말씀에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그 말은 인간의 율법적인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율법적인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고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그 의, 그게 복음이에요.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모두가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그리고 부끄러워해야 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주눅이 든다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힌다거나 위축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마귀의 시험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주눅이 든다든가 죄의식에 사로잡힌다든가 위축되는 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저는 그런 교인들을 많이 봐요. ‘목사님, 저는 믿음도 부족하고 성경도 잘 모르고 나일론 신자에요.’ 아마 이런 말씀을 하시는 성도님들은 저에게 이런 대답을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사님, 믿음을 좀 키우시고 성경을 좀 공부하시고 나일론이 아니고 케블라-방탄조끼를 만드는 소재-가 되십시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세요. 도대체 믿음이 얼마나 있어야 ‘나는 믿음이 많고요.’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성경을 도대체 얼마나 알아야 ‘저는 성경을 좀 알거든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소신이 있어야 ‘나는 나일론이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오히려 나는 믿음이 있고 나는 성경을 잘 알고 나는 강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위험합니다. 그에게는 ‘바’씨 냄새가 납니다. 바리새인 냄새. 그게 사실은 더 위험한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좋다, 나는 성경을 많이 안다, 나는 의롭다, 바리새인들이 그랬거든요.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는 저 죄인과 같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구석에서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고 집으로 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위험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하여 회의를 갖는 것입니다. 해봤더니 안되더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애썼는데 안되더라 하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왜 기독교를 탓합니까.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왜 하나님을 탓하고 교회를 탓하고 왜 신앙을 탓합니까. 그건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너무 기준을 높이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의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진짜 의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는데 당연히 내 자신에게 실망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위험, 첫 번째 위험을 해결하고 나면 두 번째 위험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 그건 남들에 대한 실망 때문에 기독교에 회의를 갖는 것입니다. 이게 소위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것도 사람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채울 수 없는 기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인데 왜 그것을 사람에게 요구합니까.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나든 남이든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요 믿음으로 받는 것뿐입니다. 남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고 내 자신을 바라보면 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구나!’ 이 사실을 알면 ‘저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주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은혜가 오는 것이고 주님이 주시는 것이고 주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님 것인데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믿음이고 이게 진짜 믿음의 컨텐트입니다. 진짜 믿음의 내용이 이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강요하고 강요해도 그런 능력이 안 나타나는데 ‘나를 의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하고 나에게 기대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면 오히려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고 세상이 조금씩 변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