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 (대하 1:7~13)

  • 잡초 잡초
  • 737
  • 0

첨부 1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 (대하 1:7~13)


“당신의 인생! 이렇게 바꿔 드립니다.” 이것은 로또복권 포스터에 쓰인 광고 문구다. 로또에 당첨되면,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 있음을 강조하는 포스터다. 그러나 돈만 많이 생기면, 인생이 역전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진짜 인생역전의 길이 있다. 

그 길은 로또가 아니라, 예배에 목숨을 거는 길이다. 왜 예배가 인생역전의 길인가? 예배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수백억 원의 돈을 거머쥔다고, 인생이 역전되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인생이 역전될 수 있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 그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솔로몬이 감당할 수 없는, 지혜와 축복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축복하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과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신다. 

이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배하는 사람이, 가장 축복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문제와, 심령의 공허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예배로부터 그 실마리를 풀어나가기 바란다. 예배가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린다. 

사울은 성도들을 잡으러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한 번의 체험 때문에, 성도들을 핍박하던 자리에서, 주님을 전하는 자로, 180도 바뀌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안에는, 이러한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하고 강력한데, 예배를 등한시하고, 소홀히 하는 개인이, 어떻게 인생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영적으로 강력한 성도는, 알고 보면 강력한 예배자이다. 예배가 살면, 생명이 살아나고, 예배가 약해지면, 영적으로도 약해지고,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 

음악회에는 자리 위치에 따라 S석, A석, B석, C석이 있다. 사람들은 주머니 사정만 허락한다면,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S석에 앉기를 바란다. 앞좌석에 앉을수록 공연의 감동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배에 감동을 받기 원한다면, 앞자리 곧 S석에 앉으려고 애써야 한다. 

예수님은 (마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충해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전폭을 드려야 할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예배에도,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예배자 솔로몬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자신의 전폭을 드렸다. 천 마리 제물을 번제로 드렸다. 자신의 모든 정성,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예배처소를 짓는 일에도, 최고의 것, 최상의 것을 드리며 헌신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는 어떤 것인가? 

1. 하나님을 감동시키시는 예배는, 제물의 피 흘림이 있다. 

자신의 죄를 대속제물의 피로 속죄하는 예배였다. 솔로몬의 번제는 신약 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는 예배’다. 정성만 많이 드리는 예배에 그치지 않고,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예배였다. 

예배의 중심이 누구인가? 예배를 통해 누가 드러나야 하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어떻게 죄인 된 우리가 감히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할 수 있는가를 생가해보면 그 답이 분명해 진다. 보혈의 능력, 곧 예수님의 피, 십자가의 의를, 우리가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가려진 우리를 보시고 받아주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우리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성이나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우리 예배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요소라면, 예배 또한 우리의 공로가 될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예배에는 해당될 수 없다. 우리의 정성에 따라, 예배의 성패가 결정된다면 우리는 언제나, 실패한 예배만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예배를 받으시는가? 예수님의 피의 제물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구약에서 양과 염소와 황소의 피로서 죄를 씻은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물이 필요하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린 양의 피가 필요하다.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예배가 되지 않는다. 프로그램이 좋고, 설교가 좋고, 찬양이 좋다고, 예배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도 예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그 제사는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피의 제사였기 때문이다. 예배는 이토록 처절한,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희생의 가치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귀한 예배를 하찮게 드릴 수 있겠는가? 어떻게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아무런 준비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우리의 예배는 어떤가? 찌꺼기 시간, 찌꺼기 헌금, 찌꺼기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는 않는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연극배우를 예로 들면서,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정의하였다. 그에 따르면 예배자는 배우와 유사한 점이 많다. 

(1) 먼저 배우는 늦지 않는다. 배우가 늦는 연극은 없다. 배우가 늦으면 연극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예배에 늦으면, 이미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처럼 보는 입장이 된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늦은 사람은, 이제부터 나는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예배를 보는 자라고 해야 한다. 

(2) 배우는 연극이 끝나기 전에는 집에 돌아기지 않는다. 배우가 일찍 가버리면, 연극이 될 수 없다. 배우가 연극이 다 끝낸 후에야, 숙소로 돌아가듯이, 성도는 목사님의 축도가 완전히 다 끝난 후에야 집에 돌아간다. 말씀만 듣고 가는 자는, 예배를 제대로 드린 자가 아니다. 

(3) 배우는 졸지 않는다. 배우가 졸면, 연극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배시간에 졸면서 예배한다고 말할 수 없다. 초대교회 시절,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쿰란 공동체에서는,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에게는, 한 달 간 예배 출석 금지령을 내리는 규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4) 배우는 연극내용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배우는 대사를 암기한다. 그리고 연극의 흐름을 분명히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 때 말씀을 제대로 듣고, 집에 돌아가서도 설교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면, 예배를 본 사람이다. 

