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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수꾼 (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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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겔 3:16~21)


<파수꾼의 중요성> 

저는 군대 생활을 최전방 철책선 부대에서 했습니다. 80년대 중반 강원도 동부전선에서 꼬박 만 2년 동안을 GOP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에 우리 연대는 1개 대대가 6개월마다 교대 근무를 했습니다. 다시 말해 1개 대대가 6개월 동안GOP에 올라가 경계 근무를 서야 했습니다. 전방 투입을 하기 전에는 예외 없이 무사고를 비는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단골로 썼던 설교 본문이 오늘의 본문이었습니다. 전방에 올라가 경계 근무를 서는 일이 곧 파수꾼의 사명을 뜻했기에 이 본문을 선택하는 일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제가 전방에서 근무할 때에만 하더라도 경계 근무가 삼엄했습니다. 북한군 장교인 신중철 씨가 제가 근무했던 지역에서 월남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간첩이 침투할지 알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철책선을 감시해야 했습니다. 만에 하나 작은 개구멍이라도 뚫리는 날에는 부대 전체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더군다나 24시간 교대 근무를 설 때 반드시 실탄이 장전된 총과 수류탄, 크레모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나섰기에 크고 작은 안전사고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철책선 부대에서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장교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장교는 용서받을 수 없다." 어떻게 하다가 작전에 한 번쯤 실패하는 것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군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용서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경계 근무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경계 근무를 소홀히 해서 혹 한 밤중에 간첩이라도 침투하는 날에는 전 부대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후방의 국민들까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파수꾼은 보초를 서는 초병을 말하는데 그 사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부대가 전쟁터나 성곽 안에 주둔하게 될 때 반드시 망루를 세워 보초를 서게 했습니다. 적군의 침입을 파악하고 경고해서 알리고 신속하게 응급처치를 하도록 했던 것이지요. 파수꾼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경계 근무를 잘 서주면 부대 내의 모든 병사들과 후방의 국민들이 한 밤중에도 평안히 잠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태만하거나 소홀히 해서 전방이 뚫리는 날에는 부대 안의 온 병사들과 후방의 국민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파수꾼이 절실한 시대> 

본문 17절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파수꾼'이라는 말은 에스겔을 부대 안에서 실제적인 보초병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기가 닥칠 때 이 위기 상황을 신속하게 알리는 영적 파수꾼이 되라는 것이지요.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 년 전, 에스겔이 활동했던 시대는 참으로 위기와 혼란으로 점철된 시대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북방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망했습니다. 남왕국 유다 역시 남쪽으로는 애굽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바벨론 제국의 침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남유다 왕국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도 같이 멸망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이런 위기가 코앞에 닥쳤음에도 왕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상숭배와 분열, 도덕적 부패와 타락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적군의 침공을 알려서 경고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에스겔에게 주신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정치에는 양보와 타협이 사라지고 극한 대립과 투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모두 다 국민을 원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당리당략을 앞세울 뿐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이러한 정쟁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서민 대중입니다. 민생 문제는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서 싸움만 하고 있으니 불안한 것은 국민입니다.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로 국민들의 살림살이도 말이 아닙니다. 정리 해고가 되어서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이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간격도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만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유흥가는 점점 더 늘어나고 먹고 즐기는 향락 문화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고 교회 역시 눈에 띄게 침체해서 표류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를 자주 듣는 편인데 그 분의 메시지는 언제나 단순명료합니다. "예수를 믿어야지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른바 복음주의적 메시지인 것이지요.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언제나 '회개'가 단골 메시지로 등장합니다.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와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요즈음 교회의 강단에는 회개의 메시지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극장식 교회가 되어서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문화 사회적으로 어떤 정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더 골몰합니다. '웰빙 목회'라고 해서 사람들을 평안히 잘 살게 하는 쪽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은 특히 중산층 교회일수록 두드러진 현상인데 '회개'와 '중생', '십자가'와 '부활'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의 기업이나 사교 클럽처럼 되어 버렸고,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취미 생활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꿈과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시련과 고난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언어 장애, 문화 장애, 경제적인 곤란까지 겹쳐서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때에는 고생이 고생인줄 모르고 다 견뎌냈습니다. 그 힘든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저에게는 반드시 박사 학위를 움켜쥐어야 한다는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과 희망만 있으면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데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 우리 교회가 과연 그런 꿈과 희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때 부총리와 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던 한완상 박사님의 간증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서대문 교도소의 독방에 수감이 되었습니다. 그 때 20대 후반의 교도관이 자기 직업이 부끄럽고 미래가 없는 일이라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수감된 한박사님을 오히려 더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 교도관이 한 박사님이 있는 독방 문을 따고 들어왔습니다. 혹시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우므로 좌우를 살핀 뒤 한박사님이 앉은 자리에 자기도 한 번 앉아보고 싶다는 부탁이었습니다. 자신은 감옥 밖에 있는 자유인임에도 기쁨도 행복도 없는데 감옥 안에 부자유한 수인(囚人)으로 있는 한박사님이 훨씬 더 행복해보여서 부러워서 그런다는 것이었지요. 