그가 이 비유에서 강조한 점은, 예배를 드릴 때, 관객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배의 관객이 아니요, 배우이므로, 우리가 예배를 한다고 말해야 하지, 예배를 본다는 말은, 옳지 않다. 참된 예배란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만 예배를 보셔야 한다. 

2. 하나님을 감동시키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예배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감동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구약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사가 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제사가 번제다. 

번제는 레위기 1장에 잘 나타난다. 번제는 제물을 죽여서, 각을 떠서 통째로 태워드리는 제사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번제는, 양 일천 마리를 모두 태워드린 제사였다. 이 번제는 여호와께 대한, 완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인간의 손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다. 

번제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한다. 아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가장 좋은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 있는’(worth)이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말이 합해져 만들어진 단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신분에 맞는, 최선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번제는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드리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만 한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구약에서는 그 가치를 제물로 표현했다. 구약시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제사의 의미에 합당한 제물이 있어야 했다. 

그 제물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였다. 어떤 제물을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방법은, 제사 드리는 사람의 재산이나, 신분에 따라 결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양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으셨다. 자신의 신분에 맞게 드렸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넘치는 복을 받았다. 예배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예배는 단순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말씀을 듣는 의식이 아니라, 나의 전 생애를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감동을 받으시는 분이다. 감동을 받으시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복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헌신을 하면서, 예배하는 사람에게 감동을 받으신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값없이 예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이처럼 솔로몬의 번제에는, 온전한 희생이 있다. 

번제의 희생은 사랑이다. 우리가 희생하는 만큼,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사랑과 희생이 있는 번제에 감동하셨다. 우리는 정성이 있을 때, 감동된다. 감동을 받으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차가운 가슴이 녹아내린다. 감동시킨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감동하셨다. 독자도 아끼지 않는, 그의 사랑에 감동하셨다. (창22:12)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감동을 받으시고, 복을 베풀어 주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은 감동 중에 큰 복을 베풀어 주신다. (16-18)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감동하셨는가?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바쳤기에 감동하셨다. 

하나님이 감동하신 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큰 복이었다. 아브라함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 복을 주셨다.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는 복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의 영향력이, 우리의 가족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 국가에, 그리고 천하 만민에게 미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후손들에게 계속 흘러 내려간다. 다윗에게 흘러 내려가고, 이제 솔로몬에게 이르렀다. 솔로몬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넘쳐 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솔로몬이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드린 예배에 감동을 받으셔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7)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셨다. 하나님은 감동을 받으시면, 무언가 꼭 보답하고 싶어 하신다. 상을 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가 꼭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예배의 근본정신은, 순수함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순수하게 예배하는 사람을, 결코 지나치지 않으신다. 반드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복을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을 감동시키시는 예배는, 사명을 따라 간구하는 예배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감동을 받으셨다. 그 밤에 솔로몬을 찾아오셔서, 소원을 물으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 그러나 알고 계시지만, 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주신다고 하지는 않았다. 구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마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다.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여기서 전부 ‘구하라’고 하셨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물음에, 사명을 따라 구하였다. 부나 존귀를 구하지 않았다. 왕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구했다. (8-10)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하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내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시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솔로몬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다. 왕으로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심을 알았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알았다.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알았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누구를 통해 흘러 내려왔는가를 알았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먼저, 아버지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를 굳게 해 달라고 기도드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때, 그 은혜가 누구 때문에 왔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누구를 통해 임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했다. 그 은혜를 귀히 여겼다. 우리는 얼마나, 부모님의 은혜를 잘 잊어버리는가? 또한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잘 잊어버리는가? 

솔로몬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자신이 왕임을 알았다. 그는 사명을 자각했다. 백성들의 문제를 풀어주어야 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백성들의 문제를 재판할 때, 가장 필요한 지혜와 지식이 부족함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며, 아직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왕상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였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기 한계를 아는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 겸손해진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도 안다. 솔로몬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으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사명을 따라, 지혜와 지식을 구하자 기뻐하셨다. 솔로몬의 대답은 정답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대답을 했다. (왕상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안다. 

자신의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간구에 기쁨으로 반응하신다. (대하1:11-12)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전무후무한 복을 주셨으니, 얼마나 복된가? 

우리 모두,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창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이런 말씀이 없는데, 유독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고, 왜 기록하고 있는가? 

주일은 온 성도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안식하면서 주님께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날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진다. 그러므로 예배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 길이 없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더니, 하나님이 크게 감동하셨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이 솔로몬을 찾아오셔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전무후무한 축복과 지혜를 주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또한 그 사람에게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와 부와 장수의 축복을 주시기 원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자가 되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 예배, 믿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예배, 사명을 따라서 간구하는 예배를 통해, 주님을 감동시키는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