군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한완상 박사님은 양심과 신앙에 따라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출옥한 뒤 세상에 나가 펼칠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옥중에서도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예민한 양심이 있었기 때문인지 자기가 하는 교도관 일이 희망이 없다고 낙심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꿈과 희망이 있으면 오늘 우리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감옥 안에 있어서도 철창 밖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이 없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가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역시 세속적인 가치관과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세상에 꿈과 희망을 주기보다는 냉소와 실망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에스겔처럼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업에, 우리 교회에, 우리 국가에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그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경고할 수 있는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파수꾼 에스겔의 사명과 책임> 

영적인 파수꾼으로서의 에스겔은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18-21절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이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역할을 할 것을 분부하십니다. 악인과 의인의 경우, 그들과 관련해서 어떻게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 가르치십니다. 먼저 악인에 관해서는 18-19절을 보세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첫째로, 어떤 악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반드시 멸망할 것을 파수꾼에 일러 주었건만 파수꾼이 이것을 전달도 하지 않고 경고도 하지 않아서 그 악인이 죽을 경우, 그 죽음의 피값은 그를 깨우치지 아니한 파수꾼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교회와 국가가 명백한 죄 속에 빠져 망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일러주셨건만 우리가 경고도 하지 않고 깨우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그 때 그가 망한 것은 자신의 죄값 때문이지만 그 책임은 제 때에 경고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묻겠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악인을 깨우쳐 줌으로써 파수꾼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경고를 듣고서도 그 악인이 회개하지 않고 고집 사납게 악행을 계속해서 죽었습니다. 그 때 그의 죽음은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죽은 것이므로 그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하고 이를 깨우쳐 준 파수꾼은 책임을 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의인과 관련된 파수꾼의 사명과 책임은 20-21절을 보세요.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첫째로, 의인이 쭉 의롭게 살아 온 길을 떠나 악한 일에 빠질 때 하나님은 그 앞에 올무를 놓아 그 의인이 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파수꾼이 이 사실을 알고서도 깨우쳐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물론 그 의롭다가 악인으로 전락한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고 이전에 행했던 의로운 행실도 악행 때문에 다 기억되지 않고 빛을 잃게 될 곳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미리 깨우쳐주지 않은 파수꾼 역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의인이 얼마든지 죄악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었지만 다행히 파수꾼이 이를 미리 경계해주어서 범죄하지 않았을 때 당연히 그 사람은 삽니다. 경고를 달게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경우에는 파수꾼 역시 자신의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살게 됩니다. 

<좋은 파수꾼이 되려면> 

파수꾼의 사명에 대한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파수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파수꾼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경고하는데 있습니다. 적군이 기습공격을 할 때 큰 소리로 외치거나 나팔을 크게 불어서 알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제대로 수행을 못해 만에 하나 적군이 몰래 침입해서 큰 혼란이 일어나면 파수꾼이 모조리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최고로 사형까지 당할 수가 있지요. 그렇다면 파수꾼이 보초를 잘 서서 적군의 침입을 크게 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보초 서는 초병이 졸거나 잠을 자다가 발각이 되면 즉시 영창에 가야 합니다. 심한 경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큰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17절을 보면 에스겔이 파수꾼이 된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파수꾼의 소임도 하나님을 대리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 맡은 우리에게 감당할 힘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방심하거나 태만하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의 영적 전선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노려봐야 할 것입니다. 벧전 5: 8절은 우리의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두루 찾기 때문에 항시 깨어 있고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훌륭한 초병은 졸거나 자는 법이 없습니다. 

둘째로, 눈이 밝아야 합니다. 

전방 철책선에 초병으로 뽑혀 나가기 위해서는 시력이 중요합니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초병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 초병으로 뽑힌 우리도 영안(靈眼)이 밝아야 합니다. 마귀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를 흔히 'seer', '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 봄은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눅 11: 34절에서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워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왜곡되면 세상도 왜곡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사랑과 진리의 눈으로 이 세상을 잘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귀가 밝아야 합니다. 

전방에서 보초서는 병사는 귀가 예민해야 합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말하기 전에 우리는 듣는 것부터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역시 말하기 전에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에서도 하나님은 에스겔로 하여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지 그 말씀을 외칠 수가 있지요.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니라"하는 말씀을 수도 없이 하셨습니다. 청각이 좋아서 음성만 귀에 들어온다고 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잘 분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라고 주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망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고, 우리의 직장과 사업이 병들고, 우리의 교회가 오염되고 타락하고, 우리의 국가가 부패해서 망해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평범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안을 갖춘 사람에게는 보입니다. 평범한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성령으로 할례를 받은 영적인 귀를 갖춘 이에게는 들립니다. 평범한 입을 가진 사람은 외치지 못하지만 성령의 숯불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외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에서 파수꾼의 소임을 잘 감당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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